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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에 나오는 '태평'의 세계에 관한 설명
[관련글 읽기: 장자에 나오는 '덕이 가득한 나라'에 관한 이야기]




대저 제왕의 덕은 하늘과 땅을 최고의 조상으로 삼고, 도덕을 주인으로 삼으며, 무위를 늘 그러함으로 삼는다. 무위는 곧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을 써도 남음이 있다. 그러나 유위는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쓰이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그러므로 옛사람들이 귀하게 여긴 것은 저 무위인 것이다.
윗사람이 무위하고 아랫사람 또한 무위한다면 이것은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덕을 함께하는 것이다. 아랫사람과 윗사람이 덕을 함께하면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게 된다. 아래사람이 유위하고 윗사람 또한 유위한다면 이것은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도를 함께하는 것이다.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도를 함께하면 군주답지 못하게 된다. 윗사람은 반드시 무위하여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을 써야 하고, 아랫사람은 반드시 유위하여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을 위해 쓰여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바뀌지 않는 불변의 원칙이다.
그러므로 옛날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게 왕 노릇 하던 사람은 지혜가 비록 온 우주의 원리를 헤아릴 만해도 스스로 계획을 세우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비록 변별력이 온갖 사물의 차이를 세세하게 드러낼 수 있다 해도 스스로 이론을 세워 설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비록 자신이 지닌 능력이 인간 세계 전체를 포용할 수 있어도 스스로 이를 실천에 옮기려고 하지 않았다.
하늘이 낳아 주지 아니하여도 온갖 것들은 변화한다. 땅이 길러 주지 아니하여도 온갖 것들은 자라난다. 제왕이 함이 없어도[무위]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이 공을 이루게 된다. 그러므로 "하늘보다 신비스러운 것은 없고 땅보다 부유한 것은 없으며 제왕보다 위대한 것은 없도다."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제왕의 덕은 하늘과 땅에 짝하니 이것이야말로 하늘과 땅을 타고 온갖 것들을 몰며 인간의 무리를 부리는 길이로다."라고 한 것이다.




근본은 윗사람에게 달려 있고 말단은 아랫사람에게 달려 있다. 중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것은 군주에게 달려 있고 실무적으로 세밀하게 시행하는 것은 신하에게 달려 있다.
삼군의 대군과 다섯 가지 무기로 무장한 특수부대를 운용하는 것은 덕의 말단이다. 상벌을 내리고 이해관계로 거래하고 성문화된 형벌로 다스리는 것은 교화의 말단이다. 의례의 절차와 법률의 규정을 상세히 규정하고 신하들의 직책과 실제의 수행을 상세히 비교, 감시하는 것은 행정수단의 말단이다. 종을 치고 북을 울리는 소리에 맞추어 무장이 깃털을 들고서 춤을 추는 모양을 갖추는 것은 음악의 말단이다. 큰 소리를 내어 울고 읍을 하고 허술하게 상의를 입고 허리와 머리에 띠를 두르고 성대하고 오랜 기간 상례를 치르는 것이나, 짧은 기간 간단하게 상례를 치르는 등의 세부 사항은 애도를 표현하는 말단이다.
이 다섯 가지 말단은 모름지기 정신이 움직이고 심술이 작동한 뒤에야 그로부터 따라나오는 것이어야 한다.
다섯 가지 말단적 학문은 옛사람들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나 이것을 앞세우지는 아니하였던 것이다.
군주가 앞서고 신하가 따른다. 아버지가 앞서고 자식이 따른다. 형이 앞서고 아우가 따른다. 어른이 앞서고 어린 사람이 따른다. 남자가 앞서고 여자가 따른다. 남편이 앞서고 부인이 따른다. 대저 지위나 신분의 높고 낮음과 앞서고 뒷따름은 하늘과 땅이 가는 방식이다. 그러므로 성스러운 사람이 모델로 취한 것이다.
하늘은 높고 땅은 낮으니 신이 밝혀지는 자리이다. 봄과 여름이 앞서고 가을과 겨울이 뒤따르는 것은 사계절의 순서이다. 온갖 것들이 변화하고 자라날 때 갓 나와 꼬부라진 새싹은 모양이 가지각색이지만 번성하고 시들어 버리게 되는 것은 자연 세계의 변화의 추이이다.
대저 하늘과 땅이 지극히 신비스러우나 높고 낮음, 앞서고 뒷따름의 순서가 있는데 하물며 인간의 도에서랴! 종묘에서 제사를 지낼 때에는 직계를 높이고, 조정에서 일을 논할 때에는 지위가 높은 사람을 높이고, 마을에서 일을 논할 때에는 연장자를 높이고, 커다란 행사를 벌일 때에는 지혜로운 사람을 높이는 것이 큰 도의 순서이다.
도를 말하면서 그 순서를 말하지 아니하는 것은 그 도를 부정하는 것이다. 도를 말하면서 도를 부정하는 자가 어찌 도를 취하겠는가!


