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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부산성/문화재청

신라 제32대 효소왕 대에 죽만랑(竹曼郞)의 무리 가운데 득오(得烏, 혹은 득곡得谷) 급간이 있었는데, 화랑의 명부에 이름을 놀려놓고 날마다 나오다가 열흘 동안 보이지 않았다. 죽만랑이 그의 어머니를 불러 물었다.

"당신의 아들은 지금 어디 있소?"

득오의 어머니가 말했다.

"당전(幢典)인 모량부(牟梁部)의 아간(阿干) 익선(益宣)이 제 아들을 부산성(富山城, 경주 서쪽에 있는 해발 729.5m 부산富山 정상부를 중심으로 세 줄기의 계곡을 감싼 포곡식 석산성)의 창고지기(倉直)로 보냈는데, 급히 가느라 낭께 말씀을 드릴 겨를이 없었습니다.

낭이 말했다.

"네 아들이 만약 사사로운 일로 그곳에 갔다면 찾아볼 필요가 없겠지만 공적인 일로 갔으니 내가 가서 대접해야겠다."

그리고 나서 떡 한 합과 술 한 동이를 갖고 좌인(左人, 갯지-개질지皆叱知, 신라 때때에 종을 일컫는 말)들을 거느리고 떠나는데, 낭의 무리 137명 역시 의장을 갖추어 따라갔다.

부산성에 도착하여 문지기에게 득오실(得烏失, 위의 득오와 같은 사람이며 득오의 다른 명칭인 득곡得谷의 뜻말의 음차)의 행방을 물어보자 그가 말했다.

"지금 익선의 밭에서 관례에 따라 부역을 하고 있습니다."

낭은 밭으로 가서 가지고 간 술과 떡으로 득오를 대접했다. 그리고 익선에게 휴가를 얻어 득오와 함께 돌아오려고 했으나, 익선이 완강히 반대하면서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사리(使吏) 간진(侃珍)이 추화군(推火郡, 경남 밀양의 옛 지명)의 세금 30석을 거두어 성안으로 수송하다가 선비를 귀중히 여기는 낭의 풍모를 아름답게 여기고 융통성 없는 익선을 야비하게 여겨, 가지고 가던 30석을 익선에게 주고 도움을 요청했으나 여전히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데 사지(舍知, 신라시대 17관등 중 13위 관등) 진절(珍節)이 기마와 말안장을 주니 그제야 허락했다. 

조정의 화주(花主, 화랑을 관할하는 관직)가 그 소식을 듣고 사신을 보내어 익선을 잡아다가 그의 더럽고 추잡함을 씻어 주려 했는데, 익선이 달아나 숨었으므로 그의 맏아들을 잡아갔다. 이때는 몹시 추운 날이었는데, 성안에 있는 못 가운데서 익선의 아들을 목욕시키니 그대로 얼어 죽고 말았다.

대왕은 그 말을 듣고는 모량리 사람으로 벼슬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 내쫓아 다시는 관공서에 발을 붙이지 못하게 하고 검은색 옷(승복)을 입지 못하게 했으며, 만약 승려가 된 자라면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절에는 들어가지 못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또 간진의 자손을 올려 평정호손(枰定戶孫, 한 마을의 사무를 맡아 보던 수장)으로 삼아 표창했다. 이때 원측법사(圓測法師)는 해동의 고승이었으나 모량리 사람이었기 때문에 승직을 받지 못했다.

이전에 술종공(述宗公) 삭주도독사(朔州都督使, 지금의 강원도 춘천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신라시대 지방행정구역으로 9주의 하나)가 되어 임지로 부임하게 되었는데, 삼한에 전쟁이 있어 기병 3,000명으로 그를 호송하게 했다. 가다가 죽지령(竹旨嶺)에 도착하니, 한 거사가 고갯길을 닦고 있었다. 공은 그것을 보고 감탄하고 칭찬했다. 거사 역시 공의 위세가 매우 큰 것을 좋게 보고 서로 마음속으로 감동하게 되었다.

술종공이 삭주에 부임하여 다스린 지 한 달이 되었을 때, 거사가 방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런데 아내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여 매우 놀라고 괴상하게 여겼다. 이튿날 사람을 시켜 거사의 안부를 물으니 사람들이 말했다.

