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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경천묘 신라 제56대 경순왕 어진/ⓒ한민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고랑포리 소재 신라 제56대 경순왕릉/ⓒ한민족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김부는 경순왕의 성과 이름이다. 본문에서 경순왕이라고 해야 하지만 시호를 쓰지 않았다. '왕력' 편에는 경순왕이라고 되어 있다. 내용은 '삼국사기'와 비슷하다.

 

제56대 김부대왕(金傅大王, 경순왕敬順王, 재위 927~935, 신라의 마지막 왕이다.)은 시호가 경순(敬順)이다.

 

천성(天成, 후당後唐 명종明宗 이사원李嗣源의 연호로 926년에서 930년까지 사용했다.) 2년 정해년(927년) 9월, 백제의 견훤(甄萱)이 신라를 침범하여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북 영천)에 도착했다. 경애왕은 고려 태조(왕건王建)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태조는 장수에게 명령하여 날랜 병사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했는데, 구원병이 이르기도 전인 11월 겨울에 견훤이 서울(지금의 경주다.)로 엄습해 왔다. 왕은 비빈 및 종척(宗戚, 왕의 종친과 외척을 이르던 말로, 높은 벼슬 자리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과 포석정에서 연회를 즐기느라 적병이 오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모든 일이 순식간에 벌어져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왕과 비는 달아나 후궁(後宮)으로 들어가고, 종척과 공경대부와 사녀(士女)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다가 적에게 사로잡혔다. 사람들은 귀천을 막론하고 견훤에게 모두 엎드려 노비로 삼아 줄 것을 애원했다.

 

견훤은 군사를 풀어 조정과 민간의 재물을 노략질하고, 왕궁으로 들어가 거처하면서 주위 사람들에게 왕을 찾게 했다. 왕과 왕비 및 빈첩 여러 명이 후궁에 숨어 있다가 붙잡혀 군중(軍中)으로 끌려나왔다. 견훤은 왕에게는 자진하도록 핍박하고 왕비를 욕보였으며 부하들을 풀어 빈첩들을 겁탈하게 했다. 그리고 왕의 족제(族弟, 성과 본이 같은 사람들 중 유복친-상복을 입을 수 있는 가까운 친척-안에 들지 않는 같은 항렬의 아우뻘 남자)인 부(傅)를 왕으로 세웠으니, 왕은 견훤에 의해 즉위하게 된 것이다. 왕은 전왕의 시신을 서당(西堂)에 안치하고 신하들과 통곡했다. 태조는 사신을 보내 조상했다.

 

이듬해 무자년(928년) 봄 3월에 태조가 50여 기병을 거느리고 서울 근교에 도착했다. 왕은 백관과 함께 교외에서 태조를 영접하여 궁궐로 들어가 서로 마주하면서 마음과 예의를 다했다. 임해전(臨海殿, 월지-안압지- 서쪽에 있던 전각)에서 연회를 열었는데 술이 거나해지자 왕이 말했다.

 

"과인이 부덕하여 환란을 불러들이고 견훤이 불의를 자행하여 국가를 잃게 되었으니, 얼마나 원통한 일입니까?"

 

그러고 눈물을 흘리자 주위 사람들이 모두 목메어 울었으며, 태조 역시 눈물을 흘렸다.

 

태조는 수십 일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부하 군사들이 정숙하여 추호도 법을 범한 일이 없었다. 도성 사람과 사녀들이 서로 축하하면서 말했다.

 

"지난번 견훤이 왔을 때는 이리와 호랑이를 만난 것 같더니, 지금 왕공이 온 것은 부모를 만난 것 같다."

 

8월에 태조가 사신을 보내 왕에게 비단 저고리와 말안장을 선물하고, 여러 신하와 장사(將士)들에게도 차등을 두어 내려주었다.

 

청태(淸泰, 후당 폐제廢帝 이종가李從珂의 연호로 청태 2년 태조 18년에 해당한다.) 2년 을미년(935년) 10월에 사방의 국토가 전부 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고, 국력이 쇠약하고 형세가 고립되어 스스로 버틸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왕은 신하들과 고려 태조에게 항복할 것을 의논했다. 신하들의 가부(可否)가 분분해지자 태자가 말했다.

 

"나라의 존망(存亡)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는 것입니다. 마땅히 충신과 의사(義士)와 함께 민심을 수습하여 힘써 본 뒤에 할 수 없으면 그만두어야지, 어찌 천 년의 사직을 경솔히 남에게 넘길 수 있겠습니까?"

 

왕이 말했다.

 

"고립되고 위태롭기가 이와 같아 이미 보전할 수 없는 형세다. 이미 강성해질 수도 없고 더 약해질 수도 없는데, 나로서는 차마 무고한 백성들에게 더 이상 도탄의 괴로움을 맛보게 할 수 없다."

 

그래서 시랑(侍郞, 신라시대 관직으로 집사부(執事部)·병부(兵部)·창부(倉部)의 차관직이다.) 김봉휴(金封休) 편에 편지를 보내어 태조에게 항복을 요청했다. 태자는 울면서 왕을 하직하고 곧장 개골산(皆骨山, 금강산을 말한다.)으로 들어가 삼베옷을 입고 풀뿌리를 캐어 먹으며 일생을 마쳤다. 막내아들은 머리를 깎고 화엄종(華嚴宗, '화엄경'을 받드는 불교 종파로서 두순杜順, 지엄智儼, 법장法藏의 순서로 계승되었다.)에 귀속해 승려가 되었는데, 이름을 범공(梵空)이라고 했다. 범공은 후에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고도 한다.

