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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은 소당 이재관(小塘 李在寬, 1783-1838, 조선 후기의 화원화가로 본관은 용인, 자는 원강, 호는 소당, 벼슬은 감목관을 지냈다. 전통적인 수법을 계승하면서도 독자적인 남종화의 세계를 이룩한 화가이다.)의 작품으로 초상화의 상단에 "若山眞影 小塘寫(약산의 진영 소당이 그림)"이라 쓰여 있어 초상화의 주인공이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였던 약산 강이오(若山 姜彛五, 1788(정조 12)∼?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임을 알 수 있다. 강이오는 정조 시대 예단(藝壇, 예술계) 총수 격이었던 강세황(姜世晃)의 손자로 벼슬은 그리 높지 않았지만 문인화가로서는 널리 이름을 알렸다. 당시 예술작품에 대한 감식안이 높았던 추사 김정희나 신위(申緯, 조선 후기의 문신·화가·서예가)의 글 속에서 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강이오의 초상화는 섬세한 필력을 바탕으로 강이오의 차분한 인상이 특징적으로 잘 묘사되었고, 능숙하고 빠른 속도로 그려낸 의습선(옷의 주름 등을 표현하는 필선)은 이재관의 개성적인 필법인 날카로운 각선들로 표현되었다. 초상화의 오른쪽 윗부분에는 이재관과 강이오 모두와 친분이 있었던 김정희가 초상화를 평한 글과 '노염제(老髥題)'라는 서명이 있으며 '염(髥)', '추사(秋史)'라는 인장이 찍혀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을 통해 이재관이 강이오의 초상화를 그린 까닭을 유추해 볼 수 있으며, 그 까닭은 아마도 그들이 1833년 창경궁영건공사와 1838년 태조 어진 모사 작업에 참여한 인연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5호 약산 강이오 초상(若山 姜彛五 肖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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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96호 '윤급 초상'은 가로 113.3cm 세로 151.5cm 크기의 윤급(尹汲, 1697(숙종 23)∼1770(영조 46). 조선 후기의 문신)의 관복전신좌상이다.

사모(紗帽, 문무백관이 관복을 입을 때 갖추어 쓴 모자)를 쓰고 서대(犀帶, 조선 시대 일품의 벼슬아치가 허리에 두르던 띠로 조복, 제복, 상복에 둘렀으며 무소의 뿔로 장식하였다.)를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를 부착한 현녹색 단령(團領, 조선 말기까지 모든 관원이 평소 집무복으로 착용한 상복)을 입고 있으며, 표피를 덮은 의자에 앉아 화문석(花紋席, 물들인 왕골을 손으로 덧겹쳐가며 엮은 다음 무늬에 따라 잘라낸 꽃돗자리)이 깔린 족좌대에 발을 올려놓고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바닥에는 아무것도 깔려있지 않은데, 이러한 양식은 18세기 초 이후에 보이는 양식이 이어지는 것을 보여준다.

왼쪽 귀가 보이도록 얼굴을 약간 오른쪽으로 향하게 표현한 조선시대 초상화의 전형적 특색인 좌안칠분면(左顔七分面) 형식으로, 쌍학문의 흉배는 구름을 수놓은 것 같이 표현하고자 구름의 윤곽선을 곡선이 아닌 짧은 단선을 세로로 그어 표현하였다.

그림에서 배 부분을 가장 어둡게 처리하여 무릎이 앞으로 튀어나와 있는 느낌을 살렸으며, 의자와 족좌대의 나뭇결까지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96호 윤급 초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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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848호 남구만 초상, 국립중앙박물관



남구만 초상은 네 본이 전해지고 있는데, 네 본 모두 생김새와 양식이 같다. 보물 1484호 남구만 초상 외에 남구만이 영의정 재직 시절에 모사한 영정이 현재 경기도 용인시 파담마을에 있는 사당에 남아있다.


남구만( 南九萬, 1629~1711, 조선시대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운로(雲路), 호는 약천(藥泉) 또는 미재(美齋), 조선 개국공신 재(在)의 후손이며, 할아버지는 식(烒)이고, 아버지는 현령 일성(一星), 어머니는 권박(權瞨)의 딸이다.

