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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96호 '윤급 초상'은 가로 113.3cm 세로 151.5cm 크기의 윤급(尹汲, 1697(숙종 23)∼1770(영조 46). 조선 후기의 문신)의 관복전신좌상이다.

사모(紗帽, 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쓴 모자)를 쓰고 서대(犀帶, 조선 시대 일품의 벼슬아치가 허리에 두르던 띠로 조복, 제복, 상복에 둘렀으며 무소의 뿔로 장식하였다.)를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를 부착한 현녹색 단령(團領, 조선 말기까지 모든 관원이 평소 집무복으로 착용한 상복)을 입고 있으며, 표피를 덮은 의자에 앉아 화문석(花紋席, 물들인 왕골을 손으로 덧겹쳐가며 엮은 다음 무늬에 따라 잘라낸 꽃돗자리)이 깔린 족좌대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깔려있지 않은데, 이러한 양식은 18세기 초 이후에 보이는 양식이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왼쪽 귀가 보이도록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향하게 표현한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형적 특색인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 형식으로, 쌍학문의 흉배는 구름을 수놓은 것 같이 표현하고자 구름의 윤곽선을 곡선이 아닌 짧은 단선을 세로로 그어 표현하였다.

그림에서 배 부분을 가장 어둡게 처리하여 무릎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느낌을 살렸으며, 의자와 족좌대의 나뭇결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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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남구만 초상은 네 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네 본 모두 생김새와 양식이 같다. 보물 1484호 남구만 초상 외에 남구만이 영의정 재직 시절에 모사한 영정이 현재 경기도 용인시 파담마을에 있는 사당에 남아있다.


남구만( 南九萬, 1629~1711, 조선시대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 조선 개국공신 재(在)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식(烒)이고, 아버지는 현령 일성(一星), 어머니는 권박(權瞨)의 딸이다.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51년(효종 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헤 가주서, 전적, 사서, 문학을 거쳐 이듬해에 정언이 되었다.

1659년 홍문록에 오르고 곧바로 교리에 임명되었다.

1684년에는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으며, 1694년 갑술옥사 때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어, 1696년 중추부영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 장씨의 처벌에 대해 경형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퇴관, 경사(經史), 문장을 일삼았다.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으며,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그의 작품 유명하다. 문집에는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보물 1484호 남구만 초상은 관복을 입고 앉아 있는 전신좌성으로, 사모에 서대를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를 부착한 현록색 단령을 입고 정면을 향해 앉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조선시대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모는 높아지고 폭은 약간 좁아졌으며 18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구름과 학이 포함되어 있다.

얼굴 살결은 이전에 비해 붓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며, 중국초상화의 형식 요소들을 받아들인 것들도 엿볼 수 있는데, 정면관, 표피 깔린 교의 족좌대 위의 팔자형 신발 등이 바로 그것으로 지적된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이렇게 정면관을 취한 초상화가 나타나는데,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다시 칠, 팔분면으로 제작이 된다.

정면으로 그려진 이 초상화는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얼굴을 윤관선이 거의 없는 듯이 보여 몰골기법에 가가우며, 얼굴 전체적으로 미묘한 선염을 구사하며 높낮이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그리기 가장 어려운 정면상을 소화할 정도로 초상화 기법이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점이기도 하다.

그림의 크기는 전체 224cm X 107cm, 그림 162.1 X 87.9c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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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작자 미상의 이채 초상에서 이채는 관을 쓰고 심의(深衣)-옛날 학자가 모든 공직을 떠나 있을 때 입었던 옷. 를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을 그렸다.

얼굴은 짧고 묘사적인 붓질을 수없이 그려 얼굴의 굴곡과 특징을 잘 표현해냈고, 양쪽 귀는 얼굴색보다 붉은 것이 특징이며, 흰 수염의 묘사도 매우 세세하고 대담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렇듯 안면의 세세한 묘사에 비해 심의에 나타난 주름은 음양을 세세하게 표현하기 보다는 비교적 단순하고 대담한 선을 위주로 처리해 입체적 느낌은 덜하다.

하지만 얼굴의 세세한 표현과 몸체의 단순하고 대담한 표현이 주는 대조를 통해 얼굴모습을 보다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편안하고 안정감 있는 노인의 품위를 잘 나타내고 있어, 조선시대 초상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초상화 상단 양측에는 찬문이 씌어져 있는데, 화면에서 우측 상부에는 이한진(李漢鎭, 1732~1815)이 전서로 쓴 이채의 자제문이 있고, 좌측 하단에는 유한준(兪漢寯, 1760~1834)이 예서로 쓴 찬문이, 좌측 상부에는 송원(松園)이 정묘년, 순조7년(1807)에 행초로 쓴 원교노인(圓嶠老人)의 찬-그림에서의 원교노인은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아닌 원교라는 호를 사용하는 다른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 씌어져 있다.


초상화 크기: 134.3cm X 77cm(전체), 99.6cm X 58cm(그림)


이채(李采, 1745~1820)는 영조 21년에 태어나 순조 20년까지 활동했던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74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 휘령전 참봉에 제수되었다. 차츰 사헌부, 호조, 형조의 벼슬을 거쳐 돈녕부주부를 지냈으며, 음죽현감이 되었을 때 무고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며 가업을 계승하는데 전념했다.

그러다 1790년(정조 14)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홍릉령, 지례현감, 선산부사, 상주, 충주, 황주 목사, 익위사의 위수, 사어 등의 관직을 거쳐 호조참판, 한성좌우윤 및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게 된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화천집' 16권 8책이 전한다.


화천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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