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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유학자들은 출처(出處), 즉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감에 민감하였는데, 대부분의 유학자들은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어렵게 여기고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을 쉽게 여겼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이념일 뿐, 현실적으로는 여러 여건 때문에 실제 실행에 옮기기는 쉽지 않았다. 물러갈 생각을 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지만, 아무리 물러가려 해도 국왕이 놓아주지 않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조선 숙종 시기 소론의 영수였던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은 1706년 10월에 영의정에서 물러나려고 여러 차례 상소하였지만 국왕이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최석정이 뜻을 굽히지 않고 무려 16번이나 상소를 올리자 국왕은 할 수 없이 이를 허락해 주었다. 바로 그 다음 날 그는 종친부전부, 삭녕군수, 장령 들을 역임한 나양좌(羅良佐, 1638~1710)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최석정(崔錫鼎, 1646~1715) 초상/ⓒ국립청주박물관

방문을 닫고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하고 있으니 세속에 대한 모든 생각이 재같이 식었습니다. 하지만 동인(同人)을 생각하고 그리워하며 마음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중략- 저는 열여섯 번이나 사직서를 올렸는데, 어제 비로소 허락을 받았습니다. 사직을 허락받았으니 개인적으로는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최석정은 그 후에도 여러 차례 영의정으로 부름을 받아 조정에 나왔으며, 무려 40여 차례나 사직서를 올려 겨우 면직된 경우도 있었다. 1710년에는 약방도제조로서 임금의 병환을 살피는 데 소흘했다며 삭탈관직(削奪官職, 벼슬과 품계를 빼앗고 사판에서 이름을 깎아 버리는 일)과 문외출송(門外黜送, 조선시대 죄인의 관작을 빼앗고 한양 밖으로 추방하던 형벌)까지 당하였다.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서는 것도 이와 같이 어려웠지만, 수십 년 동안 서울에서 살다가 온 가족을 이끌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은 더더욱 어려웠다. 더욱이 그 때쯤이면 노령으로 신체가 허약해진데다가 걸핏하면 발병하므로 장기간 여행하는 것이 무리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1625년 10월에 이전(李㙉, 1558~1648, 조선시대 '월간문집'을 저술한 학자)이 아우 이준(李埈, 1560~1635, 첨지중추부사, 승지, 부제학 등을 역임한 문신)에게 보낸 간찰을 통해 알 수 있다.

듣자니 아우가 낙향할 뜻을 이미 굳혀서 호군(護軍) 봉록(俸祿)도 받지 않을 것이라 하는데, 많은 식구에 어떻게 지내려는가? 무척 걱정이 되네. 학질을 앓고 난 후 원기 회복이 쉽지 않았을 터인데, 추운 날씨에 뱃길 여행은 몸을 더욱 상하게 할 것 같아 우려되니, 부디 이 계획을 그만두길 바라네. 육로를 거쳐 오되, 혼자 오는 것이 간편할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꺼번에 가족을 거느리고 귀향하기가 불편하다면, 작은제수씨는 박첨지 집에 의탁한 뒤 나중에 내려오게 해도 무방할 것 같네.

