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 들어선 조선왕조는 건국과 함께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고려 때까지의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불교를 비판하는 한편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유교경전에 근거하여 기본법제를 정비하는 등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건설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과 권근 등을 비롯한 관학파 유학자들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정도전은 왕조의 성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로 조선을 기본적으로 유교적 윤리규범에 의해 통제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이상을 품고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제도 정비에 기여하는 한편 '불씨잡변' 등의 저술을 통해 불교를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 또 권근은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지향하는 조선왕조의 성립 후 당시까지의 주자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이해한 대표적인 학자로 '입학도설'이나 '오경천견록' 등의 저술로 조선 초기 주자학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권근의 글씨, 〈 해동명적〉에서, 규장각 소장, 백과사전/한국브리태니커]

 

 이들 관학파 유학자들은 조선조가 성립하는 데는 크게 공헌했지만 그런 공헌을 발판으로 중앙권력을 독점하면서 경제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자로서 기득권층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도덕적인 타락과 함께 권력의 남용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5세기 무렵에 이르면서 이들 대토지 소유자들은 무차별적으로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중소 지주들과의 갈등과 마찰이 극에 달했다. 이름은 물론이고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그 세력이 비대해졌다. 결국 당시 군주였던 성종은 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껴 김종직을 비롯한 중소 지주 출신 신진 유학자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로 인해 김종직을 비롯한 지방 출신 주자학자들이 중앙의 요직을 차지하고 기존의 세력과 대립하는 국면이 조성되었고 그로 인해 정치세력 또한 둘로 나뉘게 되었는데, 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훈구파이고 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사림파이다.

 

 사림파의 진출로 궁지에 몰린 훈구파는 연산군이 즉위하고 나자 김종직이 생전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빗대어 비판한 '조의제문'을 썻다는 사실을 빌미로 삼아 1498년 김일손 등을 죽이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등 비이성적인 대응으로 사림파를 탄압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무오사화이다.

 

[조광조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백과사전/한국브리태니커]

 

 이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림파 유학자들은 지방 향촌 사회를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하였으며, 이후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이들은 다시 중앙의 정계로 진출하여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대표가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일군의 사림파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사헌부, 사간원 등 언론 관직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여 기존의 공신들을 비판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일종의 추천제인 현량과를 통해 자기 세력을 중아으로 진출시키고, 지방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주자가 손질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군현마다 시행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급진적인 개혁은 또 다시 기득권 세력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역모를 뒤집어씌워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파 유학자들을 희생시켰다. 이 사건이 기묘사화이다.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