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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이혼을 이이(離異)라고 하였다. 그 밖에도 출처(出妻), 기처(棄妻)라는 말도 쓰였다. 출처는 처를 내쫓는 것이고, 기처는 처를 버린다는 뜻이다. 낱말에도 나타나듯이, 조선시대의 이혼은 부부 사이의 합의에 따라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남편이 일방적으로 아내를 버리는 행위였다. 아내 쪽에서 이혼을 제기할 수 있는 것은 처부모를 구타한다든지, 처를 생명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심하게 구타하는 경우에 한했다. 그 경우에도 이혼의 제기는 당사자가 아니라 그 부모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이혼, 즉 아내를 내쫓기 위한 명분으로는 유교적인 가르침에 따라 칠거지악 (七去之惡)이 있었다. 아내를 내쫓을 수 있는 일곱 가지 경우는 첫째, 시부모에게 불손하거나 둘째, 아들을 낳지 못하거나 셋째, 음행을 저지르거나 넷째, 투기를 부리거나 다섯째, 나쁜 병을 앓거나 여섯째, 말이 많거나 일곱째, 도벽이 있는 경우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삼불거(三不去)라는 예외조항이 있었다. 쫓겨나서 돌아갈 곳이 없거나, 시부모의 삼년상을 치렀거나, 가난하고 미천한 집을 부귀하게 만든 경우에는 예외로 한다 하였다. 하지만 굳이 삼불거를 이유로 들지 않더라도 칠거지악을 이유로 이혼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시부모를 구박하거나 음행을 저지른 경우에는 심각한 이혼사유가 될 수 있었지만, 그 밖의 경우에는 사소한 사유로 이혼하지는 않았다.




고려시대의 경우에는 신분에 관계없이 재혼이 자유로웠다. 심지어 왕실에서도 그러해서 고려 초에는 문덕왕후(文德王后) 유씨가 과부가 된 상태에서 성종과 혼인하였고, 그려 말에는 순비(順妃) 허씨가 3남 4녀를 낳고 충선왕과 재혼하기도 했다.

하지만 수절을 장려한 것도 사실이어서, 3품 이상의 처가 수절하는 경우에는 작위를 내려 주는 봉작(封爵)을 하였다.

그런데 고려 말에 이르러 재가를 점차 규제하기 시작했다. 공양왕 때에 6품 이상의 처는 3년상을 치르는 동안에는 재가를 금지하고, 위반하면 처벌하고 봉작을 회수하도록 하였다.

조선이 건국된 후로는 세 번 시집가는 삼가(三嫁)부터 규제하여 삼가를 실행(失行)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고, 이어서 삼가녀는 행실이 나쁜 여자들의 명부인 자녀안(恣女案)에 기록해 두고 그 자녀들이 관직에 진출하는 데에 제한을 두었다. 즉 세 번째 결혼 전에 낳은 자식은 관직의 품계에 제한을 두고, 세번째 결혼 후 낳은 자식은 금고(禁錮)에 처하여 벼슬살이를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법령들이 제대로 시행되지는 않은 듯하다.

그러나 세종 때에 이르러서는 삼가녀를 자녀안에 올리고, 그 자손은 사헌부, 사간원 같은 모법이 되어야 하는 맑은 벼슬자리나, 문신과 무신의 인사를 담당하는 중요한 관서인 이조, 병조의 관리가 되지 못하게 하였다. 이어서 성종 때에는 지방고을을 다스리는 수령직에 쓰지 못하게 하였다. 다만 이러한 조항들은 결혼 자체를 못하게 한 금지조항이 아니라 결혼해서 낳은 자식에게 불이익이 가도록 한 억제조항이었다.




그 후로 1477년(성종 8)에는 두 번 시집가는 재가(再嫁)도 규제대상이 되었다. 재가를 한 경우에는 자손들을 금고에 처하여 문과, 무과, 생원과, 진사과 과거에 응시하지 못하게 하여 벼슬길을 막았고, 이는 재혼 전에 낳은 자식에게도 적용되었다. 그러므로 양반가의 자식들은 출세를 하려면 아버지가 어머니보다 먼저 사망할 경우에 어머니의 재혼을 막아야 했다.

