728x90
반응형

요동성 복원 모형/ⓒ나무위키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옆에 있는 탑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렇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 구름이 땅에 드리워진 것을 보고는 구름 속으로 찾아 들어가 보았더니 어떤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갑자기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났다. 그 옆에는 3층으로 된 탑이 있었는데, 위에 솥을 엎어 놓은 듯하여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가서 승려를 찾아보니 다만 거친 풀만 있었다. 그곳을 한 길가량 파 보았더니 지팡이와 신발이 나왔고, 더 깊이 파자 명(銘)이 나왔다. 그릇 위에 범서(梵書, 인도 문자인 산스크리트 어로 기록된 글)가 있었는데 모시고 있던 신하가 이 글을 알아보고는 불탑이라 했다. 왕이 자세히 물으니 대답했다.

'이것은 한(漢)나라 때 있었던 것으로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 원래는 휴도왕休屠王으로 쓰는데 하늘에 제사 지내는 부처다.)이라 합니다."

이로 인하여 성왕은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 7층 목탑을 세웠고, 그 이후에 불법이 처음으로 전래되자 탑과 불도의 인연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은 탑의 높이가 줄어들고 본래의 탑은 썩어 무너졌다. 아육왕(阿育王,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 아소카로, 불교를 굳게 믿었으며 불교의 자취를 따라 곳곳에 탑을 세웠다.)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洲, 옛 인도의 별칭인데 여기서는 인간 사회로 볼 수 있다.)에는 곳곳마다 탑을 세웠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

또 당나라 용삭(龍朔) 연간에 요동에서 전쟁이 있었다.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는 수양제가 정벌했던 요동의 옛 땅에 가서 산에 있는 불상을 보았는데, 모두 텅 비어 있고 적막하며 행인의 왕래조차 끊어져 있었다. 한 노인에게 묻자 이렇게 말했다.

'이 불상은 선대에 나타났던 것이오.'

그래서 이것을 그려서 서울로 돌아왔다(모두 '대장경'을 함에 넣고 함의 차례를 천자문의 차례로 표시한 약함若函에 기록되어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강 밖에 있으며 한나라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했다.

고구려 성왕이 어떤 임금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명왕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紹) 2년(기원전 37년)에 제위에 올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년(기원전 19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에는 한나라도 불경을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해외의 변방 신하가 범서(梵書)를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를 포도왕이라고 불렀으니, 서한 시대에도 필시 서역 문자를 아는 사람이 있어 범서라고 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아육왕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을 하나씩 세우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세워진 염부계(閻浮界, 인도를 말한다.) 안의 8만 4000개 탑을 큰 바위 속에 숨겨 두었다고 한다. 지금 곳곳마다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이 하나 둘이 아닌데, 아마도 진신사리(眞身舍利)는 그 감응을 헤아리기 어렵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육왕(育王)의 보탑(寶塔)은 온 속세에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혀 이끼가 끼었구나.

그 당시 길 가던 사람들 눈길을 생각해 보면

몇 명이나 신의 무덤을 가리키며 제사 지냈을까?

-삼국유사 권제3 탑상(塔像) 요동성의 육왕탑-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