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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파식적/ⓒ문화컨텐츠닷컴

 

만파식적(萬波息笛)

[삼국사기] '잡지(雜誌)'편에 나오는데, 김부식은 "괴이쩍어 믿을 수 없다."라고 하면서 그 존재에 대해 부정적이었다. '만파식적'을 풀이하면 '거센 물결을 잠재우는 피리'라는 의미다.

제31대 신문대왕(神文大王, 재위 681~692)의 이름은 정명(政明)이고, 성은 김씨며, 개요(開耀, 당나라 고종의 12번째 연호로 681년에서 682년까지 사용했다.) 원년 신사년(681년) 7월 7일에 즉위했다. 아버지 문무대왕을 위해 동해 가에 감은사(感恩寺,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다. 지금은 터만 남아 있으나 12미터에 달하는 두 탑은 건하다.)를 지었다.

[사중기寺中記]에는 이렇게 되어 있다. 문무왕이 왜병을 진압하기 위해 이 절을 처음 지었으나 완정하지 못하고 죽어 바다의 용이 되었다. 그 아들 신문왕이 즉위하여 개요 2년(682년)에 완성했다. 금당(金堂) 섬돌(집채와 뜰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만든 돌층계) 아래를 파고 동쪽을 향해 구멍 하나를 뚫었는데, 바로 용이 절 안으로 들어와 서리도록 마련한 것이라 한다. 대개 유조에 따라 뼈를 묻은 곳을 대왕암(大王岩, 문무대왕릉文武大王陵,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 바닥가에서 보이는 돌무더기다.)이라 하고, 절 이름을 감은사(感恩寺)라 했다. 후에 용이 나타난 모습을 본 곳을 이견대(利見臺)라 했다.

이듬해 임오년 5월 초하루(어떤 본에는 천수天授 원년이라 했으나 잘못된 것이다.)에 해관(海官) 파진찬(波珍湌, 신라 시대 17관등 중 제4위로 해간海干, 파미간波彌干이라고도 한다.) 박숙청(朴夙淸)이 아뢰었다.

"동해 가운데 있던 작은 섬 하나가 감은사 쪽으로 떠내려와 파도를 따라 왔다 갔다 합니다."

왕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게 여겨 일관(日官, 삼국시대 천문관측과 점성을 담당하던 관원) 김춘질(金春質 혹은 春日이라고 했다.)에게 점을 치도록 명령했다.

일관이 왕께 아뢰었다.

"돌아가신 임금(문무대왕文武大王)께서 지금 바다의 용이 되어 삼한을 지키며, 또 김유신 공이 33천(天)의 한 아들이 되어 지금 내려와 대신(大臣)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덕을 같이하여 성을 지킬 보배를 내리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만약 폐하꼐서 바닷가로 나가시면 반드시 값을 매길 수 없는 큰 보배를 얻으실 것입니다."

왕은 기뻐하며 그달 7일에 이견대로 가서 그 산을 바라보고 사신을 보내 살펴보게 했다. 산의 형세는 거북이 머리처럼 생겼고, 그 위에 대나무 한 그루가 있었는데, 낮에는 둘이 되고 밤에는 하나로 합쳐졌다. 혹은 산 역시 대나무처럼 밤자으로 합쳐졌다 떼어졌다 했다고 한다.

사신이 와서 아뢰자 왕은 감은사로 가서 묵었다. 이튿날 오시(午時, 오전 11시~오후 1시까지다.)에 대나무가 하나로 합치자, 천지가 진동하고 이레 동안 폭풍우가 치면서 날이 어두워졌다가 그달 16일에야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가라앉았다. 왕이 배를 타고 그 산으로 가니 용이 검은 옥대(玉帶)를 가져다 바쳤다. 왕은 용을 영접하여 함께 자리에 앉았다.

왕이 물었다.

"이 산과 대나무가 떨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용이 말했다.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지 않지만,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대나무란 물건은 합친 후에야 소리가 나게 되어 있으니, 성왕께서 소리로써 천하를 다스릴 징조입니다. 왕께서 이 대나무를 얻어 피리를 만들어 불면 천하가 평화로울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신 왕께서는 바닷속 큰 용이 되셨고 김유신은 또 천신이 되었습니다. 두 성인께서 한 마음이 되어 값으로는 정할 수 없는 이런 큰 보물을 내려 저에게 바치도록 한 것입니다."

왕은 놀라고 기뻐하며 오색 비단과 금옥으로 답례하고는 사람을 시켜 대나무를 베어 가지고 바다에서 나오니, 산과 용이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왕은 감은사에서 묵었다. 17일에 지림사(祗林寺, 기림사라고도 하며 경주시 양북면 호암리에 있다.) 서쪽 시냇가에 이르러 수레를 멈추고 점심을 먹었다. 태자 이공(理恭, 즉 효소대왕孝昭大王이다.)이 대궐을 지키다가 이 이야기를 듣고는 말을 달려와 축하하고 천천히 살펴본 다음 아뢰었다.

"이 옥대의 여러 쪽들은 모두 진짜 용입니다"

왕이 물었다.

"네가 그것을 어떻게 아느냐?"

"한 쪽을 떼서 물에 넣어 보십시오."

태자가 아뢰었다.

그래서 왼쪽에서 두 번째 쪽을 떼어 시냇물에 담갔더니 곧바로 용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고 그 자리는 못이 되었따. 그래서 용연(龍淵)이라 불렸다.

왕은 궁궐로 돌아와 그 대나무로 피리를 만들어 월성(月城) 천존고(天尊庫)에 보관했는데 이 피리를 불면 적군이 물러가고, 병이 낫고, 가물 때는 비가 내리고, 장마 때는 비가 그치고, 바람이 그치고, 파도가 잠잠해졌으므로 만파식적이라 부르고 국보로 삼았다.

효소대왕 때 이르러 천수(天授, 주周나라 측천제則天帝의 연호로 천수라는 연호는 2년밖에 안 썼으므로, 천수 4년은 장수長壽 2년을 말한다. 중국 최초의 여황제로 690년에서 705년까지 재위했다.) 4년 계사년(693년)에 부례랑(夫禮郞)이 살아 돌아온 기이한 일이 있었으므로 다시 만만파파식적(萬息笛)이라 불렀다. 자세한 것은 그 전기(傳記)에 있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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