[사진 장자/네이버 지식백과]



이런 까닭에 옛날 대도를 밝히고자 하는 사람은 먼저 하늘을 밝히고 도덕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도덕이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인의를 그 다음으로 하였다. 인의가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분수를 그 다음으로 하였다. 분수가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형명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형명이 밝혀지고 나서야 인임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인임이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원성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원성이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시비를 그 다음으로 하였다. 시비가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상벌을 그 다음으로 하였다.
상벌이 이미 밝혀지고 나서야 어리석은 사람과 지혜로운 사람이 저마다 마땅한 자리에 처하게 되고, 귀한 사람과 높은 사람이 저마다 조심스럽게 자신의 자리에 서게 된다. 어질고 밝은 사람과 못난 사람이 저마다 실정에 맞추어지게 되면 반드시 저마다의 사회적 역할이 그 능력에 다라 나뉘게 되고, 그 사회적 신분이나 직책에 따라 처신하게 된다.
이와 같은 방식으로 윗사람을 섬기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아랫사람을 길러 주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다스리고 이와 같은 방식으로 몸을 닦되 지모가 쓰이지 않게 하여 반드시 그 하늘로 돌아가게 한다. 이것을 일컬어 '태평'이라고 하는데, 곧 통치의 이상이다.
그래서 옛 책에서는 이렇게 말한 것이다.


형[形]이 있으면 이름[名]이 있다.


형명이란 것은 옛사람들도 가지고 있었으나 내세우지는 않았던 것이다.
옛날 큰 길을 말하는 살마은 다섯 번째가 되어서야 형명을 언급하였고, 아홉 번째가 되어서야 상벌에 대해 말하였다. 갑작스럽게 형명을 말하는 것은 그것의 근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갑작스럽게 상벌을 말하는 것ㅇ은 그 처음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길을 전도하여 말하고 길을 순서를 바꿔서 말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다. 어찌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가 있겠는가!
갑작스럽게 형명, 상벌을 말한다면 이것은 통치의 도구만 아는 것이지 통치의 길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쓰일 만은 하겠으나 하늘 아래 모든 사람들을 부리기에는 부족하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 변사라고 하는데 곧 한 가지 재주만 갖춘 사람이다. 예법 도수, 형명 비상은 옛사람들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아랫사람들이 윗사람을 섬기는 방법이지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기르는 방법은 아니다.
[동양철학산책/김교빈 최종덕 김문용 전호근 김제란 김시천/장자,'천도']


[관련글 읽기:장자에 나오는 '덕이 가득한 나라'에 관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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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도담삼봉에 있는 정도전 동상/출처: Steve46814 at ko.wikipedia.com]