당시 이준의 나이가 66세였으므로 사직하고 낙향하기에 적당한 나이였다. 그러나 그가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나 것은 그보다도 훨씬 후였다. 1627년에 정묘호란이 얼아나자 고령임에도 손수 의병을 모집하고, 조도사(調度使, 중앙에서 전국 각지에 파견되어 국가 재정에 필요한 물자를 조달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특별 어사)로 임명되자 군현을 돌아다니며 의곡(義穀, 의병이 납부한 곡식)을 모았다. 70세가 다 되어서도 국왕의 부름을 받고 중앙으로 나아가 승지, 대사간, 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다 보니 죽기 직전이 되어서야 겨우 벼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그도 남들처럼 퇴직한 후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고 어린 손자들이 장성하는 것을 바라보려는 꿈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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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관원들은 반역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사형을 당하는 경우가 드물었다. 관원으로서 중대한 범죄를 저질렀을 때에는 대부분 유배형에 처해졌다. 그런데 사화와 당쟁이 빈번히 일어나면서 이 유배살이가 관리들에게 하나의 필수과정처럼 여겨지게 되었기 때문에 관직생활을 하는 동안 유배를 한두 차례 당하지 않은 관원은 이름이 없거나 고위직에 오르지 못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 정파가 집권하게 되면 반대편의 실각한 정파의 주요 관리들을 제일 먼저 유배형에 처했는데, 실각한 정파가 훗날 다시 집권하면 유배되었던 관리들은 대부분 중앙의 정계로 복귀하였으므로 유배의 성격도 약간 변화하여 조선 후기에는 그것이 일종의 '정치금고'와 동일한 처벌로 간주되곤 하였다. 즉 유배기간에는 중앙의 정계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강화도 연산군 유배지/ⓒ한국관광공사

일단 유배형이 내려지면 유배지까지 가는 비용과 그곳에서 생활하는 데 드는 일체의 비용을 피유배자가 지불해야 했는데, 심지어는 호송관리의 수고비까지도 부담해야 했다. 그러므로 누군가의 모함 등으로 억울하게 유배를 당한 경우라면 그 손해가 엄청났지만 법이 그러므로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유배당한 관리의 신분이나 지위, 인적 관계와 복관 가능성 등에 따라서 떠나는 유배길이나 유배지에서의 생활이 크게 달랐는데, 고관이나 권신들은 유배길에 거처가는 군현마다 들러 그 지역 수령으로부터 향응을 받거나 유배지의 수령이나 아전들로부터 깍듯한 대우를 받는 경우가 많았다.

유배간 사람이 본가에 쓴 편지/ⓒ국립전주박물관

유배생활의 실제 모습을 조선 영조 대에 충청남도 직산군수(稷山郡守)를 역임한 전근사(全近思, 1675~1732)의 편지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전근사는 1728년 4월에 전라도 운봉현(雲峰縣,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동면·산내면·아영면 일대에 1914년까지 있던 행정구역.)으로 유배되었는데, 그 이유는 반란을 일으킨 이인좌의 무리를 보고도 진압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사실을 알아낸 대관(臺官, 조선 시대 사헌부의 대사헌 이하 지평까지의 벼슬)들은 그를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왕은 그를 의금부에 가두고 조사하게 했는데, 직무를 유기환 죄가 드러나자 운봉현에 유배하도록 지시하였다. 유배생활을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그는 같은 도(道)의 수령으로 재임하고 있는 친지에게 다음과 같은 간찰(簡札, 옛 편지들을 이르는 말. 서간(書簡), 서찰(書札)이라고도 부른다.)을 보냈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체직(관직을 교체하는 것, 보통 면직을 뜻하나 경우에 따라 파직을 뜻하기도 함) 후 유배생활을 하는 동안에 겪었던 어려운 사정은 잠시 말하지 않더라도, 체직된 후에 양식을 지니고 올 방법이 없어서 맨손으로 내려왔는데, 지금 식량을 주가(主家)에 부탁하기가 구차하고 어려운 상황이 한두 가지가 아니니 이 근심스러움을 어찌합니까? 형에게 사람을 보내어 어려움을 알리고자 하였으나 문지기가 막을까 염려될 뿐만 아니라, 관직에 있으면서 응대하는 어려움을 제가 평소에 잘 알고 있어서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이 지역 안에 영남 출신 친구로서 수령이 된 사람이 6, 7명에 이르니, 만약 유배지에서의 어려움을 알게 되면 반드시 무심하게 대하지는 않을 것이나, 관문(官門)은 사실(私室)과 다르고 어리석은 저의 종놈이 동서도 분간 못하기에 실로 서로 통할 길이 없으니 어찌하겠습니까? 관중(管仲, 관포지교의 관중을 빗댓 말)인 저를 알아주는 이는 오직 포숙(관포지교의 포숙을 빗댄 말)인 형뿐이니, 부디 같은 도 출신이 부임한 고을에 편지를 띄워서 특별히 구제해 달라는 뜻으로 간절히 부탁하여 제가 객중에서 지탱할 수 있도록 해 주시면 어떠하겠습니가? -중략- 근래에 갖가지 신병이 떠나지를 않아 날마다 신음하는 것이 일인지라, 형편상 혼자 머무르기가 어려워서 아들놈과 비복을 모두 데리고 왔습니다. 이 때문에 식구가 적지 않으니 더욱 근심스럽습니다.