 

태조는 편지를 받아 보고 태상(太相) 왕철(王鐵)을 보내 맞이했다. 왕은 백관을 거느리고 우리 태조에게 귀순했는데, 아름다운 수레와 훌륭한 말이 30여 리를 연달아 뻗쳐 도로의 길목이 막히고 구경꾼들로 담을 이루었다. 태조는 교외로 나가 그를 맞아 위로하고 궁궐 동쪽의 한 구역(지금(고려)의 정승원政丞院이다.)을 내리고, 맏딸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주었다. 경순왕은 자기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에 살게 되었기 때문에, 어미와 떨어져 사는 난새에 비유하여 낙랑공주의 호칭을 신란공주(神鸞公主)로 고쳤다. 시호는 효목(孝穆)이다. 김부를 정승(政丞)에 봉하니 지위는 태자 위에 있었으며, 녹봉 1,000석을 주고 시종과 관원과 장수들도 모두 임용했다. 그리고 신라를 고쳐 경주(慶州)라 하고 공의 식읍(食邑, 국가에 공을 세운 사람에게 조세 수입을 독점하도록 한 고을이다.)으로 삼았다.

 

처음에 왕이 국토를 바치고 와서 항복하자 태조는 매우 기뻐하여 후한 예로 대접하고 산신을 보내 말했다.

 

"이제 왕이 나라를 과인에게 주셨으니 그것은 큰 것을 주신 것입니다. 바라건대 종실과 결혼하여 영원히 장인과 사위 같은 좋은 관계를 맺고자 합니다."

 

왕이 대답했다.

 

"나의 백부 억렴(億廉, 왕의 아버지인 각간 효종은 추봉된 신흥대왕新興大王의 아우다.)에게 딸이 있는데 덕과 용모가 모두 아름다우니 이 사람이 아니면 내정(內政)을 다스릴 수 없을 것입니다."

 

태조는 억렴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이 여인이 신성왕후(神成王后) 김씨다. 우리 왕조 등사랑(登仕郞) 김관의(金寬毅)가 엮은 <왕대종록王代宗錄>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성왕후 이씨의 본은 경주다. 대위(大尉) 이정언(李正言)이 협주(俠州 지금의 경남 합천이다.)의 군수로 있을 때 태조가 이 주에 행차했다가 비로 맞아들였기 때문에 이곳을 협주군(俠州郡)이라고도 한다. 원당(願堂)은 현화사(玄化寺)며, 3월 25일을 기일忌日로 하여 정릉(貞陵)에 장사 지냈는데,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바로 안종(安宗 태조의 여덟째 아들인 욱郁으로 그의 아들이 고려 제 8대 왕인 현종이다.)이다." 이 밖에 25명의 비와 주(主) 가운데 김씨의 일을 기록하지 않았으니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러나 사신(史臣)의 논의 역시 안종을 신라의 외손이라 했으니, 사전(史傳)이 옳다고 해야 할 것이다.

 

태조의 손자 경종(景宗) 주(伷)는 정승공의 딸을 왕비로 맞이했으니, 바로 헌승왕후(憲承王后)다. 이리하여 정승을 봉하여 상보(尙父, 아보亞父와 같은 말로 아버지에 버금간다는 의미다.)로 삼았는데, 태평흥국(太平興國, 북송 태종太宗 조경趙炅의 연호로 976년에서 984년까지 사용했다.) 3년 무인년(978년)에 죽으니, 시호를 경순(敬順)이라 했다. 상보를 책봉하는 고문(誥文)에 이렇게 말했다.

 

"칙(勅)하노니, 희씨(姬氏)의 주(周)나라가 나라를 세운 처음에는 먼저 여망(呂望, 주나라의 어진 신하 강태공姜泰公으로 무왕이 상보로 정한 인물이다.)을 봉했고, 유씨(柳氏)의 한(漢)나라가 시작될 때는 먼저 소하(蕭何, 한나라 고조를 도와 승상이 되었던 공신으로 한신을 고조에게 추천한 일화가 유명하다.)를 책봉했다. 이로부터 천하가 크게 평정되고 기업(基業)이 널리 열렸다. 용도(龍圖, 용마龍馬가 가지고 나온 그림으로, 제왕 출현을 알리는 부서符瑞다.)는 30대를 세웠으며 인지(麟趾, 본래 '시경-주남'의 편명으로 한나라 왕실의 국운이 계승됨을 말한다.)는 400년을 이었으니 해와 달이 아주 밝고 천지가 평안했다. 비록 무위(無爲, 노자는 '무위이치無爲而治'라고 말하며 덕으로써 나라를 다스려야지 작위나 형벌 등으로 백성들을 다스려서는 안 된다고 했다.)의 군주로부터 시작되었으나 보좌하는 신하로 말미암아 대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관광순화위국공신 상주국 낙랑왕 정승 식읍 8,000천 호(觀光順化衛國功臣 上柱國 樂浪王 政丞 食邑 八千戶) 김부는 대대로 계림에 살고 관직은 왕의 작위를 나누어 받았다. 그 영특한 기상은 하늘에 닿고 문장의 재능은 땅을 흔들 만하다. 풍요로움은 춘추에 있고 귀함은 봉토에 누렸으며, 가슴속에는 육도(六韜)와 삼략(三略, 병서兵書 '육도'는 강태공이 지었고 '삼략'은 황석공黃石公이 지었다고 한다.)이 들어 있고 칠종오신(七從五申, 칠종은 제갈량이 남만의 맹획을 일곱 번 잡아 일곱 번 놓아주었다는 고사로 전략의 탁월함을 비유한 것이다. 오신은 삼령오신三令五申의 준말로 군령이 엄한 것을 말한다.)을 손바닥에서 움직였다.

 

우리 태조가 처음으로 우호를 맺어 일찍부터 그 풍도를 알아 때를 가려 부마의 혼인을 맺어 안으로 큰 절의에 순응했다. 국가가 통일되고 군신이 완연히 삼한으로 합쳤으니, 아름다운 이름은 널리 퍼지고 아름다운 법은 빛나고 높았다. 상보(尙父) 도성령(都省令)의 칭호를 더하고,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의 칭호를 주니, 훈봉(勳封)은 과거와 같고 식읍은 이전의 것과 합쳐 모두 1만 호다. 유사는 날을 택하여 예를 갖추어 책명하고 맡은 사람은 시행하라. 개보(開寶, 북송 태조 조광윤趙匡胤의 연호로 968년에서 976년까지 사용했다.) 8년(975년) 10월 어느 날."

