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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필적/한국민족문화대백과]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은 평생 은거했던 서경덕과는 달리 25세때 부터 적극적으로 벼슬길에 나아가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는데 1530년 사간으로 재직시에 권신들의 배척을 받아 쫓겨났다가 복귀하는 등 정치적으로 여러 차례의 질곡을 겪었다. 말년에는 권신 윤원형 일파의 미움을 받아 강계로 유배된 뒤 그곳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주요 저술을 남겼다.

 서경덕이 기철학을 열었다면 회재 이언적은 이(理)의 철학을 중심으로 불교와 도교로 대표되는 비주자학적 사유를 극복함으로써 조선 주자학의 이론적 수준을 한 단계 높이는 학문적 업적을 남겼다. 그는 당시 손숙돈과 조한보 간에 주자학의 주요 개념인 무극과 태극에 관한 편지글이 오가는 것을 보고 이른바 무극태극 논쟁을 제기하여 두 사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논쟁의 시대를 열었다.

 그는 이 논쟁을 통해 주자학에 대한 불교적,노장적 이해를 비판했는데, 무극과 태극은 이(理)를 지칭한 것이지 기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동시에 이(理)는 형질이 없지만 결코 무(無)는 아니라고 하여 이(理)를 무(無)로 이해하는 노장적 풍조를 경계하여 철저하게 주자학적 사유에 입각하여 무극과 태극을 설명함으로써 주자학의 순수성을 확보하는 데 주력하였다.

 한편 학문 방법론에서도 조한보가 태극의 본체를 단번에 깨친다는 논의를 비판하고 거경을 중심으로 한 주자학적 학문론을 전개하였다. 아울러 그는 이(理)는 지극히 높고 지극히 묘하지만 그 실체가 깃들어 있는 곳을 찾는다면 지극히 가깝고 지극히 현실적인 곳에 있다고 주장함으로써 일상생활을 떠나서 이(理)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학문 수행 또한 일상생활을 떠나서는 안된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또 이(理)의 절대성을 특별히 강조하였는데, 사람과 사물은 형질이 있지만 이(理)는 형질이 없기 때문에 이(理)는 생사와 시종도 없는 존재라고 하여 이(理)를 무시무종의 궁극적 존재자로 규정하는 등 이(理)의 실재성과 주재성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주자학을 해석함으로써 훗날 같은 이(理)의 철학자인 이황으로 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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