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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270cm 크기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이다.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과 함께 감산사 절터에서 수습되었으며,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 제작 연대와 제작 동기를 확실히 알 수 있는데, 719년 김지성(金志誠, 652~?, 통일신라의 문신. 67세에 집사부 시랑에서 물러나고, 은퇴한 뒤 감산사를 창건하고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또한 미륵보살의 유가론을 연구하였으며, 노장사상에도 심취하였다고 한다.)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감산사를 지었으며, 미륵보살과 아미타여래를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미륵보살입상의 신체와 광배는 하나의 돌로 제작하였으며, 별도로 제작한 대좌와 결합시킨 형태로 만들었다. 머리에는 높은 보관을 썼으며, 보관의 중앙에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중생의 근기에 따라 변화되어 나타난다는 의미의 화불(化佛)이 있다.

얼굴은 갸름하면서도 살이 올라 있고 눈과 입에 미소가 어려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 불상의 목 부분에 표현되는 세 개의 주름으로 번뇌도(煩惱道), 업도(業道), 고도(苦道)를 의미함)가 뚜렷하며, 목걸이, 팔찌, 영락 장식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다.

법의가 얇아 신체의 풍만하고 유려한 곡선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데, 표현이 사실적이고 관능적인 모습을 한 통일신라 8세기 불상의 대표적인 예이다.


[함께보기: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甘山寺石造彌勒菩薩立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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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은 화강암으로 만든 높이 275cm 크기의 통일신라시대 유물이다.

제작 연대가 확실한 유물로 통일신라시대 불상의 연대에 있어 기준이 되고 있는 작품이다. 머리에 나발(螺髮, 불상 중 소라 모양으로 된 여래상의 머리카락. 나계(螺髻)라고도 함)이 있고 육계(肉髻, 부처의 정수리에 상투처럼 우뚝 솟아오른 혹과 같은 것. 불정(佛頂)·무견정상(無見頂相)·정계라고도 함)가 크고 편평하다. 다소 근엄한 표정을 하고 있으며, 이마에는 백호(미간백호상(白毫, 부처의 양 눈썹 사이에 난 희고 부드러운 털. 미간백호상(眉間白毫相)이라고도 함) 구멍이 있다. 법의(法衣, 세 가지 법의인 삼의(三衣), 곧 가사(袈裟)를 일컬음. 승복(僧服)•승의(僧衣)•법복(法服)이라고도 함)가 얇게 표현되어 있어 전체적인 몸의 곡선이 잘 드러나는 형태이다. 마치 물결치듯 U자 모양으로 흘러내린 옷주름이 어깨에서 가슴을 지나 두 다리까지 생동감 있게 표현되어 있으며, 광배는 거신광, 두광, 신광이 모두 표현되어 있다.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은 8세기 신라 불상의 정형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1915년 경주 감산사터에서 국보 81호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과 함께 옮긴 것이다. 광배와 대좌는 하나의 돌로 만들어 졌으며, 광배에는 719년 김지성(金志誠, 652~?, 통일신라의 문신. 67세에 집사부 시랑에서 물러나고, 은퇴한 뒤 감산사를 창건하고 감산사석조미륵보살입상과 감산사석조아미타불입상을 안치하였다고 한다. 또한 미륵보살의 유가론을 연구하였으며, 노장사상에도 심취하였다고 한다.)이 돌아가신 부모님을 위해 감산사를 지었으며, 미륵보살과 아미타여래를 만들었다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국보 82호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甘山寺 石造阿彌陀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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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844호 '경주 월지 금동초심지가위(慶州 月池 金銅燭鋏)'는 경주의 동궁과 월지에서 출토되었다. 금동초심지가위는 보통의 가위와는 다르게 초심지를 자르는 특수한 형태의 심지 가위인데, 전면에 새겨진 섬세한 어자문을 통해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에 제작된 왕실 공예품으로 추정된다.

또한, 일본 정창원(쇼소잉, 正倉院: 일본 나라[奈良]의 도오다이지[東大寺]에 있는 목조건축물) 에 소장되어 있는 금동가위의 생산지를 밝혀준 유물로 8세기 신라와 일본의 교류와 관련한 중요한 자료라는 점에서 통일 신라 금속공예의 우수성을 잘 보여주는 공예품이다.

동판재를 단조한 성형기법을 비롯해 주 문양을 부각시키기 위하여 바탕을 어자문(魚子紋, 도자기의 겉에 씌우는 잿물의 잘고 고운 금)기법을 쓴 장식기법과 금동제에 군청색 안료를 도포함으로써 황금색과 청색의 조화를 보여주는 화려한 금공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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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28호 '금동약사불입상(金銅藥師佛立像)'은 8세기 후반 통일신라 시대 작품으로 높이 37cm 크기이다.

약사불은 보통 한쪽 손에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데 우리나라의 경우 약사불이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통일신라시대로 여러방향에 머무르는 부처를 표현한 사방불에서 동방에 머무르는 부처로 표현된다.

둥근 약단지를 들고 있는 약사불은 갖은 질병을 고쳐주고 재난에서 벗어나도록 하며 음식과 옷을 제공하는 등 여러 고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현실세계와 가장 가까운 부처라고 할 수 있다. 부처가 되기 전 보살이었을 때는 중생을 구원하겠다는 것을 포함한 12가지 큰 소원을 지녔고, 부처가 되고 난 후에는 동방에 위치한 유리광세계를 다스리게 되었다고 한다.

보물 328호 '금동약사불입상(金銅藥師佛立像)'/ⓒ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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