송준길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651년(효종 2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56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헤 가주서, 전적, 사서, 문학을 거쳐 이듬해에 정언이 되었다.

1659년 홍문록에 오르고 곧바로 교리에 임명되었다.

1684년에는 우의정, 이듬해 좌의정 1687년 영의정에 올랐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득세하자 강릉에 유배되었으며, 1694년 갑술옥사 때 다시 영의정에 기용되어, 1696년 중추부영사가 되었다.

1701년 희빈 장씨의 처벌에 대해 경형을 주장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퇴관, 경사(經史), 문장을 일삼았다. 문장과 서화에 뛰어났으며, 시조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는 그의 작품 유명하다. 문집에는 '약천집(藥泉集)'이 있다.


보물 1484호 남구만 초상은 관복을 입고 앉아 있는 전신좌성으로, 사모에 서대를 착용하고 쌍학문 흉배를 부착한 현록색 단령을 입고 정면을 향해 앉은 모습을 하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조선시대 공신상의 전형을 보여준다.

사모는 높아지고 폭은 약간 좁아졌으며 18세기 이후에 등장하는 구름과 학이 포함되어 있다.

얼굴 살결은 이전에 비해 붓으로 정교하게 묘사되어 있는 특징을 보이며, 중국초상화의 형식 요소들을 받아들인 것들도 엿볼 수 있는데, 정면관, 표피 깔린 교의 족좌대 위의 팔자형 신발 등이 바로 그것으로 지적된다.

조선후기에 들어서면 이렇게 정면관을 취한 초상화가 나타나는데, 하지만 이러한 경향은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다시 칠, 팔분면으로 제작이 된다.

정면으로 그려진 이 초상화는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하며, 얼굴을 윤관선이 거의 없는 듯이 보여 몰골기법에 가가우며, 얼굴 전체적으로 미묘한 선염을 구사하며 높낮이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표현기법은 그리기 가장 어려운 정면상을 소화할 정도로 초상화 기법이 성숙했음을 보여주는 점이기도 하다.

그림의 크기는 전체 224cm X 107cm, 그림 162.1 X 87.9cm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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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3호 이채 초상(李采 肖像), 국립중앙박물관



작자 미상의 이채 초상에서 이채는 관을 쓰고 심의(深衣)-옛날 학자가 모든 공직을 떠나 있을 때 입었던 옷. 를 입고 정면을 응시하는 모습을 그렸다.

얼굴은 짧고 묘사적인 붓질을 수없이 그려 얼굴의 굴곡과 특징을 잘 표현해냈고, 양쪽 귀는 얼굴색보다 붉은 것이 특징이며, 흰 수염의 묘사도 매우 세세하고 대담하게 표현되어 있다.

이렇듯 안면의 세세한 묘사에 비해 심의에 나타난 주름은 음양을 세세하게 표현하기 보다는 비교적 단순하고 대담한 선을 위주로 처리해 입체적 느낌은 덜하다.

하지만 얼굴의 세세한 표현과 몸체의 단순하고 대담한 표현이 주는 대조를 통해 얼굴모습을 보다 특징적으로 나타내고 있으며, 편안하고 안정감 있는 노인의 품위를 잘 나타내고 있어, 조선시대 초상화의 정수를 보여주는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초상화 상단 양측에는 찬문이 씌어져 있는데, 화면에서 우측 상부에는 이한진(李漢鎭, 1732~1815)이 전서로 쓴 이채의 자제문이 있고, 좌측 하단에는 유한준(兪漢寯, 1760~1834)이 예서로 쓴 찬문이, 좌측 상부에는 송원(松園)이 정묘년, 순조7년(1807)에 행초로 쓴 원교노인(圓嶠老人)의 찬-그림에서의 원교노인은 서예가 이광사(李匡師, 1705~1777)가 아닌 원교라는 호를 사용하는 다른 사람이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이 씌어져 있다.