이러한 규정이 생겨난 데에는 유고적인 생각이 크게 작용했다. 여자가 홀몸이 되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게 된다. 특히 경제적인 어려움은 작지 않은 문제였다. 따라서 의탁할 곳 없는 여인들이 재혼을 하게 되는데, 그것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일부 유학자들은 재혼을 아주 곱지 않는 눈으로 보았다. 중국의 정자(程子)는 여자들이 재혼을 하는 것은 추위와 굶주림을 견디다 못해 하는 일이지만, 굶어 죽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고 절개를 잃는 것은 지극히 큰 일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굶어 죽을지언정 다른 남자와 결혼하는 것은 옳지 않은 처신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완고한 사고방식은 조선의 법령에도 영향을 미쳤다. 1477년에 성종은 의정부, 육조, 사헌부, 사간원 등의 고위 관원들을 모아 놓고 재가 규제에 대한 의논을 했는데, 일부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재가까지 규제하는 것은 너무 심하다고 하였지만, 성종은 재가 규제의 편을 들어 결국 재가 규제법이 시행되었다. 몇 해 뒤에 도승지 김승경(金升卿)이 재가까지 규제하는 것은 너무 심한 듯하니 규제를 풀자고 건의했으나, 성종은 두 번 시집가도 자신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식들에게 해가 미치는 것이니, 그래도 재가하고 싶은 여인들은 그러면 그만이라고 대답했다. 결국 이 조항은 '경국대전'에 수록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재가에 대해 일반인들의 견해가 그다지 심하게 부정적인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그래서 16세기에 퇴계 이황(李滉)이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둘째 며느리를 재가시켰다는 이야기가 전하기도 한다. 그리고 실제로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여자들의 재혼을 심각한 도덕적 흠으로 여기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래서 족보에도 재혼한 사실을 밝히고 전남편과 후남편의 이름을 모두 족보에 올렸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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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에서 일부일처제가 시행된 것은 분명해 보인다. 일부일처제는 대부분의 사회가 채택하고 있는 가장 적절한 혼인제도이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일부다처의 사례도 종종 발견되는데, 여기서 주의할 서은 일부다처란 처 외에 첩을 거느린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첩의 유무, 다과는 관계없이 처가 여럿인 경우를 말하는 것이다. 고려 태조 왕건은 왕비가 6명에 부인이 23명이었는데, 부인 23명은 차치하고 왕비가 여섯이었다는 것은 일부다처가 실제로 존재했다는 뜻이다.


물론 이는 왕실의 특수한 경우라고 반박할 수도 있지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1123년(인종 1) 고려에 다녀간 송나라의 사신 서긍(徐兢)이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의 부자들은 처를 서너 명씩 두었다고 전한다. 그리고 기록에도 최충헌(崔忠獻), 이제현(李齊賢)처럼 2명의 처를 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것은 첫 번째 처가 죽고 난 후 후처를 취했다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둘 이상의 처를 거느렸다는 뜻이다. 그래서 서울과 지방 두 군데에 처를 두었다는 기록도 있고, 한꺼번에 세 처를 두었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물론 이런 사례는 그리 흔한 것은 아니었다.


한국의 전통 혼례식의 초례 장면/ⓒ한국관광공사


그려시대 일부다처의 경우, 상당히 오랫동안 먼저 혼인한 처와 나중에 혼인한 처 사이에 차별 없이 대등한 관계를 유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고려 말에 이르면 '정처(正妻)' 외에 다음 처라는 뜻의 '차처(次妻)'도 보이고, 나머지 여러 처라는 뜻의 '서처(庶妻)'라는 용어도 보이는 것으로 미루어 처 사이에도 차츰 차별이 생겼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조선이 건국되고 나서 얼마 후 15세기 태종 때에 이르러서는, 극히 일부의 예외는 있었지만 일부일처제를 법적으로 확고히 하였다. 그래서 가장 먼저 결혼한 정처 하나만을 인정하고 나머지는 모두 첩으로 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가에서 첩을 두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었다. 지금은 중혼(重婚)을 법으로 금지하기 때문에 축첩은 법으로 인정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에서 암암리에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럴 경우 누가 첩인가는 자명하다. 나중에 혼인관계를 맺은 여자가 첩이 된다.

