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참회록

-윤동주-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 만 이십사 년 일 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한다.

――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온다.






자화상

-윤동주-



산모퉁이를 돌아 논가 외딴 우물을 홀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봅니다.


우물 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습니다.


그리고 한 사나이가 있습니다.

어쩐지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나이가 가엾어집니다.

도로 가 들여다보니 사나이는 그대로 있습니다.


다시 그 사나이가 미워져 돌아갑니다.

돌아가다 생각하니 그 사내가 그리워집니다.


우물속에는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이 불고 가을이 있고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憧憬)과

별 하나에 시(詩)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異國少女)들의 이름과

벌써 애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들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히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끝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