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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234-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금동불입상'은 전라북도 익산시 왕궁면 왕궁리 오층석탑에서 출토된 9세기 통일신라시대 유물로 높이 17.4cm 크기이다.

대좌와 함께 주조한 금동불에 얇게 투각한 당초무늬 그리고 불꽃무늬의 거신광배(擧身光背, 불상의 윤곽에 따라 광배를 표현한 것, 전신광배라고도 한다.)를 결합한 형식으로 제작되었다.

광배까지 한 묶음으로 온전하게 전하는 통일신라 말의 불상은 흔치 않은데, 출토지가 후백제 영역이었던 익산 왕궁리인 점에서 제작시기를 비롯한 발원자의 문제 등 여러 가설이 제기되는 불상이다.

전체 형태를 보면 육계(肉髻, 부처의 머리 위에 볼록 올라온 머리 모양, 원래는 인도의 성인(聖人)들이 긴 머리카락을 위로 올려 묶었던 형태에서 유래한 것으로 지혜를 상징한다.)가 아주 크고 얼굴이 둥굴넙적한 형태이며, 이목구비가 분명하면서 귀기 길어 어깨 부분까지 내려와 있는 형태에 콧수염이 새겨져 있는 독특한 형상을 하고 있다.

둥굴넙적한 얼굴은 토착화되어 표현되었으며, 신체의 비례는 상체가 지나치게 짧고 하체가 길게 표현되어 조금 부자연스러워 보인다. 한 장의 대의를 통견식으로 입었고 옷주름의 형식은 Y자형을 따랐다. 심단형식의 대좌 또한 연꽃의 입체감은 없고 선각으로 단순하게 표현되어 있다.

뒷면의 주조 구멍은 머리에는 없지만 몸 전면에서 다리까지 큼직하게 뚫려있는데, 내부의 주물이 매우 거칠다. 목 아래에는 광배를 끼웠다 뺐다 할 수 있도록 촉이 달려 있다.

국보 123-4호 익산 왕궁리 오층석탑 사리장엄구-금동불입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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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127호 '금동관음보살입상(金銅 觀音菩薩 立像)'은 7세기 삼국시대 것으로 서울특별시 성북구 삼양동 산 108에서 출토되었다.

이 금동관음보살입상을 통해 7세기 전반 우리나라에 관음 신앙이 존재했음을 증거하는 중요한 자료로써의 가치가 큰 유물이다.

불교에서 관음 보살은 자비를 상징하는 보살로 삶의 고통에 신음하는 중생을 모든 고통에서 구제하고 복을 가져다 주는 것으로 믿는다.

이 상의 전체적인 형태에서 보살이 쓰고 있는 관 중앙에 화불(化佛)이 있고, 정병(淨甁, 자비를 상징하는 상징적인 공양구)을 들고 있는데,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관음보살상으로 여긴다.

국보 127호 금동관음보살입상/ⓒ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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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3호 북한산 신리 즌흥왕 순수비/국립중앙박물관



국보 3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6세기 중엽 신라 진흥왕(眞興王, 재위 540~576)이 새로 확보한 영토를 친히 돌아보며 여러 곳에 세운 비석 중 하나이다.

A.D 553년에 신라는 백제에게서 한강 하류지방(경기도 하남시와 광주시 일대)을 빼앗아 '새로운 주'라는 뜻의 신주(新州)를 설치한다.

국보 3호 북한산 신라 진흥왕 순수비는 555년 10월에 진흥왕이 신주 지역을 돌아보며 이를 기념하기 위해 북한산 비봉에 세운 비석이다.

조선시대에는 이 비가 무학대사의 비로 알려졌지만, 1816년 서예가이자 금석학자인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이 비석을 조사해 진흥왕순수비인 것을 밝혀내고, 그 내용을 비석의 왼쪽면에 기록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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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88호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88호 '<백제창왕>이 새겨진 부여 능산리 터 석조사리감'은 567년 백제 유물로 능산리절터 내 목탑터 심초석 위에서 발견되었다.

사리감(舍利龕)이란 석탑 또는 왕릉과 같은 곳에 사리와 장신구 등을 넣어 보관하는 것으로 백제창왕명석조사리감은 감실의 입구 양쪽에 세로로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백체 창왕(백제 27대 위덕왕의 또다른 이름) 13년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글씨체가 중국의 북조계의 글씨체로 당시 백제가 중국의 북조와 교류했음을 증명하는 자료로 평가받는 유물이기도 하다.

