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보물 1328호 기영회도(耆英會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8호 기영회도(耆英會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8호 기영회도(耆英會圖)/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328호 기영회도(耆英會圖)/국립중앙박물관]




기영회도(耆英會圖)에서 기영회(耆英會)는 조선시대 정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70세가 넘은 원로 사대부들의 모임으로 기로연(耆老宴), 기로회(耆老會)라고도 불렀다.

기영회는 고려시대 높은 관료들의 사적모임에서 출발해 점차 정치적 모임으로 발전했으며, 조선 태종 이후 연회적 성격으로 변모해가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영회는 예조가 주관했으며 따라서 예조판서가 주관자가 되고 왕의 비서실장격인 승지가 특별히 파견되어 감독했다.

보물 1328호 기영회도는 그 장면을 그림으로 그린 것으로 넓은 대청이 있는 건물 내부에서 행해지는 연회 장면을 생동감있게 잘 표현하고 있다. 전체 그림에서 윗부분에는 제목을 써넣었고, 아랫쪽에는 참석한 사람들의 이름과 자, 호, 본관, 품계 등의 서열과 시문을 적어 일반적인 계회도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연회의 장면을 그림으로 옮기는 것이 목적이었던 만큼 전체적으로 산수 배경은 생략했으며, 건물 내부를 부각되게 배치하여 연회에 참석한 원로사대부들과 주변 인물들의 움직임을 실감나게 담아내고 있다.

본 기영회도에서 참석한 일곱 명의 원로 사대부는 흉배 없는 관복(담홍포)을 입고 호피무늬 방석 위에 앉아 각각 앞에 상을 받아 두고 있으며, 두 명의 원로는 오랜 회포를 풀 듯 서로 공손히 무릎을 꿇고 잔을 들어 마주하는 장면도 연출되어 있다.

또, 그림 상에 나타나는 촛불을 통해 연회가 열린 시간이 저녁시간인 것도 알 수 있다.

7명의 참석자 명단은 홍섬(1504~1585), 노수신(1515~1590), 정유길(1515~1588), 원혼(1505~1588), 정종영(1513~1589), 박대립(1512~1584), 임열(1510~1591)이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 행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 행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 행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527호 [단원풍속도첩] 행상은 27.2cmX23.7cm의 크기로 부부관계로 보이는 두 남녀 상인이 사실적으로 표현돼 있다. 낡은 벙거지를 쓰고 지게에 나무통을 지고 있는 남편 상인과 광주리를 머리에 이고 있는 부인이 각자 지게막대와 긴 나무막대를 들고, 움직임이 좋게하기 위해 한복의 바짓가랑이를 감아 매는 행전(行纏)을 하고 있어 다른 먼 곳으로 행상을 떠나기 전 서로 헤어지며 잠깐의 담소를 나누는 모습으로 보여진다. 특이한 것은 부인의 등에 업혀 있는 아기가 저고리 안쪽으로 들어가 있는 모습이 당시의 이채로운 생활모습을 엿볼 수 있게 한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보물 1488호 심득경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8호 심득경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8호 심득경(沈得經, 1673~1710) 초상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심득경을 애도하여 윤두서(尹斗緖, 1668년∼1715)가 그린 작품이다.

심득경과 윤두서는 절친한 친구이자 친인척관계로 심득경의 어머니가 너무도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딸이며, 윤선도는 윤두서의 증조부가 된다.

이런 심득경이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자 윤두서는 이를 슬퍼하며 생전의 모습을 생각하며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해 석달만에 그림을 완성하는데,

완성된 초상을 심득경의 집에 보내 벽에 걸었더니 마치 죽은 사람이 되살아 온 것 처럼 모두가 놀라서 울었다고 전해진다.

<<남태응의 '청죽화사(聽竹畵史'>>


그만큼 묘사와 표현이 살아 생전의 실물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이다.

심득경 초상은 조선시대 전통적인 초상화 양식을 따랐지만 기존의 초상화와는 달리 필치가 부드럽고 담채가 은은하여 문인화가의 솜씨다운 면모가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림에 쓰인 찬문((贊文)에서도 이 초상이 심득경의 실제 모습뿐만 아니라 인품까지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고 감탄하고 있는데,

찬문 중에 심득경의 친구 서예가 이서(李敍 1662~?)가 지은 글을 보면,

'눈이 맑고 귀가 단정하며 입술이 붉고 이빨이 촘촘하다.'

'물에 비친 달은 그의 마음이요, 얼음 같은 옥은 그의 덕이다'

'잘 묻고 힘껏 실천했으며 깨달은 것은 확고했다'

라는 글을 통해 심득경의 실제 모습과 한결같은 그의 품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림 크기 160.3cmX77cm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채용신 작품/국립중앙박물관]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채용신 작품/국립중앙박물관]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채용신 작품/국립중앙박물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 선생의 초상화로 1905년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이 그린 작품이며, 보물 1510호이다.

초상화 우측 상단에 씌어있는 '勉菴崔先生 七十四歲像 毛冠本 면암최선생 칠십사세상 모관본, 乙巳孟春上澣 定山郡守時 蔡石芝圖寫 을사맹춘상한 정산군수시 채석지도사' 라는 기록을 통해 1905년에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의 74세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상화에서 최익현은 겨울철에 사냥꾼들이 즐겨 사용하는 가죽 감태를 쓰고 심의를 용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얼굴은 갈색선을 수없이 그어 요철과 명암을 표현했으며, 얼굴 표정과 주름은 물론 감태 특유의 털 느낌도 세밀하면서 대담하고 입체감 있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옷 부분은 흰색으로 채색했는데, 옷주름은 선으로 그린 것이 아닌 흰색 채색을 통해 배경색을 그대로 살려 표현한 것이다.


그림 크기

전체 82.2X55.0cm/ 그림 81.5X41.5cm



채용신은 칠곡군순, 정산군수 등을 지내고 종2품관까지 지낸 인물로 조선말기 우국지사나 항일투사의 초상화를 많이 제작했으며, 고종의 어진과 고종대한제국동가도(高宗大韓帝國動駕圖) 등을 그렸으며, 운낭자이십칠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황장길부인상(黃長吉夫人像) 등의 여인상도 그렸다.

그의 화법의 특징은 극세필을 사용해 얼굴의 육리문 묘사에 주력하고, 서양의 데생작업과 유사한 많은 필선을 사용해 요철,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한 점 등이 특징으로 꼽힌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