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러셀은 이 사회가 우리에게 선사한 독단적인 죄의식에 쓸데없이 시간을 할애하지 않았다. 아무도 해치지 않는 일, 가령 욕지거리 같은 걸 두고 진 빠지게 걱정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다.

 

이따금 한 두 가지 법에 금이 가게 하는 건 죄가 아니다.
아예 산산조각내지 않는 한.
-메이 웨스트(Mae West)

 

러셀은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신의 존재, 또는 신의 부재를 두고 끝없이 고민했다. 그에게는 기독교가 개인의 행복으로 가는 경로가 아니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러셀은 자기 믿음의 근거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독교는 인간이 죄인이라는 의식을 숨 막힐 정도로 많이 심어준다. 반면에 인간이 가치 있는 존재라는 의식을 전해주는 데는 지나치게 인색하다.

 

러셀의 생각은 이러하다. 우리가 언제 죄를 짓는지 말해주며 죄책감 내지는 후회가 잔뜩 밀려오게 하는 양심이란 것이 우리에게 내재해 있다고 생각하는 건 비논리적인 사고다. 결국 이 비논리적인 생각 때문에 우리가 하는 많은 일들이 아무 이유 없이 불행의 근원이 되고 만다.

 

간단히 말해 그가 말하는 요지는, 우리가 소위 '양심'이 보편적이지 않다는 점을 경험을 통해 알게 되므로 양심이 무엇인지 어디서 기인하는지를 주재하는 보편적 결정권자도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러셀이 생각하기에, 우리가 양심이라는 이름표를 붙여놓은 것은 몇몇 감정의 혼합물이다. 발각될 것 같은 두려움, 또는 무리에서 추방될까봐 갖는 두려움이 여러 감정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다. 가령 아무 건설적 이유도 없이 거짓말하거나 물건을 훔치고픈 유혹이 생긴다면 양심이 유용한 메커니즘으로 작동할 것이다. 그러나 러셀이 매우 언짢아하는 죄의식은 '눈에 띄는 자기 성찰의 이유'가 없는 곳에 있다. 우리가 뭘 잘못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죄책감을 느낀다는 건 아는, 그런 막연한 상황 말이다.

 

욕설을 살펴보자. "X새끼"라고 말하는 것에는 일반적으로 죄책감이 뒤따르지만 별 걱정 없이 누군가에게 "이런 개나리를 봤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자의적이다. 'Wanker'라는 말은 미국에서는 잘 쓰이지 않으니 거술리지 않지만, 영국에서는 '재수 없는 새끼, 모자란 놈' 같은 뜻으로 쓰이는 공격적인 금기어다. 영화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보면 우주에서 가장 모욕적인 말이 사실은 '벨기에(Belgium)'라고 한다.

 

금기시되는 단어의 수는 나라마다 다르다. 어찌 됐든 우리 대부분은 가끔씩 욕을 할 것이다. 날것대로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다른 이들과 심리적 유대를 맺기 위해, 신뢰의 신호를 보내고 불안감을 위장하기 위해 우리는 욕을 한다. 그러나 일종의 대가를 치르면서 욕지거리를 내뱉는다. 우리가 끊임없이 되새기는 도덕률을 위반할 때 따라오는 죄책감과 일탈 의식이 바로 그 대가다. "이건 정말 지독하게 어리석은 생각"이라고 말하는 러셀의 의견에 어쩌면 동의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불쾌해하고 화를 낸다면 굳이 대놓고 욕을 해야만 할까? 이에 대한 러셀의 처방전은 다음과 같다.

 

당신이 좋아하는 욕을 다 하라. 그리고 욕을 한 것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 대신 다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 걱정하라. 예를 들어 아마 큰고모는 당신의 언어 선택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 큰고모가 계시는 동안에 말을 적당히 가려 한다면 사려 깊은 행동이 될 것이다. 그래도 당신의 언어 선태개에 죄책감을 느끼지는 말라. 큰고모가 당신보다 더 우위의 도덕성을 지녔다고 생각할 이유도 없다. 큰고모는 다른 언어를 사용해 자신의 생각을 설명하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다.

 

2개 국어를 하는 사람들이 종종 사용하는 적응의 기술은 욕을 하는 것이다. 예컨대 영국에 있으면서 스페인어로 욕하기, 스페인에 살면서 영어로 욕하기처럼 말이다. 기분이 상한 사람들 사이에서 욕을 하고 싶다면 자기만의 욕설 용어를 만들어내라. 자기만 그 뜻을 아는 말로 만들면 된다.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다.

(러셀의 행복 철학 中)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