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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는 김치말고 '지'라는 말도 있다. 오이지, 짠지, 섞박지, 장아찌, 젓국지, 게국지 등의 여러 가지 김치 이름에 '지'가 붙고, 지금은 일본에서 유래된 다쿠앙도 단무지라고 부른다. '지'는 뒤에 붙기만 하는 말이 아니라 전라도와 경상도, 충청도의 일부 지역에서는 그대로 김치라는 뜻으로 쓰인다.

'지'는 '디히'에서 온 말로, 15세기 문헌에서 '겨울김치'를 '겨디히'라고 불렀다. 그 디히가 지히, 지이를 거쳐 지로 바뀐 것이다. 장아찌라는 말도 장에 절인 김치라는 뜻의 '쟝앳디히'가 시간이 흐르면서 바뀐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지보다는 김치라는 말이 훨씬 더 많이 쓰이고 있다. '김치'라는 말은 '담근 채소'라는 뜻의 한자어 '沈菜'에서 유래되었고, 김장도 '침장(沈藏)'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런데 한자어 '沈菜'를 우리말로 어떻게 표기했는가 하는 것을 추적해 보면 김치의 유래가 매우 오래되었음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볼 수 있다.

한글이 창제되기 이전의 '沈菜'를 조상들이 어떻게 읽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정확히 알 길이 없다. 침채의 한글 표기를 최초로 확인할 수 있는 문헌은 1527년에 편찬된 최세진의 '훈몽자회(訓蒙字會)'인데, 이 책에서 '저(菹)'를 '딤채 조'로 해석했다.


딤채(팀채) > 짐채(침채) > 김채(짐치) > 김치


그런데 1700년을 전후해서 '디'가 '지'로, '티'가 '치'로 바뀌는 구개음화가 진행되어 '딤채'는 '짐채'로 변했다.

그런데 '딤채'가 사용되던 시기에도 '沈菜'를 '팀채'로 읽은 사례가 적잖이 보인다. '훈몽자회'보다 약 50년 뒤에 간행된 '내훈(內訓)'이 그렇다. 물론 '팀채'도 1700년을 전후해서 구개음화의 진행으로 '침채'로 바뀌었다.

결국 '沈菜'는 초기에 '딤채' 또는 '팀채'로 불렸고, 18세기쯤에는 구개음화 현상으로 인해 '짐채' 또는 '침채'로 불렸다.

'딤채'와 '팀채'가 공존했던 16세기에 '沈'자의 공식적인 음은 '팀'이었다. 그런데 왜 일부 책에서 '딤채'라고 했을까? '딤채, 짐채'로 부른 '훈몽자회' '신증유합(新增類合)' '구황촬요벽온방(救荒撮要壁瘟方)' '두창경험방언해(痘瘡經驗方諺解' 등의 책은 어린이 또는 초보 학습자를 위해 간행한 책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일반서민들이 쉽게 보게 하기 위해 한글로 언해한 책들이다. 반면에 '팀채, 침채'로 부른 '내훈' '소학(小學)' '왜어유해(倭語類解)' '한청문감(漢淸文鑑)' 등의 책은 양반들의 수신서(修身書)이자 유교경전이며, 외국어 학습자들을 위한 전문서적이다.

이는 무엇을 뜻하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김치를 '딤채'라 불렀는데 양반 식자들이 김치는 '沈菜'라는 한자말에서 온 것이니까 '팀채'로 읽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팀채'라는 말은 책에만 있던 말이지 일반인들이 일생생활에서 실제로 썼던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이는 모든 사람이 '짜장면'이라고 하는데 방송에서만 유독 '짜장면'이 중국어 '자쟝미엔(炸醬麵)'에서 유래된 것이니까 '자장면'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똑같은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출처: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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