 

"대광내의령(大匡內議令, 내의성內議省의 최고직으로 조선의 영의정에 해당한다.)겸 총한림(摠翰林) 신(臣) 핵선(翮宣)은 위와 같이 칙명을 받들어 직첩(職牒)이 도착하는 대로 받들어 시행하라. 개보 8년 10월 어느 날."

 

"시중(侍中, 문하성門下省의 최고직이다.) 서명(署名), 내봉령(內奉令, 내봉성의 최고직이다.) 서명, 군부령(軍部令) 서명, 군부령 무서(無署, 서명이 없다는 뜻), 병부령 서명, 광평시랑(廣評侍郞) 서명, 광평시랑 무서, 내봉시랑(內奉侍郞) 무서, 내봉시랑서명, 군부경(軍部卿) 서명, 병부경(兵部卿) 무서, 병무경 서명, 추충신의숭덕수절공신 상보도성령 상주국 낙랑도왕(推忠愼義崇德守節功臣 尙父都省令 上柱國 樂浪都王)식읍 1만 호 김부에게 고하노니 위와 같이 칙서를 받들고 부(符)가 이르거든 받들어 시행하라.

주사(主事) 무명(無名, 이름이 없다는 뜻), 낭중(郎中) 무명, 서령사(書令史) 무명, 공목(孔目, 회계와 공문서를 맡은 아전으로 '서령사'도 마찬가지다.) 무명, 개보 8년 10월 어느 날 내림."

 

사론(史論)에는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박씨(朴氏)와 석씨(昔씨)는 모두 알에서 태어났고, 김씨는 금궤에 담겨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고 혹은 금수레를 타고 내려왔다고 하니, 이는 더욱 믿을 수 없는 괴이한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서로 전하여 실제로 있었던 일로 여기고 있다 다만 그 처음에는 위에 있는 자가 자신을 위해서는 검소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는 관대했으며, 관직의 설치는 간략했고, 일을 간단하게 시행했으며, 지성으로 중국을 섬겨 배를 타고 조공하는 사신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항상 자제들을 보내 중국 조정(宋)에 숙위(宿衛, 황제를 숙위하는 직무를 말한다.)하게 하고, 공부하게 했다. 성현의 풍토를 이어받고 거친 풍속을 고침으로써 예의의 나라가 되게 했다. 또 당나라 군사의 위엄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여 영토를 취해 군현으로 삼았으니 진실로 그 시절에는 성대했다. 그러나 불법을 숭상하면서도 그 폐단을 알지 못했고, 심지어는 여염 마을에까지 탑과 절을 즐비하게 세우고, 백성들은 달아나 승려가 되어 군사나 농민이 점점 줄어들고 나날이 쇠미해졌으니, 어찌 나라가 어지럽지 않겠으며 또 망하지 않겠는가?

 

이러할 때, 경애왕은 더욱 못되고 음탕하여 궁인 및 신하들과 포석정에 놀이를 나가 술자리를 마련하여 연회를 열면서 견훤이 쳐들어온 것을 알지 못했으니, 문밖의 한금호(韓擒虎, 수나라 노주총관盧州摠管으로 날랜 기마 500명을 이끌고 진나라 공격의 선봉에 섰으며 진나라 후주-숙보叔寶와 장려화를 사로잡았다.)와 누각 위의 장려화(張麗華, 진나라 후주의 귀비貴妃로 지혜로워 후주에게 총애를 받았다.)의 일과 차이가 없었다. 경순왕이 태조에게 투항한 것은 어쩔 수 없어서였지만 잘한 일이었다. 그때 만약 힘써 싸워 죽을 각오로 왕사(王師, 고려 태조의 군사를 뜻한다.)에게 대항하다 힘이 미치지 못하고 형세가 곤궁하게 됐다면, 반드시 그 가족은 멸망했을 것이고 무고한 백성에게 해를 끼쳤을 것이다. 그런데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궁궐 창고를 봉쇄하고 군현의 문서를 기록해 귀의했으니, 고려 조정에 공이 있고 백성들에게 덕을 크게 베푼 것이다.

 

옛날 전씨(錢氏, 오월왕 전숙錢叔으로, 자기가 다스리던 13개 주를 송나라에 바쳤다.)가 오월(吳越)을 가지고 송나라로 들어가자 소자첨(蘇子瞻, 자첨은 소식蘇軾의 자字다. 소식은 당송팔대가 중 한 명으로 송대의 정치가이자 대문호다.)이 그를 충신이라고 일컬었는데, 지금 신라 왕의 공덕은 그보다 더욱 크다. 우리 태조는 비빈이 아주 많아 자손도 번창했다. 현종(顯宗)은 신라의 외손자로 보위에 올랐고, 이후로 왕위를 계승한 사람은 모두 그 자손이니 어찌 음덕이 아니겠는가?"

 

신라가 국토를 바치고 멸망한 후에 아간 신회(神會)가 외직(外職)을 그만두고 돌아와 황폐해진 도성을 보고는 서리리(黍離離)의 탄식(주나라 대부가 주나라 왕실의 몰락을 보고 탄식하여 지은 시로 '시경'의 편명이다.)이 있어 노래를 지었지만, 그 노래는 유실되어 알 수 없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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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소재 신라 제42대 흥덕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42대 흥덕대왕(興德大王, 재위 826~836, 41대 헌덕왕 김언승의 동생)은 보력(寶歷, 당唐나라 경종敬宗 이담李湛의 재위기간 825~827년 연호) 2년 병오년(826년)에 즉위했다. 얼마 후 어떤 사람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앵무새(鸚鵡) 한 쌍을 가지고 왔는데, 오래지 않아 암컷이 죽자 외로운 수컷이 구슬프게 울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그 앞에다 거울을 달아 주었다. 앵무새는 거울 속에 비친 모습을 보고는 자기 짝으로 여겨 거울을 쪼았는데, 그것이 자기 모습인 줄 알고는 슬피 울다 죽었다. 왕이 이를 노래로 지었다 하는데 자세하지는 않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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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사실만 기록한 이 조는 <기이> 편 전체에서 특이한 제목이다. 고운기는 그 당시 이상 징후의 상징적 표현으로 보았다.