 정도전(1342~1398)의 호는 삼봉(三峯). 자는 종지(宗之), 본관은 봉화로서 아버지는 정운경(鄭云敬)이고 어머니는 우연(禹淵)의 서녀(庶女)이다. 당시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362(공민왕 1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375(우왕 1)년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관리로 임명된 것에 반발하였다가 나주로 귀양갔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권력을 잡자 그의 천거로 요직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공신에 책봉되었다. 1391(공양왕 3)년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반대파의 탄핵으로 봉화로 유배되었다가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한 뒤 중앙으로 복귀하였다. 이 해에 조준(趙浚), 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강씨의 둘째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군사와 재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조선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1396년 명나라에서 외교 문서의 내용을 문제삼아 정도전에게 명나라로 입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거부하였다. 1397년 요동 정벌을 주도하였으나 이듬해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정도전의 삼봉집(三峯集)

위로는 음양을 조화롭게 하고 아래로는 서민을 편안하게 하며, 안으로는 백성을 밝게 다스리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진정하고 무마하는 것이니 국가의 포상과 형벌이 여기에 관련되며 천하의 정치와 명령이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진 삼봉집/한국학중앙연구원]


'삼봉집'은 정도전의 사상과 정치적 지향을 담고 있는 책이다. 우왕 말년에 작성된 권근(權近)의 서문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처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1397(태조 6)년에 아들 정진(鄭津)에 의해 증보 간행되었는데, 이 때까지는 서문이 중심이었다. '삼봉집'은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중간되었다. 1465(세조 11)년에 손자 정문형(鄭文炯)이 '경제문감(經濟文鑑)',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편(心氣理篇)', '심문천답(心問天答)' 등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이어 1481(성종 18)년에는 정문형이 시부(詩賦) 100여 수와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1791(정조 15)년에 왕명에 따라 성종대의 판본을 정리하여 다시 간행하였는데, 현재 전해지는 판본의 대부분은 정조 때 간행된 것이다.

 '삼봉집'은 모두 1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1에서 권 4까지는 각종 시문과 악장(樂章)이며, 권 5는 '불씨잡변', 권 6은 '심기리편'과 '심문천답', 권 7은 진법(陣法)과 습유(拾遺), 권 8은 부록, 권 9와 권 10은 '경제문감', 권 11과 12는 '경제문감별집', 권 13과 권 14는 '조선경국전'이다.

 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대체로 시문(詩文), 경세서(經世書), 사상서(思想書), 병서(兵書), 악장(樂章) 등 다섯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삼봉집'은 고려를 대신한 조선 국가의 사상적, 법제적 기초를 닦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불교를 대신하는 성리학의 이념적 위치를 확립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불씨잡변'은 고려 말에 활발히 제기된 배불론을 집대성한 것이면서 종래의 단선적 비판을 넘어 체계적 비판을 시도한 것이다. 물론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제시된 비판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성리학의 우위를 제시한다는 정치적 목적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논리가 일방적 성향을 띠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체계적 비판은 성리학의 정착을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후 기존 이념에 대한 비판의 수준을 넘어 당대의 이념으로서 그 내용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한편 법제적 관점에서 보면, 15세기 조선 국가 체제 정비의 초석을 놓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조선은 태조대에 '경제육전'의 편찬을 시작으로 육전 체제에 입각한 법전의 정비를 모색하였고, 이것은 영구히 지켜 나갈 법전으로서 '경국대전'을 반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조선경국전'은 바로 법전에 입각한 국가 운영이라는 정책 지향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이는 육전의 내용 중에서도 '헌전'을 특히 강조하며 후서(後序)를 덧붙인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삼봉집'은 조선 국가의 중심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과 법전 체제의 바탕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 조선 당대에 지성사적으로 높이 평가받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정도전이 태종과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제거되었던 사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후대의 학인들은 정치적 측면에서 정도전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따라 '삼봉집'도 주목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까지 '삼봉집'에서 제시한 조선 국가 체제의 이념적 원리가 부정된 것은 아니었다. 1791(정조 15)년에 왕명으로 '삼봉집'이 다시 간행된 것은 주목되는 부분이다. 정조는 1785(정조 9)년에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여 법전 체제의 재정비를 도모한 바 있다. '삼봉집'의 재간행도 그러한 관심의 한 반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삼봉집'은 조선 일대에 걸쳐 국가 체제의 토대가 된 저작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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