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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처용 문화제 www.cheoyongf.or.kr

제49대 헌강대왕(憲康大王, 재위 875~886)대에는 서울(지금의 경주)에서 동해 어귀에 이르기까지 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담장이 서로 맞닿았는데, 초가집은 한 채도 없었다. 길에는 음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으며 바람과 비는 사철 순조로웠다. 이때 대왕이 개운포(開雲浦, 학성鶴城 서남쪽에 위치하므로 지금의 울주蔚州다.)로 놀러 갔다 돌아오려 했다. 낮에 물가에서 쉬고 있는데, 갑자기 구름과 안개가 캄캄하게 덮여 길을 잃었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주위 사람들에게 물으니 일관(日官, 신라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하던 관원)이 아뢰었다.

"이는 동해에 있는 용의 변괴니, 마땅히 좋은 일을 하여 풀어야 합니다."

그래서 용을 위해 근처에 절을 짓도록 유사(有司, 어떤 단체에서 사무를 맡아보는 직책의 벼슬아치 또는 담당관리)에게 명령했다. 명령을 내리자마자 구름이 걷히고 안개가 흩어졌다. 이 때문에 그곳의 이름을 (구름이 걷힌 포구라는 뜻의) 개운포라고 한 것이다.

동해의 용은 기뻐하여 일곱 아들을 거느리고 왕의 수레 앞에 나타나 덕을 찬양하며 춤을 추고 음악을 연주했다. 그 중 한 아들이 왕의 수레를 따라 서울로 둘어와 왕의 정사를 보필했는데, 이름을 처용(處龍)이라 했다. 왕은 미녀를 주어 아내로 삼아 그의 마음을 잡아 머물도록 하면서 급간(級干, 신라 십칠 관등 중 가운데 아홉째 등급의 벼슬로 진골과 6두품만 오를 수 있는 관등)이란 직책을 주었다. 그의 아내가 매우 아름다웠으므로 역신(疫神)이 흠모하여 밤이 되면 사람으로 변해 그 집에와 몰래 자곤 했다.

처용이 밖에서 집에 돌아와 두 사람이 자고 있는 것을 보고는 노래를 지어 부르고 춤을 추다가 물러났는데, 그 노래는 다음과 같다.

 

東京明期月良

동경 밝은 달에

夜入伊遊行如可

밤새도록 노닐다가

入良沙寢矣見昆

들어와 자리를 보니

脚烏伊四是良羅

다리가 넷이구나.

二 兮隱吾下於叱古

둘은 내 것이지만

二 兮隱誰支下焉古

둘은 누구의 것인가.

本矣吾下是如馬於隱

본래 내 것이지만

奪叱良乙何如爲理古

빼앗긴 것을 어찌 하리.

 

이때 역신이 형체를 드러내 처용 앞에 끓어앉아 말했다.

"제가 공의 처를 탐내어 범했는데도 공이 노여워하지 않으니 감탄스럽고 아름답게 생각됩니다. 맹세코 오늘 이후로는 공의 형상을 그린 그림만 보아도 그 문에는 절대로 들어가지 않겠습니다."

이로 인해 나라 사람들이 문에 처용의 형상을 붙여 사악함을 물리치고(이러한 미신은 불교 최전성기인 고려에 와서 궁중 의식으로서 처용무와 처용희로 발전되었다.) 경사스러운 일을 맞이하려고 했다.

왕은 돌아오자 곧 영취산(靈鷲山) 동쪽 기슭의 좋은 땅을 가려 절을 세우고 망해사(望海寺, 경남 울주군 문수산에 있던 절로 지금은 소실되어 터와 주춧돌만 남아 있다.)라 했다. 망해사를 또 신방사(新房寺)라고도 했는데, 이는 처용을 위해 세운 절이다. 또 왕이 포석정(鮑石亭, 경주시 배동에 있는 임금의 별궁으로 지금은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웠다는 석구만 남아 있다.)으로 행차하니, 남산의 신(神)이 나타나 어전에서 춤을 추었는데(삼국사기 신라본기 제11에는 "어디서 왓는지 알 수 없는 네 사람이 어가 앞에서 가무를 하였는데" 라고 나와 있다.), 옆에 있는 신하들에게는 보이지 않고 왕에게만 보였다. 그래서 왕이 몸소 춤을 추어 형상을 보였다. 그 신의 이름은 혹 상심(祥審)이라고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나라 사람들이 이 춤을 전하여 어무상심(御舞祥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고 한다. 어떤 이는 이미

신이 나와 춤을 추었으므로 그 모습을 살펴 왕이 공장(工匠)에게 본떠 새기도록 하여 후대에 보이게 했으므로 상심(象審)이라고 했다고 한다. 혹은 상염무(霜髥舞)라고도 하는데, 이는 그 형상을 일컫는 말이다.

