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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인은 예로 부터 '인륜의 대사(人倫之大事)'이며 '오복의 근원(五福之根源)'이라 하여 매우 신중하게 행하였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여러 연망 중에서도 혼망(婚網)을 매우 중시하였기 때문에 혼인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였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평생 자기 가문의 격(格)을 높이거나 유지하는 데 커다란 관심을 가졌는데, 그 방법 중의 하나가 좋은 가문의 구성원과 혼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 혼인 상대 가문의 격은 대부분 자신의 가문보다 못한 집안과는 절대로 혼인을 하려고 하지 않았다.

기산풍속도첩 '초례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혼인에 대한 조선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혼인 당사자의 입장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상다가문의 격만을 따져 혼사가 결정되는 일도 많았다. 또 지방 양반의 경우에는 서울 혼인, 즉 경혼(京婚) 또는 낙혼(洛婚)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었다. 가문의 지체를 하루아침에 높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사정은 김시온(金是瑥, 1598~1669)이 1663년에 정랑(正郞) 남 모(南某)에게 보낸 다음의 간찰을 통해서 알 수 있다.

 

말씀하신 혼사는 진실로 처음에 작정했던 대로 함이 마땅하나, 요즘에 와서 며느리와 의논해 보니, "근래 이웃에서 경혼(京婚)한 사람들을 보니 후회를 면치 못하는지라 이것이 가볍게 허락할 수 없는 첫째 이유요, 저쪽에서 비록 (장차) 산양(山陽)으로 (낙향할 것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예전에 사대부로서 낙남(落南)하여 편안히 살려고 한 자들도 지금 아무도 남아 있지 않은데, 하물며 오지도 않고 한갓 말만 하는 사람을 어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가볍게 허락할 수 없는 둘째 이유요, 혼사를 정하는 즈음에 먼저 신랑을 높이고 뒤에 가세(家世)를 언급하는 것이 곧 상례이어늘, 고성(固城)은 그렇지 아니하여 그 편지에 다만 가세는 물을 것이 없다고만 하고 신랑이 어떻다는 말이 없으니, 이것은 반드시 무슨 곡절이 있는 것일 터이니 가볍게 허락할 수 없는 셋째 이유입니다"라고 대답하고는 드디어 눈물을 흘리면서 흔쾌히 따르려 하지 않으니, 내 비록 할아비이나 어찌 억지로 (혼인)하도록 시킬 수가 있겠습니까?

 

이편지에 의하면 김시온은 자신의 손녀딸을 정랑을 지낸 남 모와 아주 가까운 친인척과 혼인을 시키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동안 두 집안 간의 혼담은 고성군수를 역임한 인물이 중간에서 전달했던 것으로 판단되는데, 김시온 개인 입장에서는 상대방의 집안이 좋고 또 서울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호감을 가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손녀의 어미인 며느리에게 의향을 물었더니 며느리는 세 가지 점에서 이 혼사를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첫째, 주위에서 서울 혼인을 한 사람들을 살펴보니 후회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권력의 중심지인 서울에 살다 보니 자연히 당쟁 등에 깊이 연루되어 패가(敗家)하거나 파산하는 집안을 많이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낙남하여 편안하게 살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미 낙남하였던 사람들도 시골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모두 떠났으며, 상대방의 고향이 원래 상주에 속하는 산양이라고는 하나 말만 낙남하여 살 것이라 해 놓고 실제로는 그러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곳으로 자신의 딸을 시집보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서울에 사는 사대부들은 언제나 정치에 더 이상 간여하지 않고 낙남하여 편히 살겠다고 말하지만 이를 선뜻 실천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자신의 딸을 그런 집안에 시집보낼 수 없다는 것이다.

 

셋째, 중매를 할 때에는 먼저 상대방의 인물됨을 논하고 그 다음에 가세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 하는데, 고성군수가 혼담을 건넬 때 인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가세는 물을 것도 없다고 말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신랑감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김시온의 며느리는 이상과 같은 세 가지 이유를 들어 남 정랑 댁 친인척과의 혼인을 반대하였다. 이 혼담이 결국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위 간찰을 통해서 김시온과 그의 며느리가 손녀의 혼인에 대해 상당한 견해 차이를 보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김시온은 자기 집안보다 가격(家格)이 높고 서울에 세거하던 집안과의 혼인을 선호한 데 비하여 며느리는 신랑의 인물 됨을 더욱 중시했음을 알 수 있다.

 

혼인은 이와 같이 자신이나 자기 가문보다 우월하거나 동등한 조건을 가진 집안을 찾아서 하고자 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더군다나 왕이나 세자가 결혼해야 하면 전국에 혼인 금지령이 내려졌고, 또 인심이 조석으로 변하기 때문에 혼담이 오갈 때에는 서둘러 일을 성사시키려고 하였다. 일이 잘되었을 때에는 두 집안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지지만, 그렇지 않았을 때에는 소원해지거나 심지어는 원수관계로 돌변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조석윤(趙錫胤, 1606~1655)이 보낸 다음의 편지를 통하여 알 수 있다.

 

드릴 말씀은 대혼(大婚) 금지령이 이미 풀렸다고 합니다. 세상 인심이 나날이 더욱 사나워져 사람 일도 또한 알기 어렵습니다. 당신이 과연 저희 집과 혼사를 치를 의향이 있으면 먼저 폐백을 보낼 기일을 정하고 좋은 달과 날짜를 정하십시오. 그런 후에야 두 집안의 관계가 더욱 굳어질 것입니다.