그러나 예전에는 처와 첩의 구분이 혼인의 순서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 처첩의 구분은 신분에 의해 결정되었다. 신분과 지위가 높은 양반가의 딸은 처로 결혼하지만, 일반양인이나 천민이 양반가의 남자와 결혼할 경우에는 처의 지위에 오를 수 없고 어디까지나 첩으로 인정될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계집종이나 기녀로서 첩이 된 천첩(賤妾)의 경우에는 지위가 더 열악했다. 그 소생 자녀의 경우에도 본래는 천자수모법(賤子隨母法)에 따라 천인(賤人)이 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지위가 높은 양반관리의 자녀를 천인으로 삼기에는 현실적으로 여러 가지 장애가 있어 결국 양인(良人)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은 서얼금고(庶孼禁錮)의 법에 따라 문과(文科), 생원과(生員科), 진사과(進士科)에 응시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따라서 문관직은 금지되고 무관직은 허용되었지만 실제로는 의관(醫官), 역관(譯官), 지관(地官) 등의 특수직에 진출하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에는 이 법이 서얼 자신의 금고에 그쳤으나, 16세기 명종 때에는 서얼의 자자손손(子子孫孫)에 미치는 것으로 해석되다가 조선 후기에 이르러 신분제가 조금씩 이완됨에 따라 파기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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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성리학이 도입되면서 조선시대에 접어들어 주자가례의 혼인절차는 대체로 그대로 이 땅에 정착되었다. 그런데 혼인에서 장작 중요한 문제는 혼례를 치르기까지의 세부적인 절차보다는 결혼 후에 부부가 어느 곳에서 살림을 시작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이것을 인류학에서는 거주규정(rule of residence)이라 하는데, 남자 쪽 집에 거주하는 것을 부처제(父處制), 여자 쪽 집에 거주하는 것을 모처제(母處制), 외삼촌 집에 거주하는 것을 외숙처제(外叔處制), 독립된 곳에 거주하는 것을 신처제(新處制)라고 한다.


기산풍속도첩 '장가'/ⓒ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국의 친영제는 전형적인 부처제이지만 우리나라 풍속은 그렇지 않았다. 신랑이 처가 ㅉ고에 들어가 신혼살림을 시작하는 모처제가 일반적이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남자가 결혼하는 것을 '입장(入丈)' 또는 '입장가(入丈家)'라 하였다. 글자 그대로 장인 집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이 말은 지금까지도 '장가든다'는 말로 남아 있다. 그리고 장가드는 혼인을 사위가 아내 집에 머물러 산다 하여 서류부가혼(壻留婦家婚)이라고 불렀다.


이 풍속은 유래가 아주 오랜 것이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전하는 바에 따르면, 고구려 풍속에 신랑 집과 신부 집에서 미리 약속이 이루어지면 신랑이 신부 집 문밖에서 자기 이름을 대고는 엎드려 절하면서 따님과 자고 싶다고 두세 번 하면 신부의 부모가 신랑을 자기 집에 들어가 살게 하는데, 집 담장 안 뒤쪽에 사위집(서옥 壻屋)이라는 작은 집에서 살림을 시작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신부를 맞이할 때에 신부대(新婦貸)를 지불하지 않고 노역(勞役)으로 대신하는 봉사혼(奉仕婚: Service Marriage) 또는 노역혼(勞役婚)의 흔적이 아닌가 생각된다. 봉사혼의 대표적인 예로는 이스라엘의 야곱이 외삼촌의 딸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7년 동안 외삼촌의 집에서 일을 해야 했다는 '구약성경-창세기'의 이야기를 들 수 있다.


서류부가혼의 풍속에 따라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수많은 사람들이 처가살이를 했고 아이들은 외가에서 성장했다. 김종직의 아버지 김숙자(金叔滋, 1389~1456)는 맏아들이면서도 처가살이를 했고, 경주 양동마을에서 태어난 회재 이언적(李彦迪, 1491~1553)과 그의 아버지, 할아버지는 고향이 제각각이었으며, 율곡 이이(李珥, 1536~1584)는 강를 외가에서 장장했는데, 이러한 것들은 모두 처가살이 풍속 때문이다. 그래서 성종 때 예종 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의 동생 한환(韓懽)이 장인을 때리고 욕한 일에 대한 처벌을 의논하는 자리에서 우찬성 손순효가 "우리나라에는 중국의 친영하는 예(禮)가 없어 모두 처가를 '집'이라고 하고 처부(妻父)를 '아버지'라 하고 처모(妻母)를 '어머니'라 하여 부모로 섬기니" 중국의 법보다 무겁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이다. 그래서 처가에서도 사위를 거의 자식과 같이 대우했다. 그래서 11세기 고려 문종 때에 공음전(功蔭田, 고려시대 5품 이상 관리에게 주어지던 토지로 자손에게 상속 가능한 토지)의 상속순위에서 사위는 아들 다음이었으며, 지방 향리의 자제를 기인(基人)으로 개경에 올려 보낼 때에도 순위는 아들, 손자, 사위, 아우, 조카의 순이었다.