제 40대 애장왕(哀裝王, 재위 800~809, 39대 소성왕의 맏아들로 이름은 청명淸명, 즉위 후 중희重熙로 개명했다.) 말년인 무자년(808년) 8월 15일에 눈이 내렸다.

 

경북 경주시 동천동 헌덕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 41대 헌덕왕(憲德王, 재위 809~826, 38대 원성왕의 손자로 아버지는 원성왕의 맏아들인 혜충태자惠忠太子 김인겸金仁謙, 어머니는 성목태후聖穆太后 김씨다.) 원화(元和, 당唐나라 헌종憲宗 이순李純의 연호로 806년에서 820년까지 사용했다.) 13년 무술년(818년) 3월 14일에 큰눈이 왔다. 어떤 책에는 병인년으로 되어 있ㅇ으나 잘못된 것이다. 원화는 15년에서 끝나며 병인년이 없다.

 

경북 경주시 서악동 문성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

 

제46대 문성왕(文聖王, 재위 839~857, 45대 신무왕神武王의 장남이며, 어머니는 정종태후定宗太后라고도 불리는 정계부인貞繼夫人이다.) 기미년(839년) 5월 19일에 큰눈이 내리고 8월 1일에 온 세상이 어두컴컴했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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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경주시 배반동 효공왕릉/ⓒ문화컨텐츠닷컴

제52대 효공왕(孝恭王, 재위 897~912, 제49대 헌강왕의 서자며 어머니는 김씨고 이름은 요蟯다.) 대인 광화(光化, 당唐나라 소종昭宗 이엽李曄의 연호로 898년에서 901년까지 사용했다.) 15년 임신년(912년, 실제로는 주온朱溫의 후량後梁 건화乾化 2년이다.)에 봉성사(奉聖寺) 외문(外門) 동서쪽 스물한 칸 사이에 까치가 집을 지었다. 또 신덕왕(神德王) 즉위 4년 을해년(915년, 고본古本에는 천우天祐 12년이라 했는데, 정명貞明 원년으로 해야 한다.)에 영묘사(靈妙寺) 안의 행랑에 까치집이 서른네 개, 까마귀 집이 마흔 개 있었다. 또 3월에는 서리가 두 번 내렸고, 6월에는 참포(斬浦,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참포槧浦라고 했으며, 신라의 4독瀆 중에서 동독東瀆으로 중사中祀의 제전祭典에 속한다.-이병도설)의 물이 바다의 파도와 사흘 동안 다투었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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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54대 경명왕릉/경북 경주시 배동/ⓒ문화컨텐츠닷컴

제54대 경명왕(景明王, 재위 917~924, 신덕왕神德王의 태자며 어머니는 의성왕후義成王后다.)에 사천왕사 벽화 속에 있는 개가 짖어 사흘 동안 경을 읽어 쫓아 버렸는데 반나절이 지나자 또 짖었다.

 

7년 경진년(920년) 2월에는 황룡사의 탑 그림자가 사지(舍知, 신라시대 17관등 중 16번째 등급의 벼슬) 금모(今毛)의 집 뜰에 한 달 동안이나 거꾸로 비쳤고, 또 10월에는 사천왕사에 있는 오방신(五方神, 동서남북 사방과 중앙을 수호하는 신이다.)의 활줄이 모두 끊어지고 벽화 속에 있는 개가 뛰쳐나와 뜰을 달리고는 다시 벽화 속으로 들어갔다.

-삼국유사 권 제2 기이(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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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35대 경덕왕릉/ⓒ문화컨텐츠닷컴

[당나라에서] <덕경德經, 도가의 창시자 노자老子의 '도덕경道德經'을 말하며 모두 5,000자로 이루어져 있다.> 등을 보내오자 대왕은 예를 갖추어 받았다('삼국사기 신라본기 효성왕 2년' 조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어 경덕왕 대의 일이 아니라고도 하나, 리상호는 경덕왕 대의 일이 맞다고 했다.).

왕이 나라를 다스린 지 24년이 되던 해에 오악삼산(五岳三山, 오악은 동악 토함산, 서악 계룡산, 북악 태백산, 중악 팔공산이며, 삼산은 경주 남산, 영천 금강산, 청도 부산이다. 윤영옥 교수는 오악이 통일신라의 상징적 존재이자 전제왕권의 상징이라고 했다.)의 신들이 때때로 나타나 궁전 뜰에서 대왕을 모셨다.

3월3일 왕은 귀정문(歸正門) 누각 위에 올라가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길거리에서 대덕(大德, 중에게 부여하는 직위 명칭인데 덕망이나 풍모가 높은 중을 일컫는다.) 한 명을 데려올 수 있겠는가?"

이때 마침 위엄과 풍모가 깨끗한 고승이 배회하며 가고 있었다.

신하들이 그를 데리고 와 뵙게 하니 왕이 말했다.

"내가 말한 위엄과 풍모가 있는 승려가 아니다."

그리고 돌려보냈다.

다시 한 승려가 가사를 걸치고 앵통(櫻筒, 중이 물건을 넣어 등에 짊어지고 다니는 통)을 지고(삼태기를 메고 있었다고 한 곳도 있다.) 남쪽에서 오고 있었다. 왕은 기뻐하며 그를 보고 누각 위로 맞아들였다. 통 안을 살펴보니 다구(茶具, 차를 다려 마시기 위한 도구)가 가득 들어 있었다. 왕이 말했다.

