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조선의 건국이념인 주자학은 중국 송나라 시대의 주류 학문으로 북송의 주돈이, 소옹, 장재, 정호, 정이 등 다섯 명의 학자를 거쳐 남송의 학자인 주희가 집대성한 학문이며 송학, 정주학, 도학, 성리학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린다. 주자학은 이전 시대 한당의 훈고학이 자구 해석에 얽매이거나 경전을 기송하는 데만 주력한 나머지 유학의 장점인 실천적인 측면이나 수양의 문제를 방기함으로써 불교와 도교에 사상적 주도권을 빼앗긴 것을 전면적으로 반성하면서 일어났다.

 주자학은 동시대의 불교와 도교의 이론을 빌려 이전의 유학이 생활 윤리 규범에 머물렀던 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형이상학적 토대를 구축하였는데, 그중에서 우주와 인생을 설명하는 데 가장 중요한 개념이 이(理)와 기(氣)이다.

 이기론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개념으로 기가 현상과 신체, 물질, 도구, 수단 등에 해당하는 것이라면 이(理)는 본체와 정신, 본질, 목적 등에 해당하는 개념으로 존재론뿐만 아니라 윤리학 또는 인간학, 심성론과 수양론, 학문 방법론에 이르기 까지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탁월한 설명력을 가지는 범주체계이다.

 기는 일기, 음양, 오행, 만물 등 다양한 모습과 형태를 지니고 차별적인 모습으로 나타나는데,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모든 사물은 기의 응짖 또는 변형일 뿐이며 만물의 생성 소멸 또한 기의 이합집산으로 설명된다. 곧 기가 모이면 사물이 생성되고 흩어지면 사물이 소멸하는 것이다.

 이(理)는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근거라고 할 수 있다. 모든 사물은 기에 의해 설명될 수 있지만 그것들은 제멋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한 질서를 갖추고 있어야 할 모습으로 있다. 이 있어야 할 모습을 갖추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이(理)이다. 이는 우주와 만물의 근거이며 우주가 우주로 있어야 할 모습을 부여해 주는 원리이자 본질이다. 개별적으로 말하면 이는 개개의 사물이 개개의 사물다운 특징을 갖게 하는 원리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이기론은 각자 뚜렷하게 구별되는 개념이지만 이 둘의 관계는 때로 미묘하고도 복잡한 사색을 필요로 할 만큼 까다로운데 그것을 한마디로 표현한 것이 둘은 떨어지지도 않고 섞이지도 않는다는 뜻인 불리부잡(不離不雜)이라고 할 수 있다.

[동양철학산책/김교빈 최종덕 김문용 전호근 김제란 김시천]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퇴계 이황]


기대승에게 보내는 이황의 편지글 '답 기명언(答 奇明彦)'

 요즘 보내신 두 번째 글의 가르치을 받고, 먼젓번 제 편지에 말이 소략하고 그릇된 곳이 있음을 알았기에 삼가 수정하여 고친 글을 앞에 써서 괜찮은지 여쭙고, 뒤에 바로 두 번째 글을 이어서 보내니 밝혀 회답해 주시기를 삼가 바랍니다.

 성과 정을 구분하는 논의는 선대의 유학자들이 자세히 밝혔으나, 오직 사단과 칠정에 대해서는 그것이 모두 정이라고만 했을 뿐, 이(理)와 기(氣)를 나누어 말한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지난해에 정지운이 천명도를 만들면서 사단은 이(理)에서 발하고 칠정은 기에서 발한다는 내용이 있었는데, 나의 뜻에도 역시 그 분별이 너무 심하여 분쟁의 실마리가 되지 않을까 두려워했기에 순선(純善)과 겸기(兼氣) 등의 말로 바꾸었습니다. 그 뜻을 말씀드리자면 대체로 서로 도와서 연구하여 밝히고자 함이며, 그 말에 흠이 없었다 함은 아니었습니다. 이제 당신의 변설을 보니, 잘못을 지적하여 타일러 줌이 자세하니 깨우침이 더욱 깊습니다. 그러나 아직 미혹됨이 있기에 시험 삼아 말씀드리니 바로잡아 주시기를 청합니다.

 사단이 정이고 칠정 또한 정으로 다 같은 정인데 어찌하여 사단과 칠정이라는 다른 이름이 있겠습니까. 보낸 편지에 이른바 자사와 맹자가 각각 주장하여 말한 것이 같지 않다고 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理)와 기는 본래 서로 기다려 체(體)가 되고 용(用)이 되어 진실로 이(理) 없는 기없고, 기없는 이가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장한 말이 이미 서로 틀리니, 또한 분별이 없을 수 없습니다. 예부터 성현들이 이 두 가지를 논할 때에 어찌 꼭 혼합하여 한 가지 설로만 분별없이 말하였겠습니까. 또 성(性) 한 글자를 말씀드려도 자사는 이른바 천명의 성[天命之性]이고 맹자는 이른바 성선의 성[性善之性]입니다. 이 두 성(性) 자가 가리키는 뜻은 어디에 있습니까. 장차 이기가 부여한 가운데에 나아가 이 이(理)의 근원을 가리켜 말함이 아닙니까. 그 가리키는 바가 이(理)에 있고 기에 있지 않기 때문에 순수하고 순선하고 악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만일 이(理)와 기가 서로 떨어지지 않기 때문에 성이 기를 겸한 것이라고 말한다면 성의 본연이 아닌 것입니다.

