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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姜世晃)은 1713(숙종 39)~1791(정조 15)년의 인물로 조선 후기의 문인 서화가이자 평론가이다. 본관은 진주(晋州) 로 61세가 되던 해 영조의 배려로 처음 벼슬길에 올랐으며, 64세에 기로과에, 66세에는 문신 정시에 수석합격하였다. 관직으로는 영릉 참봉, 사포 별제, 병조 참의, 한성부 판윤 등을 두루 거쳤다.

시, 서, 화 삼절(三絶)로 일컬어졌으며, 남달리 높은 식견과 안목을 갖춘 사대부 화가로서 스스로 그림 제작과 화평 활동을 통해 당시 화단에서 '예원의 총수'로서 중추적인 구실을 하였는데, 특히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의 정착에 크게 기여하였다. 진경산수의 발전, 풍속화, 인물화의 유행, 새로운 서양화법의 수용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보물 590-2호 강세황 초상/ⓒ한국학중앙연구원


보물 590-2호 강세황 초상은 강세황의 기로신(耆老臣, 조선시대 나이가 많고 품계가 높은 문신을 예우하여 부른 명칭) 임명을 기념하여 화원 이명기가 그린 71세 때의 초상으로 깊게 패인 주름과 흰 수염, 굳은 정신이 드러나는 눈동자 표현 등 인물의 세사한 사실적 표현을 통해 내면을 전달하는 전신(傳神)의 경지를 보여주는 그림이다. 화원 이명기는 서울 회현동의 강세황의 집에서 열흘 만에 강세황의 초상 세 점과 맏아들 강인의 초상을 완성하였으며 공임으로 열 냥을 받았다고 한다. 이 초상을 두고 강세황의 셋째아들인 강관(姜寬)은 "정신과 마음을 흡사하게 그려내어 털끝만큼의 유감도 없다."고 하였다. 또한 초상의 제작과정도 강관이 기록한 '계추기사(癸秋記事)'에 잘 남아있다.

화원 이명기는 본관은 개성, 호는 화산관(華山館)으로 당시 서양화의 음영법을 응용한 사질적이이면서도 기품 있는 초상화로 이름이 높았다. 도화서 화원으로 활동했고 찰방 등의 벼슬을 지냈으며, 1971년 정조어진을 그릴 때 주관화사로 활약하였고, 1796년에는 단원 김홍도와 '서직수초상(徐直修肖像, 조신 후기 문신 서직수 초상화, 보물 제1487호)을 그리기도 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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