"그대는 누구인가?"

승려가 아뢰었다.

"소승은 충담(忠談)이라 합니다."

"어디서 오는 길인가?"

승려가 아뢰었다.

"소승은 매년 중삼일(重三日, 세시풍속에 액을 막는 제의祭儀가 있는 날로 3월3일이다.), 중구일(重九日, 중양일重陽日 이라고도 하며 액을 막는 제의가 있는 날로 9월9일이다.)에 차를 끓여 남산 삼화령(三花嶺, 경주 남산에 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은데, 이 위에 연꽃 모양의 불상 대좌가 있다고 한다.)의 미륵세존(彌勒世尊, 뒷 세상에 나타날 부처)께 올리는데, 지금도 차를 올리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이 말했다.

"나에게도 차 한 잔 나누어 줄 수 있겠는가?

승려는 이에 차를 끓여 바쳤는데, 찻잔 속에서 향내가 풍겼다. 왕이 말했다.

"짐은 일찍이 대사가 기파랑(耆婆郞)을 찬미한 사뇌가(詞腦歌, 향가를 일컫는 가사의 별칭인데 '기이 제1'에는 사뇌격詞腦格이라고 했다.)의 뜻이 매우 높다고 들었는데 정말 그런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짐을 위해 안민가(安民歌)를 지어 보라."

왕이 말했다.

충담은 곧바로 왕명을 받들어 노래를 지어 바쳤다. 왕이 아름답게 여겨 왕사(王師, 왕의 불교 수행을 돕는 승려)로 봉했으니, 그는 삼가 재배하며 간곡히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안민가(安民歌)는 다음과 같다.

 

君隱父也

군은부야(임금은 아버지요)
臣隱愛賜尸母史也
신은애사시모사야(신하는 사랑을 주는 어머니라)
民焉狂尸恨阿孩古爲賜尸知
민언광시한아해고위사시지(백성을 어리석은 아이로 여기면)
民是愛尸知古如
민시애시지고여(모든 백성들이 사랑을 알리라)
窟理叱大肹生以支所音物生

굴리질대힐생이지소음물생(꾸물거리며 사는 중생)
此肹湌惡支治良羅

차힐식악지치량나(이들을 먹여 다스려라)

此地肹捨遣只於冬是去於丁 爲尸知

차지힐사유지어동시거어정위시지(이 땅을 버리고 어디로 가라고 하면)
國惡支持以支知右如

국악지지이지지고지(이 나라가 보전될 줄 알리라)
後句 君如臣多支民隱如 爲內尸等焉

후구군여신다지민은여위내시등언(아아, 임금답게 신하답게 백성답게 하면)
國惡太平恨音叱如

국악태평한음질여(나라는 태평을 지속하리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 김상억 교수는 '찬讚'이 게송류偈頌類의 '찬'이 아니고 한시의 '송찬頌讚' 류와 맥이 같다고 했다. 양주동 박사는 이 작품의 기상천외한 시법에 감탄하면서 문답체의 구조로 보았다.)는 다음과 같다.

 

咽嗚爾處米
열오이처미(열어젖히자)
露曉邪隱月羅理
로효야은월라리(벗어나는 달이)
白雲音逐干浮去隱安支下
백운음축간부거은안지하(흰구름 좇아 떠간 언저리)
沙是八陵隱汀理也中
사시팔릉은정리야중(백사장 펼친 물가에)
耆郞矣皃史是史藪邪
기랑의모사시사수야(기파랑 모습이 잠겼어라)
逸烏川理叱磧惡希
일오천리질적악희(일오천 자갈벌에서)
郞也持以支如賜烏隱
랑야지이지여사오은(낭의 지니신)
心未際叱肹逐內良齊
심미제질힐축내량제(마음 좇으려 하네)
阿耶栢史叱枝次高支好
아야백사질지차고지호(아! 잣나무 가지 높아) 
雪是毛冬乃乎尸花判也
설시모동내호시화판야(서리 모를 씩씩한 모습이여!)

 

왕은 옥경(玉莖, 남자의 성기)의 길이가 여덟 치나 되었는데, 자식이 없어 왕비('왕력'에는 삼모부인三毛夫人으로 되어 있다.)를 폐하고 사량부인(沙梁夫人)으로 봉했다. 후비 만월부인(滿月夫人)은 시호가 경수태후(景垂太后)이며 각간(角干, 신라 17간등 중 최고 관직) 의충(依忠)의 딸이었다.

 

왕이 하루는 표훈대사(表訓大師)를 불러 명했다.

"내가 복이 없어 후사를 얻지 못했으니 원하건대 대사께서 하느님(上帝)에게 청하여 사내아이를 점지하게 해 주시오."

표훈대사가 하늘로 올라가 천제에게 말하고 돌아와 아뢰었다.

"천제께서는 '딸을 구하는 것은 되지만 사내아이는 마땅치 않다.'라고 하셨습니다."

왕이 말했다.

"딸을 아들로 바꿔 주시오."

표훈대사가 다시 하늘로 올라가 청했다.

천제가 말했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면 나라를 위태롭게 할 것이다."

표훈대사가 하늘에서 내려오려 할 때 천제가 다시 불러 말했다.

"하늘과 인간 사이를 어지럽혀서는 안 되는데 지금 대사는 이웃 마을처럼 오가면서 천기를 누설하고 있으니 지금 이후로는 오는 것을 금하노라."

표훈대사가 와서 천제의 말을 전하니 왕이 말했다.

"나라가 비록 위태롭게 되더라도 아들을 얻어 후사를 삼고 싶소."

달이 차서 왕후가 태자를 낳으니('삼국사기'에는 경덕왕 17년 7월23일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왕은 매우 기뻐했다.