조석윤이 말한 바와 같이, 중매인을 통하여 서로 혼인의사를 확인한 후에는 순서에 따라 납채(納采, 납채문과 사주단자를 보내는 일)와 연길(涓吉, 혼인 날자를 정하여 택일단자를 보내는 일)을 하고 대례(大禮)를 치렀다. 혼인 또한 집안의 경사였기 때문에 이때에도 특별한 재산 분급이 이루어졌는데, 대개 시아버지가 며느리에게 주거나 장인이 사위에게 별급하는 경우가 많았다. 1551년에 전라도 남원부에 살던 이혼(李渾)은 며느리를 맞이하고서 마음이 흡족하여 자신의 재산을 떼어 주었다.

납채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연길단자/ⓒ문화컨텐츠닷컴

오늘 우리 집안의 맏며느리를 맞이하니 나의 마음이 흡족하다. 용모가 단정하기까지 하니 매우 기뻐서 상을 내리지 않을 수 없다. 아버지 쪽에서 전래된 인동(仁同)에 사는 사내종 철손의 둘째 소생 계집종 춘덕(39세, 계묘생) -중략- 과 금천(衿川)에 있는 -중략- 논 1섬지기(약 2천평) 등을 별급하니 자손에게 대대로 전하여 오랫동안 부려 먹도록 해라.

 

이 외에도 신부가 시집가면서 친정에서 부리던 계집종을 데려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를 교전비(轎前婢)라 하였다. 신부가 출가하면 처음에는 으레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시댁의 여러 집안일에 서투를 수밖에 ㅇ벗었다. 또 가문에 따라 예의범절이 약간씩 다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친정에서 신부와 오랫동안 생활해 온 경험이 많은 계집종을 교전비로 딸려 보내어 신부의 시집생활을 돌보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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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혼인이란 남녀 간의 성적 결합이 바탕에 자리 잡고 있다. 상대방에 대한 독점적, 배타적 성적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함으로써 핏줄로 맺어진 가족을 이루고 사는 첫 단계가 혼인이다.

그러나 혼인은 단순한 남녀 간의 관계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이기도 하다. 혼인(婚姻)이라는 글자는 혼례를 저녁에 치른다 하여 저녁 혼(昏)이 변한 혼(婚)자와, 인척관계를 의미하는 인(姻)자가 결합되어 만들어진 글자이다. 그러므로 혼인은 남자와 여자의 결합이라는 개인적 관계이기도 하지만, 가문과 가문의 결합이라는 사회적 관계이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도 양가 집안의 사회적 지위, 경제력 등이 혼인의 성사 여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예전에는 그러한 경햡이 더 심했다. 조선시대의 통혼권(通婚圈)은 매우 폐쇄적이었다.

첩을 두는 것과 같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면 혼인은 같은 신분끼리만 행해져 이를 동색혼(同色婚)이라 하였다. 이렇게 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혼인으로 인한 혈연의 계승이 사회적인 활동을 하는데 여러 부문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호적에는 호주와 처의 사조가 기록되었고, 과거를 치를 때에는 사조단자(四祖單子)를 제출하여야 했다. 여기서 사조란 부, 조부, 증조부, 외조부를 말한다. 그러므로 남녀 모두 상대방 집안의 신분, 지위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살펴보아야 할 상대방 친족의 범위는 더 넓어진다. 예컨대 왕비가 될 사람의 가문을 심사할 때에는 팔고조도(八高祖圖)를 보는데 팔고조도의 경우는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 또는 그 가운데 아버지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아버지처럼 아버지와 어머니가 뒤섞인 경우까지 모두 포함하여 고조부모에 16명, 증조부모에 8명, 조부모에 4명, 부모에 2명 등 30명이 열거되는 복잡한 가계도였다.


팔고조도(八高祖圖)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고高
조祖
모母

고高
조祖
부父

증曾
조祖
모母

증曾
조祖
부父

증曾
조祖
모母

증曾
조祖
부父

증曾
조祖
모母

증曾
조祖
부父

증曾
조祖
모母

증曾
조祖
부父

조祖
모母

조祖
부父

조祖
모母

조祖
부父

비妣(어머니)

고考(아버지)


그리고 여말선초에 음서(蔭敍)에서 가계(家系)를 확인하고, 사심관(事審官, 고려시대 지방에 연고가 있는 고관에게 자기의 고장을 다스리도록 임명한 특수관직)을 임명할 때 연고지를 확인하며, 경재소(京在所, 지방 관청과 정부의 연락 기능을 담당하고 중앙 집권을 강화하기 위해 서울에 설치한 출장소를 이르던 말)의 범위를 정하고, 근친혼 관계를 확인할 때 쓰였던 팔조호구(八祖戶口)는 조부모, 증조부모, 외조부모, 처부모의 사조를 조사했다. 보통의 경우라면 아버지 쪽으로 6대조까지 20명, 어머니 쪽으로 5대조까지 13명, 처 쪽으로 4대조까지 12명으로 도합 45명이 팔조호구의 범위였다. 이런 사회에서 혼인은 가문의 성쇠를 결정짓는 중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음서의 혜택을 받는 경우에도 조선시대에는, 비록 고려시대와는 달리 친족의 범위가 좁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가문의 격기 힘을 발휘했던 것이 사실이었다. 이러한 여러 조건이 같은 신분끼리의 폐쇄적인 통혼권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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