그런데 조선의 유학자들은 이러한 풍속을 곱게 보지 않았다. 남자가 여자 집에서 사는 것은 양(陽)이 음(陰)을 따르는 것으로 하늘의 도(道)에 맞지 않는 야만적인 풍속이라고 비판했다. 그래서 1435년(세종 17)에 친영제에 따라 혼인하는 예법을 반포하고 그해에 태조의 서녀(庶女) 숙신옹주(淑愼翁主, ? ~ 1453년)를 파원군 윤평(尹泙)에게 시집보낼 때에 친영례를 행했는데, 그것이 조선에서 처음으로 행한 친영례였다.


기산풍속도첩 '시집가는 모양'/ⓒ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나 나라에서 아무리 강권해도 일반백성들의 풍속은 변하지 않았고, 이는 양반관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친영례와 서류뷰가혼의 풍속을 절충한 반친영(半親迎)이 등장했다. 


16세기 중종 때부터 시작되었다는 반친영이란, 말 그대로 온전한 친영이 아니라 서류부가혼과 절충한 반쪽짜리 친영이다. 그런데 반친영이 어떤 혼인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확실히 밝혀진 것이 없다. 혼례식 절차야 어찌 되었든 어느집에서 부부가 결혼생활을 시작하는가가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 최근까지 남아 있는 혼례습속을 보면 일정 기간 신부가 자신의 집에 그대로 남아 있었던 듯하다.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는 것을 초행(初行)이라 하는데, 혼례식만 치르고 신부는 그대로 자신의 집에서 살고 신랑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가끔 신부 집에 재행(再行)을 오는 경우도 있고, 신부 집에 일정 기간 살다가 예전 자기 집으로 신부를 데리고 오는 경우도 있는데, 그 기간이 1년인 경우는 해묵이, 1개월인 경우는 달묵이라 하였다. 신부가 집에 사흘 동안 있은 후에 3일 만에 시집으로 들어가는 것은 3일우귀(三日宇歸)라 하였는데, 우귀란, 시댁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이처럼 혼인풍속에는 여러 가지가 있어 지역에 딸, 시대에 다라 상당한 차이가 있었을 것을 짐작케 한다.


17세기까지만 해도 일반적이었던 여러 가지 제도, 예컨대 자녀들이 아들딸 구분 없이 차례대로 돌아가며 부모의 제사를 지냈던 윤회봉사(輪回奉祀) 제도나, 아들딸 구분 없이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 주었던 자녀균분상속(子女均分相續) 제도는 우리나라와 베트남에만 있었던 독특한 제도인데, 그것들은 모두 서류부가혼이 바탕이 되어 형성되었다.


그러나 18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이런 풍속들이 차츰 변했다. 혼례는 비록 여자 집에서 치르더라도 살림은 남자 집에서 시작하는 것으로 바뀌어, 남자가 '장가드는' 것이 아니라 여자가 '시집가는' 풍속이 확산되었다. 그리고 사위도 처가를 예전보다 멀리하게 되어 "처갓집 세배는 애두꽃 꺾어 가지고 간다"는 속담이 생기기도 했다. 4월 중순에나 피는 앵두꽃을 꺾어 세배 간다는 것은 처가를 소중이 여기지 않아 세배를 미루고 미룬다는 뜻이다. 처가에서도 예전에는 '반자식'으로 여겼던 사위를 이제는 점차 '백년손님'으로 여기게 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 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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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열녀춘향 수절가'에는 이도령이 밤에 춘향의 집을 찾아간 대목에서 월매가 한숨 쉬며 춘향에게 하는 말에 "무남독녀 너 하나를 금옥같이 길러 내어 보오항 같은 짝을 지어 육례 갖추어 여의자고 하였더니" 하는 대목이 있다. 혼인의 대명사인 육례(六禮)는 중국의 '의례(儀禮)'에 등장하는 것으로, 혼인을 치르기까지 거쳐야 하는 여섯 가지 절차를 말한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실제 혼례절차는 남송(南宋)의 주자가 집안의 예법으로 만들었다는 '주문공가례(朱文公家禮)라고 하였다.