또 금강령(金剛嶺)에 행차했을 때 북악(北岳)의 신이 춤을 추자 이름을 옥도금(玉刀鈐)이라 했고, 동례전(同禮殿)에서 연회를 할 때 지신(地神)이 나와서 춤을 추어 지백금간(地伯級干)이라 불렀다.

'어법집(語法集)'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그때 산신이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르기를 '지리다도파(智理多都波)'라고 했다. '도파'란 말은 아마도 지혜(智)로써 나라를 다스리는(理) 사람이 미리 사태를 알아채고 모두(多) 달아나(逃) 도읍(都)이 곧 파괴된다(破)는 뜻이다."

이는 바로 지신과 산신이 장차 나라가 망할 것을 알았기 때문에 춤을 추어 경계한 것이다. 그런데 나라 사람들이 이를 깨닫지 못하고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이라고 하면서 즐거움에만 점점 더 탐닉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만 것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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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부인헌화공원/ⓒ삼척시청 문화관광

 

성덕왕(聖徳王, 신라 33대 왕-재위: 702~737) 대에 순정공(純貞公, 5급 이상의 진골 귀족)이 강릉(江陵, 강원도 명주溟州지역) 태수로 부임해 가다가 바닷가에서 점심을 먹었다. 옆에는 바위가 마치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었는데, 천 길이나 되는 높이에 철쭉이 활짝 피어 있었다. 순정공의 부인 수로(水路)가 그것을 보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

"누가 내게 저 꽃을 꺾어 바치겠소?"

따르던 사람이 말했다.

"사람이 오를 수 없는 곳입니다."

다들 나서지 못하고 있는데 옆에서 암소를 끌고 지나가던 노인이 그 꽃을 꺾어 와서 가사(歌詞)도 지어 부인에게 함께 바쳤다.

그 노인이 누구인지는 아무도 몰랐다. 다시 이틀째 길을 가다가 또 임해정(臨海亭, 바닷가에 닿아 있는 정자)에서 점심을 먹는데, 바다의 용이 갑자기 부인을 낚아채 바닷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공이 넘어지면서 발을 굴렀으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또다시 한 노인이 말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여러 사람의 말은 무쇠도 녹인다.' 라고 하니, 바닷속 짐승인들 어찌 여러 사람들의 입을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경내의 백성들을 모아 노래를 지어 부르면서 지팡이로 강 언덕을 두드리면 부인을 다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이 이 말을 따르니, 용이 부인을 모시고 바다에서 나와 그에게 바쳤다. 공이 부인에게 바다 속 일을 물었다. 부인은 이렇게 말했다.

"일곱 가지 보물로 꾸민 궁전에 음식들은 맛이 달고 매끄러우며 향기롭고 깨끗하여 인간 세상의 음식이 아니었습니다."

부인의 옷에도 색다른 향기가 스며 있었는데, 이 세상에서는 맡아 볼 수 없는 향이었다.

수로부인은 절세미인이어서 깊은 산이나 큰 못 가를 지날 때마다 신물(神物)에게 빼앗겼으므로 여러 사람이 해가(海歌, 가락국 수로왕의 탄생 설화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와 유사함)

그 가사는 이렇다.

 

龜乎龜乎出水路(구호구호출수로)

거북아, 거북아! 수로부인을 내놓아라

 

掠人婦女罪何極(약인부녀죄하극)

남의 아내를 약탈해 간 죄 얼마나 큰가?!

 

汝若悖逆不出獻(여약패역불출헌)

네가 만약 거역하고 내다 바치지 않으면

 

入網捕掠燔之喫(입망포략번지끽)

그물을 쳐 잡아서 구워 먹으리라.

구지가龜旨歌

龜何龜何(구하구하)
거북아 거북아

首其現也(수기현야)
머리를 내놓아라

若不現也(약불현야)
만약 내놓지 않으면

燔灼而喫也(번작이끽야)
구워서 먹으리

노인이 바친 헌화가(獻花歌)는 이렇다.

 

紫布岩乎邊希(자포암호변희)

자줏빛 바위 가에

 

執音乎手母牛放敎遣(집음호수무우방교견)

암소 잡은 손 놓게 하시고,

 

吾肸不喩慚肸伊賜等(오힐불유참힐이사등)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花肸折叱可獻乎理音如(화힐절길가헌호리음여)

꽃을 꺾어 바치겠나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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