이 편지의 내용을 통해 조선시대 관리들은 유배생활 중에도 가족과 함께 지낼 수 있었으며 비복(계집종과 사내종)까지 거느리고 살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근사는 자신의 신병 때문에 이들을 데리고 있을 수밖에 없다고 변명하지만, 어찌되었든 유배된 관리들 중에는 가족과 함께 살고 또 비복도 거느리고 산 사람이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또 유배기간에 드는 생활비를 당사자가 마련해야 했지만, 전근사는 경상도 출신의 호남지역 수령들로부터 도움을 받고자 노력했던 사실도 파악할 수 있다.

정약전의 유배기간을 그린 영화 '자산어보' 스틸 컷/출처 : 네이버영화

한편 같은 유배자라 하더라도 유배기간의 생활과 해배 이후의 행보에는 상당한 개인차가 있었는데, 물론 정치적인 유배의 경우는 유배기간 내내 울분 속에서 보내는 유배자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약용이나 정약전처럼 이 기간에 독서와 저술을 하고 또 유배지역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는 등 유교의 진작에 커다란 노력을 기울인 사람도 많았다. 이들은 복관 후에도 그 지역의 자제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제들이 과거에 합격하거나 관리로서 중앙에 진출할 수 있도록 후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물들은 사후에 그 지역 자제들의 추대로 서원에 배향되기도 하였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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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500여년 동안에 문과에 급제한 인물은 겨우 14,000여 명이었다. 따라서 한 해에 겨우 28명 정도만 문과를 통하여 관리가 될 수 있었다. 이와 같이 문과에 급제하여 관리가 되기는 매우 어려웠다. 그런데 문과에 합격한 후 중앙부서에 대간(臺諫, 대관臺官과 간관諫官을 함께 이르는 말로, 관리를 감찰하고 임금에게 간언을 하던 벼슬)과 같은 청요직(淸要職, 청빈함을 요구하는 중요한 관직-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삼사를 아우르는 관직)이나 승지와 같은 국왕의 시종관으로 근무하게 된다면 당사자는 말할 것도 없고 그를 배출한 가문으로서도 매우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받는 봉급은 의외로 적어서 그것만 가지고는 생활하기가 곤란하였다. 조선시대에 관리들에게 지급되는 녹봉은 고려시대에 비해 적었는데, 그마저도 갈수록 감소되었다고 한다.

이성원(李性源 1725~1790) 초상-조선후기 홍문관교리, 개성부유수,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 관리의 녹봉내력

구분경국대전인조 25년속대전
정1품中米 14石, 糙米 48石, 田米 2石, 黃斗 23石, 小麥 10石, 紬 6匹, 正布 15匹, 楮貨 10張米 14石, 田米 2石, 黃斗 4石米 2石 8斗, 黃豆 2石 5斗
정3품
(당상)
中米 11石, 糙米 32石, 田米 2石, 黃斗 15石, 小麥 7石, 紬 4匹, 正布 13匹, 楮貨 8張米 7石, 田米 2石, 黃斗 2石米 1石 9斗, 黃豆 1石 5斗
정6품中米 5石, 糙米 18石, 田米 2石, 黃斗 9石, 小麥 4石, 紬 1匹, 正布 10匹, 楮貨 4張米 4石, 田米 1石, 黃斗 2石<米 1石 1斗, 黃豆 10斗
종9품糙米 8石, 田米 1石, 黃斗 2石, 小麥 1石, 正布 2匹, 楮貨 1張米 2石, 黃斗 1石米 10斗, 黃豆 5斗

