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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디오 음악의 뿌리를 찾고자 페루 사람들이 시쿠와 케나를 들고 나온 것처럼 같은 시기 인디오 음악에 대한 뿌리를 차고자한 일련의 운동이 일어났는데, 바로 누에바 칸시온(Nueva Cancion), 새로운 노래라는 뜻을 가진 남미의 노래운동이었다. 1970~1980년대를 풍미했던 한국의 노래운동과 같이 새로운 노래, 민중의 노래를 찾아나선다는 의미 외에도 정처적 성향이 강했던 누에바 칸시온은 1960년대 아르헨티나와 칠레의 두 선구자로부터 비롯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아타후알파 유판키(Atahualpa Yupanqui, 1908~1992)와 칠레의 비올레타 파라(Vioneta Parrs, 1917~1977)가 바로 그 주인공들이다. 아타후알파 유판키는 곳곳에서 민요를 수집하면서 <인디오의 길(Caminito del Idio, 1926) 등 인디오를 대벼하는 노래를 부르다가 강제로 망명길에 올랐고, 비올레타 파라는 케나, 차랑고 등을 반주로 하여 노래를 부르곤 했다. 비올레타 파라의 노래 <삶에 감사(Gracias a la Vida, 1966)>는 미국의 조안 바에즈와,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누에바 칸치온의 기수, 메르세데스 소사(Mercedes Sosa, 1935~)가 부르기도 했다. 누에바 칸치온은 인디오의 노래를 재평가하고 가난한 이와 소외된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성명을 내고 아르헨티나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는 점점 라틴 아네라카의 깨어 있는 양심을 대변해가기 시작했다.


페루 지도/ⓒ구글맵



1960~1970년대는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격변기였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혼란, 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등이 라틴 아메라카를 거센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페루, 볼리비아, 콜럼비아 등지에서도 게릴라 활동과 함께 불안정한 정치상황이 계속되었다. 특히 칠레는 1970년 사회당의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선거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는데, 아옌데 지지자 중에는 누에바 칸치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빅토르 하라(Victor Jara, 1932~1973)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1960년대부터 사회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노래를 만들어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던 빅터 하라는 기타를 도구삼아 사회운동을 벌였던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러나 가사를 모르고 듣는다면 그의 노래가 사회운동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소박하면서도 빛이 나는 노래들로 가득하다. 라틴 아메리카를 넘어 전 세계의 음악인들이 그의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은 그런 노래의 매력 때문이기도 하지만, 41세의 젊은 나이에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빅토르 하라의 생애가 깊은 여운을 남겼기 때문이기도 하다. 아옌데 정부가 들어선 지 불과 3년 만에 칠레에서는 미국의 지지하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났고, 빅토르 하라는 아옌데정부를 지지하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심한 고문 끝에 죽음을 당했다. 그는 자신이 노래로 표현한 그대로 생을 살았던 진정한 음유시인이자 혁명가였다.




내가 노래를 하는 것은 단순히 노래하는 것이 좋아서도,

내 목소리를 뽐내기 위해서도 아니오,

내 정직한 기타가 하는 말을 대신 하기 위함이라네.

내 기타의 마음은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기 때문이오. 

 내 기타는 비둘기와 같이 날아간다네, 

 끝없이, 마치 성수(聖水)가 뿌려지는 것처럼 

 용감한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축복하면서, 

 그렇게 내 노래는 할 일을 찾았다네. 

 비올레타 파라도 그렇게 말하곤 했다네. 

 -빅토르 하라<마니페스토(manifesto, 1973)>



[함께보기: 칠레 음유시인 빅토르 하라(Victor jara), 마니페스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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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하라(Victor Lidio Jara Martinez,1932~1973,칠레)


빅토르 하라는 1932년 9월 23일 칠레 산티아고 변두리 마을 로꾸엔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적 어머니를 통해 칠레 민요를 익혔던 빅토르 하라는 성장하면서 연극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연극학교에 입학을 한다.

그러다 칠레 전통민요를 조사, 채집하는 활동을 하면서 점차 민족음악에 대한 자긍심을 키워나가게 되는데, 칠레 민요운동의 선구자인 비올레따 빠라를 만나게 되면서 '꾼꾸멘'이라는 민요그룹의 일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그런 음악적 활동을 하면서 그는

당시 중남미의 문화운동이자 혁명운동 '누에바 깐시온(Nueva Cancion, 새로운 노래)'에 동참함으로써 본격적인 사회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1960~1970년대는 라틴 아메리카의 정치적 격변기였다. 사회적 불평등과 정치적 혼란, 미 제국주의에 대한 저항 등이 라틴 아메리카를 거센 혁명의 소용돌이로 몰고 갔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페루, 볼리비아, 콜럽비아 등에서도 게릴라 활동과 함께 불안정한 정치상황이 계속되었다.

특히 칠레는 1970년 사회다으이 살바도르 아옌데(Salvador Allende)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선거에 의해 세워진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가 되었는데, 아옌데 지지자 중에는 누에바 칸치온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빅토르 하라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미 1960년대부터 사회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노래를 만들어 블랙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고 있었던 빅토르 하라는 기타를 도구삼아 사회운동을 벌였던 싱어송라이터였다.

그러나 가사를 모르고 듣는다면 그의 노래가 사회운동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할 정도로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고 소박한 음악을 만들어냈다.

비극적인 것은 아옌데 정부가 들어선 지 불과 3년 만인 41세의 나이에 칠레에서는 미국의 지지하에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게 되고, 빅터 하라는 아옌데 정부를 지지하던 다른 동료들과 함께 체포되어 심한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한다.



내가 노래를 하는 것은 단순히 노래하는 것이 좋아서도,

내 목소리를 뽐내기 위해서도 아니오,

내 정직한 기타가 하는 말을 대신 하기 위함이라네.

내 기타의 마음은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이기 때문이오.

내 기타는 비둘기와 같이 날아간다네,

끝없이, 마치 성수(聖水)가 뿌려지는 것처럼

용감한 이들과 죽어가는 이들을 축복하면서,

그렇게 내 노래는 할 일을 찾았다네.

비올레타 파라도 그렇게 말하곤 했다네.

-빅토르 하라<마니페스토(manifesto,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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