사리감은 화강암을 이용해 만들었는데, 크기는 높이 74cm, 너비 가로와 세로 각 50cm이며, 감실은 높이 45cm, 너비 25.3cm, 깊이 24.5cm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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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0호 금동 당간 용두/국립중앙박물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 성내 2동 236번지에서 우연히 발견된 보물 1410호 '금동 당간 용두'는 통일신라시대 것으로 길이 80cm 크기의 유물이다.

'금동 당간 용두'는 말 그대로 당간 머리를 장식하는 용머리 장식이다. 전체 형태는 입안에 여의주를 물고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는 위풍 당당한 형태로 입안 가득 물고 있는 여의주 뒤로 줄을 거는 도르래가 감추어져 있다. 도르래에 걸린 줄이 용의 턱 아래 뚫린 구멍으로 내려져 깃발을 올리고 내릴 수 있게 고안된 구조로 통일신라 당간 용두로 매우 희귀한 예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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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343-7호 연꽃 구름무늬 벽돌/국립중앙박물관]


보물 343-7호 '연꽃 구름무늬 벽돌'은 가로 29cm, 세로 29cm 두께 4cm의 크기이다.

7세기 백제시대 제작된 것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부여읍 규암면 외리의 옛 절터에서 발견된 무늬벽돌이다.

벽돌 중앙에 원형으로 장식이 되어 있는데, 작은 원 안에 연꽃무늬를 표현했고, 연꽃 주변에 소용돌이 형태의 구름무늬를 표현했으며, 벽돌의 네 모서리 부분에도 연꽃무늬를 두어 화려하면서도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구도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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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11호, 임신서기석/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11호 '임신서기석'은 최대 높이 32cm, 최대 너비 12.3cm의 크기로 1934년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터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석의 제작연대는 비석의 비문에 새겨진 임신년(壬申年)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아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화랑도가 번창하던 552년 또는 612년 경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첫머리에 임신년(壬申年)이라는 간지(干支, 십간과 십이지를 조합한 연대표)가 있고, 별도의 구획선 없이 5행 74자를 새겼는데, 화랑도의 기본정신에 따른 충도의 실천으로 신라에 충성을 서약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므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고 명명했다.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未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해 기록하며,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이서약을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즉 시, 상서, 예기, 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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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280호 '천흥사'가 새겨진 천흥사 동종/고려/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80호 '천흥사'가 새겨진 천흥사 동종/고려/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80호 '천흥사'가 새겨진 천흥사 동종/고려/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80호 '천흥사'가 새겨진 천흥사 동종/고려/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80호 '천흥사'가 새겨진 천흥사 동종/고려/국립중앙박물관



국보 280호 '천흥사'명천흥사동종은 경기도 광주에서 출토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동종' 작품이다.

전체적으로 신라 동종 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고려시대에 나타난 새로운 양식을 보이고 있는데, 종의 꼭대기에 있는 용뉴는 종을 매달기 위해 종의 맨 위에 만든 고리이고, 바로 옆의 굴뚝 처럼 생긴 음통은 음향효과를 위해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용뉴(龍鈕)

범종에 쇠줄을 달아 매달기 위한 장치로 종의 가장 위쪽에 용의 형상을 한 고리.


신라 동종의 용뉴를 닮았지만 용두가 여의주를 물고 고개를 들고 있는 형태는 고려시대에 나타난 특징적 형식으로 볼 수 있다.

음통의 표면 역시 신라의 종처럼 5단으로 나누어 꽃무늬 장식을 하였으며, 종의 윗단과 아랫단에는 연속된 구슬무늬를 두르고 그 안에 보상당초무늬를 장식해 넣었다.

종의 몸체에는 두 개의 당좌와 비천상을 번갈아 배치했으며, 이렇게 당좌와 비천을 장식하고, 몸체에 넓은 공간을 남기는 것은 신라 이후에 나타나는 범종의 특징이다.

종의 제작시기는 몸체에 위패모양에 새겨진 글귀를 통해 '천흥사'명천흥사동종이 고려 현종 원년(1010년)에 주조된 것임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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