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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옥


 전통적으로 집의 크기는 칸(間)을 단위로 재었다. 기록으로만 남겨진 집의 크기가 종종 혼동이 되는 것은, 칸이 때로는 건물이 들어선 땅 전체의 넓이, 즉 대지 규모를 말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대지에 들어선 건물의 규모, 즉 건평을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건평의 규모에 사용되는 칸이란 본래 네 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네모꼴의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면적은 일정하지 않았는데, 공간을 이루는 부재의 길이에 따라 길이가 달라서, 한 변의 길이가 작게는 6척부터 크게는 10척까지 들쭉날쭉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 변의 길이가 7.8척 정도를 이루는 공간을 의미했다. 여기서 쓰는 척은 영조척(營造尺)으로서, 한 자의 길이는 시기에 따라 달랐으나 조선 후기에는 대략 31cm 정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한옥


 신라시대에도 그러했지만 조선시대에도 신분에 다라, 또는 관직의 고하에 따라 정해진 규모 이상의 집을 짓지 못하게 규제했다. 예컨대 세종 때에는 대군은 60칸,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일반서인은 10칸을 넘지 못하게 규제를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는데, 민간에 또도는 말로는 양반집은 최대 99칸까지 지을 수 있다고 하여 구례 운조류(雲鳥樓)가 99칸 규모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렇지만 양반가 99칸은 뚜렷한 근거 없이 떠도는 말이었으며, 실제로 100칸이 넘는 집들도 있었다. 연산군 때 성희안의 집이 40칸 규제를 넘었고, 대군, 공주도 60칸을 넘을 수 없었다지만 인조 때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이 170칸이었고, 숙종 때 왕자 연령군(延齡君)의 혼례를 앞두고 신혼집을 미리 지어 마련했는데, 집터 2,260칸, 기와집 177칸이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부자양반의 집을 살펴보면, 주인남자가 기거하는 사랑채와 주인여자가 기거하는 안채가 따로 있고, 종과 하인이 사는 행랑채가 따로 있었다. 여기에 곡식을 보관해 두는 곳간, 농기구나 허드레 살림살이를 보관해 두는 헛간, 마소를 키우는 마구간, 외양간 등이 덧붙여졌다.


조선시대 초가집


 하지만 일반백성들의 집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흔히 아주 소박한 집을 '초가삼간'이라고 하는데, 초가삼간이란 두 칸짜리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구조이거나, 한 칸짜리 방 둘에 부엌 하나가 딸리 구조를 말한다. 때로는 여기에 마루 한 칸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그것이 대개 일반평민들의 살림집이었다.

 조건이 아주 나쁜 집으로는 토막집, 움집이라 부르는 집이 있었다. 최근의 발굴결과를 보면,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져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움집이 조선시대에도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집들은 땅을 약간 파고 바닥을 다진 뒤, 그 위에 거적자리 같은 것을 깔아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막고 나무, 솔가지, 집 따위로 지붕을 엮어 만든 집이다. 최소한의 살림도구로 살아가는 극빈층은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이런 집에서 살고 있었으며, 이런 움막집은 일제 강점기의 사진에도 보인다. 18세기에 정조가 수원에 갔을 때 그곳 집들을 묘사하면서 달팽이 껍데기 같기도 하고 게딱지 같기도 하다고 하였는데, 그런 집들이 바로 이러한 움집이었을 것이다.

움집 형태/출처: (주)천재교육


 그런데 집의 전체적인 규모는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라도 방 하나하나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대개 방은 한 칸 또는 두 칸 규모였다. 한 칸짜리 방은 대략 사방 2미터 남짓의 방이므로 사람이 누우면 누운 방향으로는 남는 공간이 별로 없었다. 물론 높은 지위와 경제력을 갖춘 계층의 집은 일반서민의 집 방보다는 방 한 칸의 넓이가 더 넓었다. 그러나 두 칸짜리 방이라 해도 현대식 주거와 비교하면 방의 넓이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중세 서양의 가옥은 서민가옥도 이렇게 작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방은 대개 거주공간이 방 하나로 이루어져 모든 가족이 하나의 방 안에 살았고, 그 공간이 개방된 상태로 부엌, 거실, 침실의 구분 없이 쓰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가옥은 서민가옥도 부엌과 방이 벽체로 나뉘어 별도의 공간을 구성했으며, 때로는 침실이 아닌 거실로 마루가 별도로 설비되어 있어서 한 채의 집은 여러 공간으로 구획되어 방 하나하나의 규모가 작았던 것이다. 방의 규모가 이렇게 작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난방 때문이었다. 서양에서는 화로, 벽난로를 두어 방 안에서 불을 때어 복사열이나 공기의 대류에 의해 방안을 따뜻하게 했다. 일본의 경우에도 거실 한가운데를 부분적으로 파서 그곳에 화로 역할을 하는 이로리를 두어 난방을 하고 물을 끓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방 밖의 부엌에서 불을 때어 방의 구들을 뜨겁게 해 간접적으로 방 안을 따뜻하게 했다.


 온돌은 방바닥을 따뜻하게 하고 적은 연료로 오랫동안 방을 따뜻하게 하는 데는 세계 어떤 문명권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효과적인 낭방법이었다. 예컨대 일본의 다다미방과 비교하더라도 한옥의 온돌은 월등히 우수한 난방방법이었다. 그러나 온돌에도 약점은 있었는데, 따뜻한 방바닥에는 벼록과 같은 벌레가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방바닥이 아닌 실내 전체를 따뜻하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웃풍이란 온돌방식의 난방이 안고 있는 약점이었다. 한옥에서 창문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아주 작고, 방문도 허리를 구부리고 드나들 정도로 작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방바닥만이 아니라 방 안 전체를 따뜻하게 하려면 방의 면적을 작게 하고 지붕의 높이도 낮추어야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집의 방 크기가 작게 된 원인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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