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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남녀의 혼인연령은 '경국대전'에는 자녀의 나이가 13세가 차면 의혼(議婚)을 허락하되 혼인은 남자 15세 이상, 여자 14세 이상이 되면 허락한다고 하였다. '주자가례'에서 혼인할 수 있는 나이를 남자는 16세 이상, 여자는 14세 이상으로 한 것에 비하면, '경국대전'에서는 남자의 나이만 한 살 낮춘 것이다.


그리고 '경국대전'에서는 사족의 딸이 가난하여 서른이 넘도록 혼인하지 않은 경우에는 나라에서 결혼에 필요한 자재를 지급하고, 특별한 이유 없이 혼인하지 않은 경우에는 가장을 처벌한다고 하였다. 나라에서는 나라살림을 풍족하게 하기 위해서는 인구가 늘어야 하므로 이러한 조항을 두었으나, 사실상 이러한 조처가 새행된 사례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다만 이덕무(李德懋, 1741.영조 17∼1793.정조 17)가 쓴 '김신부부전(金申夫婦傳)에 보이는 바로는 1791년(정조 15)에 서울 사람 가운데 혼인 적령기가 지났어도 가난 때문에 혼인하지 못한 자들에게 혼인자금으로 돈 50냥과 베 2필씩을 하사하여 150명이 결혼한 사례가 있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호적을 살펴보면 조선시대에는 대개 15세 내지 20세에 혼인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듯하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양반의 경우는 어린 나이에, 일반평민들은 나이가 더 들어서 결혼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양반, 평민을 막론하고 대개는 남자 쪽이 나이가 많았다. 19세기에 접어들어 일부 양반가에서 여자가 더 나이가 많은 경우가 자주 발견되지만 일반적인 것은 아니었다.


15세에서 20세 사이는 지금의 중, 고등학생 나이에 해당된다. 그래서 이를 흔히 조혼(早婚) 풍속으로 일컫는다. 이러한 풍속은 고려 때 몽고 지배하에서 처녀를 공녀(貢女)로 원(元)나라로 끌고 가기 때문에 이를 피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는 말이 전해지기도 하는데,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려진 것은 없다.


조선시대 조혼/출처: 중앙일보


그런데 조혼이라는 개념을 곰곰이 생각해 보면, 물론 어린 나이에 혼인한 것은 사실이지만 어린 나이라는 것도 시대에 따라 달리 해석될 수 있다. 그것은 성인 남녀가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는 나이가 시대에 따라 달랐기 때문이다.


혼인조건에서 중요한 것은 남녀 간의 사랑이지만, 예전에는 그런 것은 혼인조건이 될 수 없었다. 부모가 정해 주면 혼인할 뿐이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남녀가 혼인해서 가정을 유지할 수 있는 경제적인 여력이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혼인을 통해 남녀가 가장 기초적인 소비단위인 가정을 이루고 살아갈 때에 경제력은 가정을 유지하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혼인이 얼마나 경제적 요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는가는, 현대사회의 통계에서 경제상황이 좋아질수록 이혼 증가율이 낮아지고 경제상황이 나빠질수록 이혼 증가율이 높아지는 경향을 확실하게 보이고 있다.


경제성장률과 이혼증가율 추이/ⓒ한겨레


두 꺾은선그래프는 완전히 대칭을 이루고 있어 상관관계가 아주 밀접하다는 것을 실감나게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조혼도 이런 경제적인 요소로 설명될 수 있다. 2016년 한 결혼정보 업체가 밝힌 통계에 의하면 현재 평균 초혼 연령은 남자 36세, 여자 33세라고 한다. 이러한 만혼(晩婚)경향은 최근 몇십년 사이에 엄청난 속도로 가속화되었다. 이렇게 혼인이 늦어진 데에는 경제적인 조건이 작용했다. 한 사람이, 특히 남자의 경우에는 완전한 성인이 되어 가정의 경제를 책임질 만한 조건을 갖추었는가 하는 것이 결혼의 전제조건이었다. 군 입대, 고학력화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인해 한 사람이 한 가정을 책임질 만한 사람으로 성장하기까지는 매우 오랜 시일이 걸린다. 또 주거비용이 턱없이 높아지면서 주택 마련에 많은 비용이 들고, 이에 상응하여 여자의 살림살이 마련 비용도 늘어나면서 결혼에 이르기까지 많은 요건이 충족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그렇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20세가 가까워지면 농사꾼으로서 활동할 만한 체력과 기능을 갖추어 성인으로서 가정을 꾸려 갈 수 있었고, 주택을 마련하는 데 엄청난 비용이 드는 것도 아니었다. 양인 남자에게 16세부터 군역을 부과했던 것도 그만한 나이면 성인으로서 자립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양반의 혼인연령이 일반평민보다 낮았던 것도 양반의 경우 혼인 당사자의 나이가 어려도 부모의 경제력이 혼인 당사자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세기에 일부 양만가에서 이른바 '꼬마신랑'이 등장했던 것도 양반가의 경제력과 관련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때에도 일반평민 남자들의 평균 혼인연령은 20세 가까이 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조혼이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지금의 잣대로 단정할 일만은 아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 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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