태자가 여덟 살이 되었을 때 왕이 죽고 태자가 즉위했으니, 이 사람이 혜공대왕(惠恭大王, 신라 제36대 왕, 재위 765~780)이다. 왕이 어렸으므로 태후가 섭정에 나섰으나 정사가 다스려지지 않았고(그는 16년 동안 왕위에 있었는데 반란이 다섯 번이나 일어났다.),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도 막지 못했으니, 표훈대사의 말이 사실이었다. 태자는 원래 여자였다가 남자로 태어났기 때문에 돌 때부터 즉위하기까지 항상 부녀자들의 놀이를 일삼고 비단 주머니 차는 것을 좋아하며 도사(道士)들과 희롱했다. 그래서 나라가 크게 어지러워져 결국 선덕왕(宣德王)과 김양상(金良相, 김양상은 선덕와으이 이름이다. 김경신金敬信의 오기라는 설도 일리가 있다.-이가원 설)에게 시해되었다. 표훈대사 이후로 신라에 성인이 태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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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콘텐츠진흥원 제9회 캐릭터 디자인 공모전 장려상 - 경문왕과 복두장이>

 

경문대왕(景文大王, 신라 제48대 왕, 재위 861~875)의 휘는 응렴(膺廉)이고 열여덟 살에 국선(國仙)이 되었다. 약관의 나이가 되자 헌안대왕(憲安大王)은 낭(郎)을 불러 궁중에서 연회를 베풀고 물었다('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헌안왕 4년 9월에 임해전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 응렴은 그때 나이 열다섯이었다. 내용은 이와 비슷하다.).

"낭은 화랑이 되어 사방을 유람했는데 무슨 특별한 것이라도 보았는가?"

낭이 아뢰었다.

"신은 아름다운 행실을 가진 사람 셋을 보았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려주게"

낭이 말했다.

"다른 사람의 윗자리에 있을 만한데도 겸손하게 다른 사람의 아래에 앉아 있는 사람이 그 하나요, 세력 있고 부유한데도 의복이 검소한 사람이 그 둘이요, 본래 귀한 세력이 있는데도 위세를 펼치지 않는 사람이 그 셋입니다."

왕은 이 말을 듣고 그가 어진 것을 알고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짐에게는 두 딸이 있는데 그대에게 시집 보내 시중을 들게(원문의 '건즐巾櫛'은 수건과 빗이란 뜻으로, 여기서는 다른 사람 밑에서 시중을 든다는 의미다.) 하고자 한다."

낭은 자리를 피해 절하고 머리를 조아린 후 물러났다. 그리고 이 사실을 부모에게 말하니 부모가 놀라고 기뻐하며 자제들을 모아 의논했다.

"왕의 맏공주는 외모가 아주 보잘것없지만, 둘째는 매우 아름다우니 그녀에게 장가를 드는 것이 좋겠다."

낭이 무리 중에 우두머리인 범교사(範敎師, '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에 의하면 헌안왕 4년에 흥륜사의 승려에게 물었다는 말이 있다.)란 자가 이 말을 듣고는 집으로 찾아와 낭에게 물었다.

"대왕께서 공주를 공에게 시집 보낸다는 것이 사실이오?"

낭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가 물었다.

"그럼 둘 중에서 누구를 선택하겠소?"

낭이 말했다.

"부모님께서는 나에게 동생을 선택하라고 명하셨소."

범교사가 말했다.

"낭이 만약 동생을 선택한다면 나는 반드시 낭의 눈 앞에서 죽을 것이오. 하지만 맏공주에게 장가를 든다면 반드시 세 가지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니 잘 살펴 결정하시오."

얼마 후 왕이 날을 잡고 사람을 보내 낭에게 말했다.

"두 딸 가운데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는 오직 공의 뜻에 따르겠다."

심부를 갔던 사람이 돌아와 낭의 뜻을 아뢰었다."

"맏공주를 받들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석 달이 지나자 왕이 병이 위독해져 여러 신하들을 불러 말했다.

"짐에게는 아들이 없으니 죽은 뒤의 일은 맏딸의 남편인 응렴이 이어받도록 하라."

이튿날 왕이 죽자 낭은 유조를 받들어 즉위했다. 그러자 범교사가 왕에게 와서 아뢰었다.

"제가 아뢴 세 가지 좋은 일이 이제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맏공주를 선택하였기 때문에 지금 왕위에 오르신 것이 그 한 가지고, 이제 쉽게 아름다운 둘째 공주를 취할 수 있게 된 것이 그 두 가지며, 맏공주를 선택했기 때문에 왕과 부인이 매우 기뻐하신 것이 그 세 가지입니다."

왕은 그 말을 고맙게 여겨 대덕(大德, 본래 부처를 가리켰으나 덕망이 높은 고승을 가리키는 말로 바뀌었다.)이란 벼슬을 주고 금 130냥을 내렸다.

왕이 죽으니('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에 의하면 즉위 15년 7월 9일이다.) 시호를 경문(景文)이라 했다. 왕의 침전에는 매일 저녁 수많은 뱀들이 모여들었는데, 대궐에서 알아보는 사람들이 놀라고 무서워 몰아내려 하니 왕이 말했다.

"나는 뱀이 없으면 편히 잠들 수가 없으니 몰아내지 마라."

그래서 매일 잠잘 때면 뱀이 혀를 내밀어 왕의 가슴을 덮었다.

왕은 즉위한 후 귀가 갑자기 당나귀 귀처럼 자랐다. 왕후와 궁인들은 모두 이 사실을 알지 못하고 오직 복두장(幞頭匠, 왕의 모자를 만드는 장인) 한 사람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평생토록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다. 어느 날 복두장이 죽을 때가 되자 도림사(道林寺, 옛날 입도림入都林 가에 있었다. 이는 현 경주시 구황동 모전석탑지로 추측) 대숲 가운데로 들어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대나무를 향해 외쳤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그 후 바람이 불면 대나무 숲에서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다."

