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포은 정몽주는 자신의 죽음을 예상하고 선죽교에서 이방원 일파에게 암살 당하기 전 술을 마시고 말을 거꾸로 타고 선죽교로 향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왜?




포은 정몽주는 낙마해 크게 다친 이성계를 병문안하고 정황을 살피고 귀가하던 중, 개성에 있는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와 그 일파에게 암살당했습니다.


유명한 이방원의 '하여가'와 포은선생의 '단심가'는 바로 이성계의 병문안을 핑계 삼아 정몽주와 이방원이 만났을 때 서로 주고 받았던 시조입니다.

나와 함께 대업을 이루자는 이방원과 고려왕조에 끝까지 충절을 지킨 정몽주 간에 당시 팽팽했던 대치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내용이죠.



하여가 (何如歌) -이방원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칡이 얽어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얽어져 백년까지 누리리라


단심가 (丹心歌)- 정몽주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님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이시랴



그가 이성계 집을 방문한 것은 이방원이 계략을 써서 그를 초청했다고도 하는데,

이때 이미 이방원은 심복부하 조영규를 시켜 쇠뭉치를 꺼내 선죽교 다리 밑에 숨었다가 정몽주가 지나갈 때 쳐서 죽여버려라 하고 지시하였고, 정몽주는 변중랑을 통해 이 정보를 입수했다고 합니다.


조영규와 무사들이 나타나자 그는 분위기가 이상함을 감지하여 말을 타고 이성계의 자택을 떠났지만, 돌아오면서 친구 집에 들러 술을 마신 후 말을 거꾸로 타고 마부에게 끌라고 했다는데요, 말을 끄는 사람이 정몽주 선생이 술이 너무 취해 그러는가 하고 의아해 물으니


부모님으로 부터 물려받은 몸이라 맑은 정신으로 죽을 수 없어 술을 마셨고,

흉한이 앞에서 흉기로 때리는 것이 끔찍하여 말을 돌려 탄 것이다.


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정몽주는 곧 닥쳐올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있었던 거죠.


포은 정몽주(1337~1392)


그 말을 이해 못한 마부는 말을 끌고 선죽교로 향했는데, 선죽교를 넘으려 할 때 멀리 숨어 있던 궁사가 정몽주를 저격하여 넘어트렸고, 순간 조영규가 이끄는 고여, 조평 등 5~6명의 괴한이 나타나 부상당하고 도망치는 정몽주를 쫓아가 철퇴와 철편으로 때려 암살했습니다.

이때 그가 조영규, 고여, 조평 등의 철퇴에 맞고 흘린 피가 개성 선죽교의 교각에 일부 묻었는데, 후일 백범일지에 의하면 1945년 이후 김구선생이 선죽교를 방문할 때까지도 그 흔적이 남아있었다고 합니다.

선죽교에서 정몽주가 암살을 당한 후 선죽교 돌 틈에서는 대나무가 솟아 그의 충절을 나타냈다는 전설이 있으며, 이후 이 다리는 원래 선지교라고 하였으나 다시 선죽교로 이름이 바뀌어졌고,

당시 정몽주의 나이는 향년 56세였습니다.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요금 KBS 드라마 '정도전'이 인기리에 방영이 되고 있습니다.

'정도전'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던 최영 장군, 조선의 태조가 되는 이성계 장군,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 등..

이런 인물들 중에 단연 포은 정몽주 선생의 고려를 향한 충심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포은선생의 충심은 조선의 3대 국왕이 되는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답으로 지었다는 '단심가'로 대표되며,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라고 시작하는 시구는 우리들의 뇌리 속에 아주 강하게 남아 있어 이번 '정도전' 이라는 드라마에서 포은 선생의 고려를 향한 충심은 어떻게 그려질지 사뭇 궁금하게 만듭니다.

 

아래는 영천시에 위치하고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임고서원 입니다.

임고 서원에 가면 포은정몽주 선생과 관련된 유품 유물들도 함께 만나볼 수 있고, 옛서원의 모습과 새로 지어진 서원의 모습이 조화롭게 배치 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상세정보(영천시 문화관광)

포은 정몽주 임고서원은 고려말의 충신은 포은 정몽주(鄭夢周)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8년(1553) 부래산(浮來山)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36(1603)에 중건되었다.
인조 21년(1643) 여헌 장현광(張顯光)선생을 배향하고 정조11년(1787)에는 지봉 황보 인 선생을 추향하였으나 고종 8년(1871)서원 철폐령으로 췌철되었다. 1965년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봉향하고 있으며 1980년 보수·정화되었다. 또한 1990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기존의 서원 옆에 새로이 서원을 세워 웅장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현재는 옛서원과 새로 지은 서원이 공존하고 있다. 포은 정몽주선생은 고려충숙왕 복위6년1337)현 임고면 우항리에서 일성부원군 운관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 전법, 판도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대명국교(對明國交)에도 큰공을 세웠다.

고려 삼은의 한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은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4년(1392)이방원의 문객 조영규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이후 조선태종 원년(1401)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변볼거리

경주김씨지사공종택, 선원동철불좌상, 환구세덕사

 

 

 

 

[사진출처:브로드몰 커뮤니티]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