"거사는 죽은 지 며칠 되었습니다."

심부름 갔던 사람이 돌아와 보고하니, 거사가 죽은 날이 꿈을 꾼 날과 같은 날이었다. 공이 말했다.

"아마 거사가 우리 집에 태어날 것 같소."

다시 군사를 보내 고갯마루 북쪽 봉우리에 거사를 장사 지내게 하고 돌로 미륵 한 구(軀)를 만들어 무덤 앞에 세웠다.

아내가 꿈을 꾼 날로부터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자 이름을 죽지(竹旨)라 했다. 그는 장성하여 벼슬길에 올라 김유신 공과 함께 부수(副帥, 주장을 보좌하는 장수)가 되어 삼한을 통일하고 진덕, 태종, 문무, 신문 등 4대에 걸쳐 재상이 되어 나라를 안정시켰다.

처음에 득오곡이 낭을 사모하여 노래(慕竹旨郎歌)를 지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去隱春皆理米,
지나간 봄 그리매
毛冬居叱沙哭屋尸以憂音,
계시지 못해 울면서 시름하는데
,
두덩을 밝히오신 모습이
皃史年數就音墮支行齊,
해가 갈수록 헐어가도다.
目煙廻於尸七史伊衣,
눈 돌림 없이 저를
逢烏支惡知乎下是,
만나보기 어찌 이루리
郞也慕理尸心未行乎尸道尸,
낭이여! 그리운 마음의 모습이 가는 길에
蓬次叱巷中宿尸夜音有叱下是.
다북쑥 구렁에서 잘 밤 있으리.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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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초기 여러나라의 성장과정/두산백과]


 마한(馬韓)

 '삼국지( 三國志) 위지(魏志)' 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국지 위지는 진(晉)나라 역사가 진수(陳壽)가 편찬한 위, 촉, 오 삼국의 정사 '삼국지' 중 위나라 부분으로 '위서(魏書)'가 정확한 말이다. 여기에 마한 50여 국의 이름이 있으며 백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 왕 준(準)은 궁중 사람들과 측근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나라 땅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했다."

 견훤(甄萱)이 태조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습니다.(금마산은 지금의 전북 익산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다.

 (삼국사기 본기에 이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는 그 뒤 갑신년에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왕 준(準)을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왕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마한을 합병했음을 알 수 있고, 이 때문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간혹 금마산을 마한으로 알고 백제라고 하는 것은 잘못되고 황당한 일이다. 고구려 땅에 본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사이(四夷)는 구이(九夷)와 구한(九韓), 예(穢), 맥(貊)이 있으니, '주례(周禮)에서 "직방씨(職方氏)가 사이와 구맥을 관장했다."라고 한 것은 동이족 즉 구이를 말한 것이다.(사이四夷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을 일컫는다. 직방씨는 주나라 때의 관직명으로 천하의 지도와 토지에 관한 일을 했다.)

 '삼국사(三國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주(溟州)는 옛날 예국(國)이었는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印章)을 얻어 바쳤다."

 또 이렇게 말했다.(명주는 지금의 강릉이다.)

 "춘주(春州)는 옛날 우수주(牛首州)며 옛날의 맥국인데, 어떤 이는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라고 한다."(삭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삭주군)

 '회남자(淮南子)'의 주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동방의 이(夷)는 아홉 종류나 있다."

 '논어정의(論語正義)' 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구이란 첫째 현도, 둘째 낙랑, 셋째 고려, 넷째, 만식(滿飾), 다섯째 부유(鳧臾), 여섯째 소가(素家), 일곱째 동도(東屠, 여덟째(倭), 아홉째 천비(天鄙)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 에서는 이렇게 말했다.(해동안홍기는 신라의 승려 안홍이 지은 책이다.)

 "구한이란 첫째 일본, 둘째 중화(中華), 셋째 오월(吳越), 넷째 탁라, 다섯째 응유(鷹遊), 여섯째 말갈(靺鞨), 일곱째 단국(丹國), 여덟째 여진(女眞), 아홉째 예맥(貊)이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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