초상화 크기: 134.3cm X 77cm(전체), 99.6cm X 58cm(그림)


이채(李采, 1745~1820)는 영조 21년에 태어나 순조 20년까지 활동했던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우봉(牛峯),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1744년(영조 50) 사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그 이듬해에 휘령전 참봉에 제수되었다. 차츰 사헌부, 호조, 형조의 벼슬을 거쳐 돈녕부주부를 지냈으며, 음죽현감이 되었을 때 무고로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며 가업을 계승하는데 전념했다.

그러다 1790년(정조 14)에 다시 벼슬길에 올라 홍릉령, 지례현감, 선산부사, 상주, 충주, 황주 목사, 익위사의 위수, 사어 등의 관직을 거쳐 호조참판, 한성좌우윤 및 동지중추부사를 지내게 된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화천집' 16권 8책이 전한다.


화천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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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39호, 송시열초상/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39호, 송시열초상/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39호 '송시열초상'은 전체 188cmX79cm(그림 89.7cmX67.6cm)의 크기로 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 1607~1689, 선조 40∼숙종 15)을 그린 초상화 중에서도 뛰어난 수작으로 손꼽히는 초상화다.

평상복 차림에 복건을 쓴 이 작품은 주름과 수염에 보이는 섬세한 얼굴 표현을 비롯한 사실적인 묘사가 특징이다.

몸 부분의 다소 과장돼 보이는 채구와 윤곽을 그린 견고한 필선, 그리고 음영을 표현하지 않은 직선 위주의 간명한 옷 주름은 조선 중기 학문과 사상을 휘어잡았던 걸출한 정치가의 이미지를 아주 잘 전달하고 있다.

얼굴과 복식에서 음영 처리가 나타나지 않는 점 등은 17세기 초상화의 특징을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림의 윗부분에는 1778년에 정조가 지은 찬시가 예서로 씌어 있고, 오른쪽에는 송시열이 45세 때 지은 글이 해서체로 씌어 있다.

이 작품은 정조의 어제로 미루어 보아 18세기 후반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지만, 17세기 초상화의 특징이 남아 있어 정조 연간에 원본에 충실하게 옮겨 그렸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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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88호 심득경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8호 심득경 초상/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88호 심득경(沈得經, 1673~1710) 초상은 젊은 나이에 요절한 심득경을 애도하여 윤두서(尹斗緖, 1668년∼1715)가 그린 작품이다.

심득경과 윤두서는 절친한 친구이자 친인척관계로 심득경의 어머니가 너무도 유명한 고산 윤선도의 딸이며, 윤선도는 윤두서의 증조부가 된다.

이런 심득경이 38세라는 젊은 나이에 죽자 윤두서는 이를 슬퍼하며 생전의 모습을 생각하며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해 석달만에 그림을 완성하는데,

완성된 초상을 심득경의 집에 보내 벽에 걸었더니 마치 죽은 사람이 되살아 온 것 처럼 모두가 놀라서 울었다고 전해진다.

<<남태응의 '청죽화사(聽竹畵史'>>


그만큼 묘사와 표현이 살아 생전의 실물과 매우 닮아 있기 때문이다.

심득경 초상은 조선시대 전통적인 초상화 양식을 따랐지만 기존의 초상화와는 달리 필치가 부드럽고 담채가 은은하여 문인화가의 솜씨다운 면모가 두드러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림에 쓰인 찬문((贊文)에서도 이 초상이 심득경의 실제 모습뿐만 아니라 인품까지도 아주 잘 나타내고 있다고 감탄하고 있는데,

찬문 중에 심득경의 친구 서예가 이서(李敍 1662~?)가 지은 글을 보면,

'눈이 맑고 귀가 단정하며 입술이 붉고 이빨이 촘촘하다.'

'물에 비친 달은 그의 마음이요, 얼음 같은 옥은 그의 덕이다'

'잘 묻고 힘껏 실천했으며 깨달은 것은 확고했다'

라는 글을 통해 심득경의 실제 모습과 한결같은 그의 품성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그림 크기 160.3cmX77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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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110호,익재 이제현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국보110호,익재 이제현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국보110호,익재 이제현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국보110호,익재 이제현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국보110호,익재 이제현 초상화/국립중앙박물관]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고려 후기의 문신이며 유학자로 본관은 경주 이며, 호는 익재(益齋)·역옹(櫟翁) 이다.