왕이 그것을 싫어하여 대나무를 모두 베어 버리고는 산수유를 심었는데 바람이 불면 이런 소리가 났다.

"우리 임금님 귀는 길다."

화랑 요원랑(邀元郞), 예흔랑(譽昕郎), 계원(桂元), 숙종랑(叔宗郞) 등이 금란(金蘭, 지금의 강원도 통천이다.)을 유람하면서 임금을 위해 나를 다스릴 뜻을 은근히 품었다. 그래서 가사 세 수를 짓고, 다시 사지(舍知, 신라 17관등 중 제13위 관등) 심필(心弼)에게 공책[針卷]을 주고 대구화상(大矩和尙 향가에 뛰어났던 신라의 승려로서 진성왕의 명에 의해 향가집'삼대목三代目'을 편찬했다.)에게 보내어 노래 세 수를 짓게 했는데, 첫째는 현금포곡(玄琴抱曲)이고, 둘째는 대도곡(大道曲)이며, 셋째는 문군곡(問群曲)이다.

익덧을 왕에게 아뢰니 왕이 아주 기뻐하여 상을 내렸다 하는데 가사는 자세하지 않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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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왕 장보고/장보고기념관

제45대 신무대왕(神武大王, 재위 839~839, 제38대 원성왕의 손자로서 <삼국사기> '신라본기'에서 등에 화살을 맞는 꿈을 꾼 후 등에 종기가 나 죽었다고 한다.)은 왕우에 오르기 전에 협사(俠士, 좌우에서 가까이 모시는 사람) 궁파(弓巴, <삼국사기> '열전'에는 '궁복弓福'이라 되어 있다. 장보고張保皐를 말하는 것으로 추측한다.)에게 말했다.

"나에게는 같은 하늘 밑에서 살 수 없는 원수(신무왕의 아버지 균정과 왕위를 다투었던 희강왕과, 장보고와 신무왕에게 죽임을 당한 민애왕을 말함)가 있소. 그대가 나를 위해 그를 제거해 주면 왕위를 차지한 후 그대의 딸을 왕비로 삼겠소."

궁파는 응낙하고 마음과 힘을 합쳐 군사를 일으켜 수도를 침범해 그 일을 이루었다.

왕이 왕위를 찬탈하고 궁파의 딸을 왕비로 삼으려 하자 신하들이 옆에서 힘껏 간했다.

"궁파는 비천하니 왕계서 그의 딸을 왕비로 삼아서는 안 됩니다."

왕은 신하들의 말에 따랐다. 이때 궁파는 청해진(淸海鎭, 남북국 시대 통일신라의 흥덕왕 때 장보고가 해상권을 장악하고 중국, 일본과 무역하던 곳으로 신라 바닷길의 요충지였으며 현재 전라남도 완도군 장좌리에 있는데, 이 섬의 남쪽에 방어용 목책이 있었다.)에서 국경을 지키고 있었는데, 왕이 약속을 어긴 것을 원망하여 반란을 꾀하고자 했다. 이때 장군 염장(閻長, 생몰미상, 장보고 휘하에서 활약한 무장으로 <속일본기>에는 염장閻丈, 염문閻文으로 기술되어 있다.)이 그 말을 듣고는 왕에게 아뢰었다.

"궁파가 장차 불충을 저지르려 하니 소신이 제거하겠습니다."

그러자 왕이 기꺼이 허락했다.

염장은 왕명을 받고 청해진으로 가서 연락하는 사람을 통해 궁파에게 말했다.

"왕에게 작은 원망이 있어 현명한 공께 몸을 의탁하여 목숨을 보존하려고 합니다."

궁파는 그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말했다.

"너희 무리가 왕에게 간하여 내 딸을 왕비로 삼지 못하게 했는데, 어찌하여 나를 만나려 하는가?"

염장이 다시 사람을 통해 전했다.

"이는 백관들이 간언하는 것이지, 저는 그 모의에 관여하지 않았습니다. 현명한 공께서는 의심하지 마십시오."

궁파는 그 말을 듣고 청사(廳事)로 불러들여 물었다.

"그대는 무슨 일로 이곳에 왔소?"

염장이 말했다.

"왕의 뜻을 거스른 일이 있어 막하(幕下, 지휘관이나 책임자가 거느리는 사람)에 기대어 해를 모면하고자 합니다."

궁파가 말했다.

"다행한 일이오."

그들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매우 기뻐했다. 그사이 갑자기 염장이 궁파의 장검을 가져다 그를 죽였다. 그러자 휘하의 군사들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모두 땅에 엎드렸다. 염장은 그들을 이끌고 서울(경주)로 돌아와 결과를 보고했다.

"궁파를 죽였습니다."

왕은 기뻐하며 염장에 상을 주고 아간(阿干, 신라 17관등 중 제6위인 아찬의 별칭)의 벼슬을 내렸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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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1대 진성여왕(眞聖女王)이 즉위한 지 몇 년 만에 유모 부호부인(鳧好夫人)과 그의 남편 잡간 위홍(魏弘, 제48대 경문왕의 친동생) 등 서너 명의 총애하는 신하가 정권을 쥐고 정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 도적이 벌 떼처럼 일어나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근심스러워하자 어떤 사람이 다라니(陀羅尼, 범어 dharani의 음역. 석가의 가르침의 정요精要로서, 신비한 힘을 가진 것으로 믿어지는 주문)의 은어(隱語, 특정한 집단에서 구성원들끼리만 사용하는 은밀한 용어)를 지어 길 위에 던졌다.

왕과 권력을 잡은 신하들이 이것을 손에 넣고 말했다.

"왕거인(王居仁)이 아니면 누가 이런 글을 짓겠는가?"

왕거인을 옥에 가두자 왕거인이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했다. 그러자 하늘이 곧 그 옥에 벼락을 내려 모면하게 해 주었다.

그 시는 다음과 같다.