먼저 조선 전기 관리의 녹봉내력을 파악하기 위해 <경국대전>을 살펴보면, 정1품의 관리는 중미(中米 찧거나 쓿어 속겨를 한 차례 벗긴 쌀, 현미보다 더 쓿고 백미보다는 덜 찧은 쌀), 조미(糙未 왕겨만 벗긴 쌀, 현미玄米), 전미(田米 껍질을 벗기지 않을 쌀) 등 쌀 64가마, 콩(黃斗) 23가마, 밀(小麥) 10가마, 명주(紬) 6필, 베(布) 15필, 저화(楮貨 닥나무 껍질로 만든 지폐) 10장을 받았다. 정3품 당상이나 정6품 관리들은 같은 종류의 물품들을 차등 있게 지급받았다. 그러나 종9품의 경우에는 중미와 명주는 아예 지급받지 못하였으며, 그 밖의 것들도 아주 적은 양을 지급받았다. 그런데 조선 초기의 실록 등에 의하면, 흉년이 들거나 외국사신들이 자주 왕래하여 국가의 재정형편이 어렵다는 핑계로 실제로는 위 규정보다 녹봉을 적게 지급하였다.

경국대전(經國大典, 조선왕조 기본법전/ⓒ국립중앙박물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 인조 25년(1647)에 지급된 녹봉을 살펴보면, 정1품의 경우 전미를 포함하여 쌀 13가마와 콩 10가마였다. <경국대전>의 규정과 비교하면 녹봉의 종류가 크게 줄어들고 양도 급격히 감소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정1품에게 지급되는 녹봉이 이와 같이 적었으니 그 아래의 관원들에게 지급된 것이 어땠을지는 말할 필요조차 없다. 더군다나 1746년(영조 22)에 편찬된 <속대전>을 살펴보면 관리들의 녹봉이 더욱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정1품의 경우 겨우 쌀 2가마 8말과 콩 2가마 5말을 지급받았으며, 최하위직인 종9품은 단지 쌀 10말에 콩 5말 밖에 받지 못했다. 이 녹봉으로 고위직은 그럭저럭 살 수 있었을는지 모르지만, 하위직은 분명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조선시대에 관리들이 부정부패를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데는 관리들의 적은 녹봉이 어느 정도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속대전(續大典, 경국대전 법령 중 시행할 법령만을 추려 편찬한 통일 법전)/ⓒ국립중앙박물관

한양의 물가가 지방보다 월등하게 높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중앙 관리들은 녹봉만으로 생활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가계의 수입과 지출상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메워 주는 것이 타인들로부터 수수한 선물이었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서로의 집을 방문할 때 예의의 표시로 선물을 주었다. 심지어는 편지를 보낼 때에도 선물을 동봉하였다. 특히 요직에 있는 중앙관들은 지방의 수령으로부터 많은 선물을 받았는데, 이 경우 뇌물과 선물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당시 풍조가 선물을 자유롭게 주고받았기 때문이었는지, 어떤 경우에는 선물을 받고도 또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으면 이를 청탁하기도 했다. 1644년 정월에 영의정 김류(金瑬, 1571~1648)가 익산군수 조행립(曺行立)에게 보낸 편지에 그러한 내용이 잘 드러나 있다.

봄날 그리운 생각에 더욱 견디기 어렵습니다. 뜻하지 않게 편지와 아울러 각종의 새해선물도 받았습니다. 더욱 옛정이 변하지 않았음을 알겠으니, 고마움이 갑절이나 됩니다. -중략- 당신 관할 지역에 살고 있는 나주부사를 역임한 김 아무개는 잘 지냅니까? 부디 내가 살아 있다고 전해 주고 또 음식이라도 보내 주어, 이 늙은이 생색이라도 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이 편지 속의 별록(別錄)은 죽은 아들의 첩에 관련된 일인데, 관례를 깨서라도 세밀히 살펴 주시기 바랍니다.