기산풍속도첩 '초례상'/ⓒ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첫 번째 절차는 의혼(議婚)이다. 의혼은 양가에서 중간에 중매인을 통해 혼인을 의논하는 절차이다. 의혼은 혼인절차의 하나일 뿐 구체적인 형식도 없고 법적인 구속력을 가지는 것도 아니었다. 중매인은 양가를 오가면서 주혼자(主婚者)와 혼담을 나누어 혼인을 성사시켰다. 요즈음 혼주(婚主)라고 부르는 주혼자는 당사자의 아버지나 할아버지, 큰아버지, 외할아버지 등 집안의 어른이 맡아 하는데, 반드시 남자가 하는 것은 아니어서 할머니가 맡기도 한다. 주혼자는 혼인에 문제가 생겨 법적 책임을 묻게 되면 그 책임을 지는 사람이기도 하다.

양가 사이에 중매인을 두는 것으로도 알 수 있듯이 옛날에는 양반가에 연애결혼이란 없었다. '맹자'의 가르침에 "부모의 명을 기다려 중매인의 말을 듣지 않고 구멍을 뚫어 서로 엿보거나 담을 넘어 만나는 것은 부모와 온 세상 사람들이 천히 여긴다"고 하였다. 그래서 연애결혼은 예에 어긋나는 것으로 여겼다. 나이가 많은 홀아비나 과부의 재혼과 같은 특별한 경우에는 중매인을 두지 않고 당사자끼리 약속하여 혼인하는 경우도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매우 드문 예였다. 대부분은 부모의 명에 따라 얼굴도 모르는 사람과 혼인하여 일생을 함께해야했다.


납채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 번째 과정이 납채(納采)이다. 의혼과정에서 혼인하기로 어느 정도 약정이 되면 먼저 신랑 집에서 신부 집에 납채문(納采文)과 사주단자(四柱單子)를 보내고 신부 집에서는 신랑 집에 택일단자(擇日單子)를 보내는데, 이 과정을 납채라고 한다. 납채문에는 대개 주혼자의 이름으로 보잘것없는 집안의 어리석은 자식을 배필로 맞아 주셔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면서 납채예물을 보내니 혼례날짜를 잡아 연락해 달라고 신부 집에 보낸다. 신랑 집에서는 납채문과 함께 일명 사성단자(四星單子)라고도 하는 사주단자를 보내는데, 신랑이 태어난 연월일시를 쓴 것이다.


사주단자를 받은 신부 집 주혼자는 신랑의 사주를 토대로 궁합(宮合)을 본다. 궁합뿐 아니라 복명(卜命)이라는 이름으로 백년해로할 수 있는지 점을 치고, "갑자을축 해중금(海中金)"하는 식으로 60갑자를 순서에 따라 금, 목, 수, 화, 토 오행에 맞추어 길흉을 따지는 오행상극(五行相剋)을 보아 서로 상충되는 바가 있는지 알아본다. 또 원진살(元嗔煞)이라고 하여 부부가 서로 원망하고 미워하는 살이 있는지 디를 통해 알아본다. 예컨대 소는 말이 밭 갈지 않는 것을 미워하고 말은 소의 뿔을 싫어하니, 소띠와 말띠는 혼인하지 않는다는 식이다. 게다가 신부가 태어난 해와 혼인하는 해가 서로 어울리는지 합혼개폐(合婚開閉)라는 것도 본다. 물론 이 모든 것을 다 점치는 것은 아니지만 혼인의 길흉을 알아보는 방법으로는 이렇게 많은 방법이 있었다.


연길단자/ⓒ문화컨텐츠닷컴


이렇게 까다로운 궁합은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결혼이 자녀의 일생을 좌우할 중요한 선택이고 불확실한 선택이기 때문에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생각이 만들어 냈을 것이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상대방이 집에서 청혼이 들어왔을 때 특별한 이유 없이, 또는 노골적으로 싫은 이유를 대어 청혼을 거절하면 서로 사이가 나빠질 것을 염려하여, 청혼을 거절할 수 있는 핑곗거리로 삼기 위해 이런 여러가지 까다로운 조건을 만들어 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합혼개폐도 한(漢)나라 때에 흉노족이 청혼을 할 때에 그것을 거절하기 위한 수단으로 만든 것이라는 말이 전한다. 택일단자는 연길단자(涓吉單子)라고도 한다. 신부집에서는 혼인날짜를 잡아 신랑 집에 연길단자를 보내 혼인날짜를 통보한다.