 

燕丹泣血虹穿日(연단읍혈홍천일)

연단의 피울음은 무지개와 해를 뀌뚫고,

※연단은 전국시대 진시황의 죽이려다 실패하고 죽임을 당한 연나라 태자 단을 말함.

 

鄒衍含悲夏落霜(추연함비하락상)

추연이 머금은 비애는 여름에도 서리를 내렸네

※추연은 전국시대 제나라 사람으로 연나라 소왕의 스승이 되었지만 혜왕이 즉우하자 참소를 받아 옥에 갇혔는데 한여름에 서리가 내렸다고 한다.

 

今我失途還似舊(금아실도환사구)

지금 내가 길 잃은 것은 옛 일과 비슷한데,

 

皇天何事不垂祥(황천하사불수상)

아! 황천은 어찌하여 상서로움을 내리지 않나?

 

다라니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무망국 찰니나네 판니판니소판니 우우삼아간 부이사파가.

南無亡國 刹尼那帝 判尼判尼蘇判尼, 于于三阿干 鳧伊娑婆詞."

 

풀이하는 자들이 말했다.

"'찰니나제'란 여왕을 말하며, '판니판니소판니'란 두 명의 소판(蘇判, 신라 17관등 중 제3위인 잡찬의 별칭)을 말하는데, 소판이란 벼슬 이름이다. '우우삼아간'은 서너 명의 아간(阿干, 신라 17관등 중 제6위인 아찬의 별칭)을 말한 것이고, '부이'란 부호부인을 말한다."

 

거타지/문화컨텐츠닷컴

 

이때 아찬 양패(良貝)는 왕의 막내아들이었다. 그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갈 때 백제의 해적이 진도(津島, 나루터와 섬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를 막고 있다는 말을 듣고 궁사(弓士) 50명을 뽑아 따르게 했다.

배가 곡도(鵠島, 지금의 백령도, 지방에서는 골대도骨大島라 한다.)에 도착했을 때, 바람과 파도가 크게 일어 열흘 넘게 꼼짝없이 머물렀다. 공이 이를 걱정하여 사람을 시켜 점을 치게 했더니, 그는 이렇게 말했다.

"섬에 신지(神池)가 있으니 제사를 지내야 합니다."

그래서 못에 제물을 차려 놓자, 못의 물이 한 길 남짓이나 솟구쳤다. 그날 밤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공에게 말했다.

"활 잘 쏘는 사람을 이곳에 남겨 두면 순풍을 만날 것이다."

공은 꿈에서 깨어나 그 일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물었다.

"누구를 남겨 두어야 하는가?"

사람들이 말했다.

"마땅히 나무 조작 쉰 개를 만들어 우리들의 이름을 써서 바다에 던진 후 가라앉은 자의 이름으로 제비를 뽑아야 합니다."

공은 그렇게 했다. 군사 가운데 거타지(居陁知, 고려 태조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이 용녀를 아내로 맞이하는 설화와 유사하다.)란 사람의 이름이 물 속으로 가라앉았으므로 그를 남게 했다. 그러자 갑자기 순풍이 불어 배가 거침없이 나아갔다.

거타지는 수심에 잠겨 섬에 서 있는데 갑자기 노인이 못에서 나와 말했다.

"나는 서해의 신(神) 약(若)인데 날마다 승려 하나가 해가 뜰 무렵 하늘에서 내려와 다라니를 외면서 이 못을 세 바퀴 돌면, 우리 부부와 자손들이 모두 물 위로 떠오른다오. 그러면 그는 내 자손의 간장(肝腸)을 모조리 먹어치운다오. 이제 우리 부부와 딸 하나만 남았소. 내일 아침이면 반드시 또 그가 올 테니 그대가 쏘아 주시오."

거타지가 말했다.

"활 쏘는 일이라면 내 특기니 명령대로 하겠습니다."

그러자 노인이 고마워하고는 사라졌다.

거타지가 숨어 엎드려 기다렸다. 이튿날 동쪽이 밝아 오자 과연 승려가 나타나 이전처럼 주문을 외면서 늙은 용의 간을 빼려 했다.

이때 거타지가 활을 쏘아 맞히니, 즉시 늙은 여우로 변해서 땅에 떨어져 죽었다. 그러자 노인이 나와 감사해하며 말했다.

"공의 은혜를 입어 내 목숨을 보존하게 되었으니 내 딸을 그대의 아내로 주겠소."

거타지가 말했다.

"제게 주신다면 평생을 저버리지 않고 사랑하겠습니다."

노인은 자신의 딸을 한 송이 꽃으로 바뀌게 해 거타지의 품속에 넣어 주고는, 두 용에게 거타지를 데리고 사신의 배를 뒤쫓아가 그배를 호위하여 당나라로 들어가도록 명령했다.

당나라 사람들은 신라의 배가 용 두 마리의 호위를 받으며 들어오는 것을 보자 그 사실을 위에 보고했다.

황제가 말했다.

"신라 사신은 반드시 비범한 사람일 것이다."

그래서 연회를 열어 신하들의 위에 앉히고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나라로 돌아와서 거타지가 품에서 꽃송이를 꺼내자 꽃이 여인으로 바뀌었으므로 함께 살았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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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은 이양선 선생이 기증한 보물 1151호 '청동 옻칠 발걸이'는 말을 탈 때 사용하던 것으로 청동으로 만들었고, 흑칠을 한 것이 특징이다. 전체 모양은 덧버선과 흡사한데, 덮개에는 선을 촘촘하게 배치해 장식했고, 위쪽과 아래쪽에 구름 형태의 문양을 새겼다. 정확한 제작시기는 알 수 없지만 일본 쇼소잉[일본 나라(奈良)의 도오다이지(東大寺)에 있는 목조 건출물, 정창원(正倉院)]에 소장되어 있는 발걸이와 비교해 볼 때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높이 14.7cm, 길이 12.1cm의 크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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