 자사와 맹자는 도체의 온전한 것을 환히 들여다보고 이와 같이 말했는데, 그것은 기를 섞어서 성을 말하면 성의 본래 상태가 선하다는 사실을 알기 어렵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후세에 정호, 정이, 장재 등의 여러 선생들이 나온 뒤에야 기질의 성[氣質之性]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나 그들 또한 자사나 맹자의 말씀에 더 보태려고 한 것이지 다른 의견을 세우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가리켜 말한 바가 사람이 태어난 뒤에 있는 것이니 역시 순수한 본연의 성[本然之性]으로 일컬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나는 일찍이 정에 사단칠정의 구분이 있는 것은 마치 성에 본연과 기질의 다름이 있는 것과 같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성을 이와 기로 나눌 수 있다면 정 또한 이와 기로 나누어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불쌍히 여기고, 부끄러워하고, 양보하고, 잘잘못을 가리는 것이 어디에서 움직이는가 하면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성에서 발동하는 것이고, 희(喜), 노(怒), 애(哀), 구(懼), 애(愛), 오(惡), 욕(欲)은 어디에서 발하는가 하면, 외물이 사람의 형기에 접촉되어 사람의 마음속에서 움직여 나오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사단의 발동을 맹자가 일찍이 마음이라고 말했으니 마음은 분명 이(理)와 기의 합으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가리켜 말한 것이 이(理)를 기준으로 한 것은 인(仁), 의(義), 예(禮), 지(智)의 성이 순수하게 마음속에 있으므로 불쌍히 여기고, 부끄러워하고, 양보하고, 잘잘못을 가리는 네 가지 마음이 그 실마리가 되는 것입니다. 또 칠정의 발동을 정자가 이르길 "마음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주자는 이르기를 "각각 마땅한 바가 있다."라고 하였으니 틀림없이 칠정은 이(理)와 기를 겸한 것입니다.(하략)

[퇴계집(退溪集) 권17, 서(書),답기명언(答奇明彦)/동양철학산책/김교빈 최종덕 김문용 전호근 김제란 김시천]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사진 이황의 성학십도/태극도 1568(선조 1)년 12월 왕에게 올린 상소문/출처:네이버/한국한중앙연구원)


 진차(進箚)

 성학(聖學)에는 큰 실마리가 있고 심법(心法)에는 지극한 요령이 있습니다. 이를 드러내어 그림을 만들고 이를 지적하여 해설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入道之門)'과 '덕을 싸흔 기초(積德之其)'를 보여 주려 하는데, 이는 제가 부득이하여 만들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임금의 마음은 온갖 정무가 나오고 온갖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많은 욕심이 서로 공격하고 많은 사악함이 번갈아 침범하는 곳입니다.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태만해지고 방종함이 계속된다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 같아서 누가 이를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이 도를 만들고 이 설을 지은 것이 겨우 열 폭의 종이에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를 생각하고 익히는 것이 단지 평소 한가한 틈을 타서 하는 공부에 불과하지만, 도를 깨달아 성인이 되는 요체와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를 베푸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대학도(大學圖)

 경(敬)이란 마음을 주재하는 것이며 만사의 근본이다. 그 힘쓰는 방법을 알면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시작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고서야 시작될 수 있음을 알게 되면, '대학'도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끝을 맺을 수 없게 됨을 일관하여 의심치 않게 된다. 마음을 일단 세운 뒤 이 경에 의해 사물을 밝히고(格物), 앎을 투철히 하여(致知), 사물의 이치를 모두 궁리하게 되면 이른바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尊德性而道問學). 이 경으로써 뜻을 성실히 하고(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여(正心), 자신의 몸을 수양하면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면 작은 것도 빼앗기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 경으로써 집안을 바로잡고 나라를 다스려서 천하에까지 미치면 이른바 "자기 자신을 수양해서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공손한 태도를 독실히 하여 천하가 태평해지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상의 모든 것이 하루라도 경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경이라는 한 글자가 성학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요체가 아니겠는가? (이상은 '대학혹문'에 나오는 주자의 말)

 경이라는 것은 위로나 아래로나 모두 통하고 공부를 착수하는 데 있어서나 그 효과를 거두는 데 있어서나 항상 힘써서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의 말이 위와 같았으니, 이제 이 열 개의 그림도 모두 경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요컨데 이(理)와 기(氣)를 겸하고 성(性)과 정(情)을 포함한 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성이 발현해서  정이 될 때가 곧 마음의 기미(幾微)인데, 이는 온갖 변화의 중심이며 선악의 분기점이 되는 때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경의 태도를 유지하는 데 전념하여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더욱 이것들을 몸소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발동하지 않았을 때에는 잘 보존하는 존양(存養)의 공부를 깊이 하고, 마음이 발동한 뒤에는 잘 살피는 성찰(省察)의 습관이 익숙해져서, 진실됨을 축적하고 오래 힘써서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다면, 이른바 정일(精一)의 방법으로 중(中)을 포착한다는 성학(精一執中之聖學)과 본체를 온전히 보존함으로써 모든 일에 올바로 대처한다는 심법(存體應用之心學)이 다른 곳에서 구하기 전에 여기에서 얻어질 것입니다.

[이황 '성학십도'/원본 '퇴계집' 권7/'한국문집총간' 29 (민족문화추진회, 1989)/동서양 고전]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