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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45호 '청동 귀면 화로'/국립중앙박물관]



국보 145호 '청동 귀면 화로'는 높이 13cm, 입지름 14.5cm 크기의 고려시대 작품이다.

화로 전체의 형태와 몸체에 새겨진 문양, 고리의 부착 위치 및 방법, 몸체 내부의 처리 형식, 짐승발 모양의 다리에 새겨진 귀면의 기법 등은 모두 다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정도로 독특한 양식을 하고 있다.

몸체는 솥 모양이며, 구연부는 3개의 산이 솟아 있는 듯한 형태를 하고 있고, 양쪽 측면에는 손잡이가 달려있었을 것으로 보이는 고리가 남아있다.

화로의 정면에는 투각(조각 기법의 하나로, 재료의 면을 도려내 도안을 나타내는 기법)으로 귀면 장식을 표현했고, 다른 두 면에는 선각(선을 따라 문양을 나타내는 조각 기법)된 귀면 장식이 되어있는데, 정면의 투각된 귀면 장식의 입은 화로에 통풍 역할을 하는 기능을 한다.

화로의 발은 총 3개로 괴수의 얼굴이 장식된 짐승 발 형태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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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안압지에서 출토된 도깨비 문양의 '귀면기와', 치우천왕의 형상을 묘사한 유물이라고 한다.]


치우( 蚩尤) 천왕(天王)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慈烏支) 환웅을 일컫는 말이며, 황제헌원(黃帝軒轅,BC 2692~2592년경)은 삼황오제 중 한 사람이다. 특히 중국에서는 자신들의 뿌리와 관련하여 삼황 중에서도 황제헌원에 가장 큰 비중을 두고 있어서 중국 정사의 첫번째 책인 '사기'에서도 첫머리를 황제헌원으로 부터 시작하고 있으며, 그 후의 제옹들도 대부분 그 뿌리를 황제헌원과 연결시키고 있을 정도이다. 이러한 황제헌원에 대해 '태백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소전(少典)의 다른 지파를 공손(公孫)이라 하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해 헌구(軒丘)로 유배시켰다.  헌원(軒轅)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사기'에서도 이와 유사한 기록이 나온다.


'황제(黃帝)는 소전(少典)의 자손이고 성은 공손(公孫)이며, 이름은 헌원(軒轅)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소전은 배달국에서 갈라져나간 사람으로서, 바로 염제신농의 아버지이다. 그러한 소전에서 다시 갈라져나간 후손 중의 한 사람이 공손이며, 그 공손씨의 후손이 바로 황제헌원이라는 내용이다. 이러한 황제헌원과 배달국의 14대 환웅인 치우천왕 사이에 수차에 걸친 전쟁이 있었던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사기'를 비롯한 중국의 문에는 황제헌원이 치우를 죽이고 전쟁에서 승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헌원에 앞서 치우 천왕에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먼저 '삼성기' 상편의 기록을 보자.

 

 '신시 말기에 치우 천와이 청구를 개척하여 넓혔다.'

 

 또 '삼성기' 하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몇 대를 지나 자오지(慈烏支) 환웅에 이르렀다. 신과 같이 용맹이 뛰어났으니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 능히 큰 안개를 일으키며 세상을 다스렸다. 광석을 캐고 철을 주조하여 병기를 만드니 천하가 크게 놀라 두려워하였다. 세상에서는 치우 천왕이라 불렀으니, 치우란 세속의 말로 우뢰와 비를 크게 만들어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이다.'

 14대 치우천왕은 철을 캐내어 처음으로 갑옷과 여러 가지 무기를 만들었으며, 투구와 갑옷을 처음 본 중국인들은 두려워하며 '머리는 구리로 되었으며 이마는 쇠로 되었다.'하여 여러 문헌에서 '동두철액(銅頭鐵額)'을 한 무시무시한 괴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쇠를 캐내어 강력한 병장기를 만든 것이 배달국에서 비롯되었음은 쇠 철(鐵)자의 옛글자를 보아도 알 수 있다. '鐵'의 원래 글자는 '금(金)'과 동이족을 일컷는 '이(夷)'자를 합해서 만들 글자로 처음 쇠를 다룬 것이 동이족임을 나태내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정황이 이러한데도 중국의 여러 문헌에서 치우와의 전쟁에서 헌원이 승리한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은 한마디로 어불성설이며, 고의적인 왜곡이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주장의 진원지 격인 '사기'를 조금만 자세히 들여다 보아도 당시 치우의 군대에게 쫓겨다니던 헌원의 형편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리를 이끌고 이리저리 옮겨다니면서 일정한 거처가 없었으며, 늘 병사로 하여금 병영을 호위하게 하였다'

 

 여러 차례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한 헌원이 일정한 거처 없이 떠돌아 다녔으며, 또 언제 추격해 올지 모르는 치우의 군사들 때문에 막사 밖에는 늘 보초를 세워 두어야만 안심할 수 있었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대목이다. 그 후로 천왕은 중원대륙에서 '전쟁의 신'으로 받들어질 만큼 사후에가지 그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치우와 헌원의 싸움도 결국 같은 동이족 간의 전쟁이었다.

[이일봉, 실증한단고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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