충렬왕 13년에 태어나 공민왕 16년까지 활동한 인물로써, 당시 고려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학자이며, 고려 최고의 관직인 문하시중의 자리까지 올랐다.

   

국보 110호 이제현 초상화는 고려 충선왕(忠宣王, 1275~1325)과 함께 중국을 유람하던 시기 1319년에 충선왕이 진감여(陳鑑如)라고 하는 원나라 화가를 시켜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후 귀국을 하면서 이 그림은 가져오지 못했다가 21년 후에 우연히 그림을 다시 보게 되자 그 감회를 시로 읊었다.



我昔留形影

옛날에 남겨둔 나의 초상은


流靑靑兩鬢春

양쪽 귀밑머리 푸르렀다오.


傳幾歲月

얼마나 많은 세월 흘러갔던가


邂逅尙精神

우연히 또 만나니 정신이 새로워라.


此物非他物

    이 물건 다른 물건 아니라


前身定後身

전신이 곧바로 후신이라네.


兒孫渾不識

아희들은 도무지 알아보지 못하고


相問是何人

이게 누구냐 자꾸 물어보누나.

 


그림에는 이 시와 함께 그림에 대한 원나라 문장가 탕병룡의 찬과 함께 쓰여 있다.


초상은 왼편을 향하고 있는데, 상의 왼쪽에는 주역(周易)과 고대 청동기가 놓여져 있는 칠기로 된 탁자가 있다. 얼굴은 전체적으로 분홍빛의 홍조를 띠고 있으며, 별다른 음영의 표현은 없다. 심의는 흰색 옷에 옷깃과 소매 끝 밑단 등의 푸른색의 선으로 둘러져 있으며, 옷의 모양새가 전체적으로 풍성하고 둥글다. 교의는 칠기에 화려하게 조각을 한 후 다시 붉은 색을 칠하여 매우 화려해 보인다.

이제현의 초상화는 비록 원나라 화가가 그린 초상화이지만 현재 전해지는 초상화 중 매우 이른 시기의 초상화라는 의미와 더불어 고려와 원나라의 교류를 통한 문화적 산물로서도 중요성을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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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채용신 작품/국립중앙박물관]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채용신 작품/국립중앙박물관]


[면암 최익현 선생 초상/채용신 작품/국립중앙박물관]



면암 최익현(勉菴, 崔益鉉 1833~1906) 선생의 초상화로 1905년 석지 채용신(石芝, 蔡龍臣 1850~1941)이 그린 작품이며, 보물 1510호이다.

초상화 우측 상단에 씌어있는 '勉菴崔先生 七十四歲像 毛冠本 면암최선생 칠십사세상 모관본, 乙巳孟春上澣 定山郡守時 蔡石芝圖寫 을사맹춘상한 정산군수시 채석지도사' 라는 기록을 통해 1905년에 채용신이 그린 최익현의 74세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초상화에서 최익현은 겨울철에 사냥꾼들이 즐겨 사용하는 가죽 감태를 쓰고 심의를 용한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얼굴은 갈색선을 수없이 그어 요철과 명암을 표현했으며, 얼굴 표정과 주름은 물론 감태 특유의 털 느낌도 세밀하면서 대담하고 입체감 있게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또한 옷 부분은 흰색으로 채색했는데, 옷주름은 선으로 그린 것이 아닌 흰색 채색을 통해 배경색을 그대로 살려 표현한 것이다.


그림 크기

전체 82.2X55.0cm/ 그림 81.5X41.5cm



채용신은 칠곡군순, 정산군수 등을 지내고 종2품관까지 지낸 인물로 조선말기 우국지사나 항일투사의 초상화를 많이 제작했으며, 고종의 어진과 고종대한제국동가도(高宗大韓帝國動駕圖) 등을 그렸으며, 운낭자이십칠세상(雲娘子二十七歲像), 황장길부인상(黃長吉夫人像) 등의 여인상도 그렸다.

그의 화법의 특징은 극세필을 사용해 얼굴의 육리문 묘사에 주력하고, 서양의 데생작업과 유사한 많은 필선을 사용해 요철, 원근, 명암 등을 표현한 점 등이 특징으로 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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