납채과정은 지금의 혼인절차로 말하자면 약손힉과 같은 것으로, 완전하지는 않지만 상당한 구속력을 갖게 하는 절차이다.


세 번째 과정은 납폐(納幣)이다. 납폐는 대개 혼인하기 전날 이루어지는데, 혼서(婚書)라고도 부르는 납폐문(納幣文)과 빙재(聘財)라고 예물을 함에 넣어 신부집에 보내는 과정이다. 혼서에는 보잘것없는 집안에 따님을 보내주셔서 감사하며 예물을 보내니 살펴보아 달라는 인사를 하면서 청홍채단(靑紅采緞) 예물과 함께 함에 넣어 함진아비 편에 신부 집에 보낸다. 함은 대개 나무로 짜는데, 주로 버들고리나 대나무로 엮은 상자에 옷을 담아 두고 쓰던 시절에 나무로 짠 함은 신혼부부의 첫 번째 가구였다.


기산풍속도첩 '함진아비 행렬'/ⓒ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납폐는 아직 예식을 치른 것은 아니지만 납폐가 끝나면 혼인이 정식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했고 법적으로도 그러했다. 그래서 납폐가 끝난 후 신랑이나 신부가 죽으면 아직 혼례식을 치르지 않았더라도 상대방은 상복을 입어야 했다.

납폐 후에 마지막 절차로 친영(親迎)이 있다. 친영은 신랑이 신부 집에 가서 신부를 맞아 집으로 데리고 오는 과정이다. 신랑이 신부 집으로 신부를 맞이하러 갈 때에는 대개 백마를 타고 갔다는 기록이 고려 말에 보이는데, 조선 후기 풍속화를 보면 그때까지도 신랑은 백마를 타고 가는 모습으로 그려지고 있다.


친영 행렬에서 기럭아비(雁夫)는 빨간 보에 싼 목기러기(木雁)를 안고 행렬의 앞장을 선다. 요즈음 흔히 신부가 혼수품으로 가져와 신혼부부의 살림방에 두는 쌍기러기는 예전과는 사뭇 다른 것이다. 목기러기는 신부가 아니라 신랑이 마련하는 것이며, 두 마리가 아니라 한 마리만 가져간다. 기러기는 신랑의 신부에 대한 신의의 표시로 가져간다고 전해진다. 신부 집에 도착하여 이 기러기를 상 위에 올려놓는 것을 전안(奠雁)이라고 하는데, 혼인날을 전안일이라고 부른 것은 여기서 유래되었다.


단원풍속도첩 '신행길'/ⓒ국립중앙박물관


신랑이 신부를 데리고 집에 오면 신부는 신랑 집에서 첫날밤을 치르고 다음날 아침에 시부모를 뵙는 현구고례(見舅姑禮)를 올리는데, 이때 이른바 폐백(幣帛)을 올린다. 그리고 그 다음 날 신랑은 신부 집에 가서 처부모와 처가 친척들을 뵙는 것으로 친영의 절차를 모두 마친다.

본래 혼례식에 관직이 있는 남자는 사모(紗帽, 조선시대 백관(百官)이 주로 상복(常服)에 착용하던 관모)와 품대(品帶, 벼슬아치의 품계 및 옷에 따라 갖추어 두르는 띠를 이르던 말)를 착용하는 것을 허락하고, 지위가 높은 여자는 원삼(圓衫, 부녀의 예복으로 갖추는 웃옷의 하나)을 입을 수 있었지만, 관직이 없는 사람은 일반적인 사대부의 옷차림에 갓을 쓰고 조아(條兒)라는, 색실을 꼬아 ㅏㄴ든 가는 띠를 띠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관습적으로 일반백성들도 사모와 품대를 띠고 혼인하게 되었던 듯하다. 혼인 당일만은 호사를 해 보고 싶은 마음에 너도나도 일반적인 격식을 어기고 화려한 혼례를 치르게 되자 나라에서도 어느 정도 묵인한 결과로 짐작된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 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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