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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에는 평민들도 서당을 꾸리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도 후기 조선사회로 접어들면서 서당 교육을 평민도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서당은 학동들의 신분에 따라 양반 서당과 상놈 서당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향교에서도 동재(東齋)에는 양반 출신 유생만 드나들 수 있었고, 서재(西齋)에는 평민 출신 교생만 드나들 수 있었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지긴 했지만 어쨋든 조선 말기에는 평민들도 서당을 꾸리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평민들의 문자 인식률 또한 높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신분에 따른 한계는 여전히 높았다.

 하지만 서당의 교사인 훈장에 대한 예우가 매우 열악했고, 평민 서당은 공간문제나 평민들의 미약한 재정능력 등으로 인해 사실상 오래도록 존속되기는 힘들었다. 또한 평민 출신이 서당 공부를 계속 이어간다고 해도 과거급제를 통한 높은 벼슬이나 학문에 종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에 공부의 목표가 대부분 실용문 작성 대행, 면장(面長) 정도로 축소되거나 훈장 노릇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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