김류는 조행립이 새해인사와 아울러 보낸 여러 종류의 선물을 받고서 우선 고마움을 표시하고 있다. 아울러 지인인 나주부사 김 아무개에게 자신의 소식을 전해 주고 먹을거리를 보내 생색을 내달라고 부탁하였다. 그러나 실제로 부탁할 것은 죽은 아들의 첩에 관한 일이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이와 같이 사적으로 은밀히 청탁하는 일은 별지(別紙)에 작성하였으며, 이를 읽어 본 후에는 뒷날 말썽이 일어나지 않도록 태우는 것이 관례였다. 김류의 경우에도 별록이 전하지 않는 것은 그런 관례 때문으로 추정된다.

당시에 김류는 영의정에 재임 중이었으니 어느 수령이 청탁을 들어주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수령은 비록 지방에 파견되어 있지만 언젠가는 교체되거나 승진하여 중앙의 부서로 돌아갈 관리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 간찰을 통해서도 볼 수 있듯이 명절이나 절일에 중앙의 고관들에게 선물을 보내어 그들과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유지하려 하였다.
 
중앙관들은 박봉으로 생활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으며, 수입과 지출의 차이를 지방 수령들이나 친지들이 보내 주는 선물로 보충해 간 데 비해 지방관, 그중에서도 특히 수령은 그러한 생활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다. 지방 관아에는 수령이 유용할 수 있는 재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난해서 부모를 제대로 봉양하지 못하는 관리들은 국왕에게 이를 핑계로 수령에 임명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수령은 자신의 소관 업무만 담당했던 경관과는 달리 사법, 군사, 행정의 모든 일을 혼자서 주관해야 했기 때문에 매우 바쁜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러한 모습은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이 쓴 간찰에 잘 나타나 있다.

동추(同推, 관원이  합동으로 죄인을 추문하는 일)하는 걸음이 아니면 창고를 돌며 조적(糶糴 관에서 쌀을 비축하고 배포하는 일)을 나누는 일로, 비록 한가한 고을이라고는 해도 장부 정리도 때에 맞추어야 하고 공문 처리하기에도 겨를이 없다. 여러 고을이 대부분 같아서, 진실로 덜하고 더한 차이가 없다. 붓을 들고 종이를 펴니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오르는데, 미처 한 글자도 적기 전에 창 밖에서는 형방이 무릎을 꿇고 '하삷오며(爲白乎旀)'나 '저저자자(這這刺刺)' 등의 소리를 내며 읽고 있고, 개구쟁이 아이가 진한 먹에 붓을 적시고 종이 모서리를 비스듬히 잡고 있으니 나는 먹으로 돼지 모양 비슷하게 수십 개의 서명을 바쁘게 한다. 물러나 생각해 보면 앞서 가슴속에 있던 미처 쓰지 못한 한 편의 좋은 문장은 애석하게도 어느새 만 길 지리산 너머로 달아나 버렸으니 어찌한단 말이냐?

이 간찰에는 관아에서 관속(官屬)들이 각자의 업무를 처리하느라 분주하고 왁자지껄한 모습과 갑자기 떠오른 좋은 시상(詩想)을 바쁜 업무에 쫓겨 놓쳐 버린 후 안타까워하는 박지원의 모습이 매우 잘 나타나 있다. 그러나 박지원은 수령직에 있는 덕분으로 지인인 남공철과 심상규 등에게 백지 한 뭉치씩을 보내 주고, 친척과 친지에게 요전(料錢, 급료)과 제수전(祭需錢, 제사에 필요한 재료를 장만하는데 사용하는 돈) 등을 줄 수 있었으며, 또 수시로 말린 고기와 볶은 고기, 곶감과 고추장 등과 같은 반찬과 먹을거리 등을 집에 보낼 수 있었다.
 

[내용 출처 : 전통사화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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