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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대용 앙부일구(해시계)/국립중앙박물관]


[해대용 앙부일구(해시계)/국립중앙박물관]


[해대용 앙부일구(해시계)/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는 해시계를 앙부일구(仰釜日晷) 또는 앙부일영(仰釜日影)이라 했는데, 앙부일구에서 일구라는 말은 해시계란 뜻이다. 앙부라고 하는 말은 해로 부터 그림자가 생겨 맺히는 면을(수영면) 뜻하는데, 솥을 받쳐 놓은 것같은 오목한 반구형의 모습에서 비롯된 말이다. 휴대용 앙부일구는 휴대가 가능하도록 작게 만들어낸 해시계로 회백색의 대리석을 깎아 틀을 만들고  수영면에 청동으로 만든 영침(影針)을 꽂았다. 해시계 옆에는 수영면 보다 조금 작게 만든 나침반을 함께 배치해 시간과 함께 방향도 함께 파악할 수 있도록 제작된 것이 특징이다. 시간과 방향 표시 문자는 각각 모두 음각으로 새겨 칠을 했는데, 측면에 절기와 북극고도가 새겨져 있고, 바닥 면에는 '동치신미맹하하한(同治辛未孟夏下澣)'이라고 하는 연대와 '진산인(晉山人) 강건제(姜健製)라는 낙관 2과가 새겨져 있어 휴대용 앙부일구가 1871년(고종 8년)에 본관이 진주인 강건이 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강건은 유명한 사대부 문인화가인 표암 강세황(1713~1791)의 증손자로 고종 때인 1899년에서 1900년에 걸쳐 한성판윤을 지냈다. 따라서 강건이 휴대용 앙부일구를 직접 제작했다기 보다는 어떤 목적에 의해서 제작하는 과정에서 앙부일구에 새겨진 문장을 지었거나 제작 책임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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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루,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 사람들은 해와 달이 바뀌는 것을 달을 보아 알 수 있었으며, 날짜도 달력의 보급으로 알 웃 있었다. 씨뿌리기, 모내기, 김매기 등의 농사일은 달력에 표시된 양력 절기를 보고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알기 어려웠지만 당시 사람들은 짧은 시간의 흐름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가 잠자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시간은 지금과는 달랐다. 낮에는 정시법을 적용하여 2시간 간격으로 시간이 바뀌는 12시진을 사용하여 진시, 사시 등으로 시간을 표시했다. 그러나 밤시간은 부정시법을 적용하여 하늘이 어슴푸레한 박명(薄明)을 뺀 나머지 밤시간을 5등분 하여 5경으로 표현했으므로 5경이 가리키는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네이버


 나라에서는 자격루를 표준시계로 삼아 종을 쳐서 그 시간을 일반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종은 하루에 두 번 울렸다.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가 시작 되는 시간과 성문을 열고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시간 뿐이었다. 정오에는 오고를 쳐서 시간을 알리고, 후에는 오고가 오포, 사이렌으로 대체되었지만 정오의 시보는 서울에 국한되었다.


휴대용 해시계,1849년(현종 15), 가로 11.5㎝, 세로 15.8㎝,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므로 민간에서는 시간을 재는 데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해시계는 가장 널리 쓰인 시계였지만 양반층만이 주로 사용했으며, 그나마 밤이면 사용할 수 없었고 날이 궂어도 쓸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낮시간을 해의 방위에 따라 대략적으로 판별했다. 밤에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보아 시간을 알아냈다. 사람들은 하루 시간의 흐름에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도 큰 불편 없이 살 수 있었다. 당시 사회가 짧은 시간의 변동을 측정하는 것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농업이 산업의 거의 전부였고, 농업은 세밀한 시간의 흐름에 좌우되지 않았다. 또 노동이 강도도 그다지 세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지 않았으며, 지금에 비교하면 매우 느긋한 삶을 누리고 있었고, 사회발전 속도도 더뎠다. 그러다가 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산업화가 진행되고 사람들은 점차 바쁘고 고된 삶에 빠져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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