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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성 복원 모형/ⓒ나무위키

'삼보감통록(三寶感通錄)'에 고구려 요동성(遼東城) 옆에 있는 탑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옛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의하면 이렇다.

"옛날 고구려 성왕(聖王)이 국경을 순행하다가 이 성에 이르러 오색 구름이 땅에 드리워진 것을 보고는 구름 속으로 찾아 들어가 보았더니 어떤 승려가 지팡이를 짚고 서 있었다. 그런데 가까이 가면 갑자기 사라지고 멀리서 보면 다시 나타났다. 그 옆에는 3층으로 된 탑이 있었는데, 위에 솥을 엎어 놓은 듯하여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다시 가서 승려를 찾아보니 다만 거친 풀만 있었다. 그곳을 한 길가량 파 보았더니 지팡이와 신발이 나왔고, 더 깊이 파자 명(銘)이 나왔다. 그릇 위에 범서(梵書, 인도 문자인 산스크리트 어로 기록된 글)가 있었는데 모시고 있던 신하가 이 글을 알아보고는 불탑이라 했다. 왕이 자세히 물으니 대답했다.

'이것은 한(漢)나라 때 있었던 것으로 그 이름은 포도왕(蒲圖王, 원래는 휴도왕休屠王으로 쓰는데 하늘에 제사 지내는 부처다.)이라 합니다."

이로 인하여 성왕은 불교를 믿을 마음이 생겨 7층 목탑을 세웠고, 그 이후에 불법이 처음으로 전래되자 탑과 불도의 인연을 자세히 알게 되었다. 지금은 탑의 높이가 줄어들고 본래의 탑은 썩어 무너졌다. 아육왕(阿育王, 인도 마우리아 왕조의 제3대 왕 아소카로, 불교를 굳게 믿었으며 불교의 자취를 따라 곳곳에 탑을 세웠다.)이 통일한 염부제주(閻浮提洲, 옛 인도의 별칭인데 여기서는 인간 사회로 볼 수 있다.)에는 곳곳마다 탑을 세웠으니 이상할 것이 없다.

또 당나라 용삭(龍朔) 연간에 요동에서 전쟁이 있었다. 행군(行軍) 설인귀(薛仁貴)는 수양제가 정벌했던 요동의 옛 땅에 가서 산에 있는 불상을 보았는데, 모두 텅 비어 있고 적막하며 행인의 왕래조차 끊어져 있었다. 한 노인에게 묻자 이렇게 말했다.

'이 불상은 선대에 나타났던 것이오.'

그래서 이것을 그려서 서울로 돌아왔다(모두 '대장경'을 함에 넣고 함의 차례를 천자문의 차례로 표시한 약함若函에 기록되어 있다.).

서한(西漢)과 삼국의 '지리지'를 살펴보면, 요동성은 압록강 밖에 있으며 한나라 유주(幽州)에 속해 있다고 했다.

고구려 성왕이 어떤 임금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떤 이는 동명성제(東明聖帝)라고 하지만, 그렇지 않을 것으로 생각된다. 동명왕은 전한 원제(元帝) 건소(建紹) 2년(기원전 37년)에 제위에 올라 성제(成帝) 홍가(鴻嘉 임인년(기원전 19년)에 돌아가셨는데, 그 당시에는 한나라도 불경을 보지 못했으니 어떻게 해외의 변방 신하가 범서(梵書)를 알아 볼 수 있겠는가? 그러나 부처를 포도왕이라고 불렀으니, 서한 시대에도 필시 서역 문자를 아는 사람이 있어 범서라고 했을 것이다.

고전(古傳)을 살펴보면, 아육왕이 귀신의 무리에게 명하여 9억 명이 사는 곳마다 탑을 하나씩 세우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세워진 염부계(閻浮界, 인도를 말한다.) 안의 8만 4000개 탑을 큰 바위 속에 숨겨 두었다고 한다. 지금 곳곳마다 상서로움이 나타난 것이 하나 둘이 아닌데, 아마도 진신사리(眞身舍利)는 그 감응을 헤아리기 어렵다.

 

※다음과 같이 기린다

 

육왕(育王)의 보탑(寶塔)은 온 속세에 세워져,

비에 젖고 구름에 묻혀 이끼가 끼었구나.

그 당시 길 가던 사람들 눈길을 생각해 보면

몇 명이나 신의 무덤을 가리키며 제사 지냈을까?

-삼국유사 권제3 탑상(塔像) 요동성의 육왕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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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한 스님이 어떤 부부가 싸움을 하고는 끝내 이혼을 하고 갈라서겠다고 하자 그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자기가 잘못했다고 빌었다고 한다. 그러자 이 부부가 놀라 그 이유를 묻자 그 스님은 "세상의 인연은 모두 하나로 연결되어 있어서 당신들이 그렇게 싸우고 증오하게 된 데에는 나의 업보도 어디에선가 그 인연 줄에 닿아 뭔가 영향을 미쳐서 그렇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어찌 내가 미안해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것이 불교의 연기설의 관점이다. 그러한 스님의 생각이 삼라만상의 변화와 인생사에 대한 온전하고 진실한 관점이라고 한다면 스님처럼 그 부부에게 잘못했다고 비는 것은 당연한 이치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러한 이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우리가 남과 상관없이 나만 잘되기를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세상은 혼자서는 살아갈 수 없는 얽히고 섥힌 거미줄 같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한 스님과 부부의 일화는 오늘 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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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반가사유상/어린이문화재청 홈페이지]

 

 요즘 한국불교는 고즈넉한 산사에서 수련을 통해 심신을 치유하고 불교식 생활 등을 실제로 체험 할수 있는 이른바 '템플스테이'를 통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습니다. 한국불교만의 독특한 사상 뿐만 아니라, 음식, 건축양식 등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고 도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도 있어 템플스테이를 체험한 사람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다고 합니다. 이렇듯 한국불교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문화산업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전통문화재, 철학, 사상 등이 잘 전승되어 온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이자 대표적인 종교입니다. 이런 한국불교가 가지는 독특한 성격은 어떤 것이 있는지 한국불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한국 불교는 불교의 연기관을 받아들인 한국인들이 발전시킨 특유의 성격을 가진 불교이다.

그런데 과연 인도 불교나 중국 불교와 변별되며 한국인의 특성이 그 속에 녹아들어 있는 한국 불교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근대의 어떤 학자는 "인도와 서역의 불교는 서론적 불교이고, 중국의 불교는 각론적 불교이며, 조선의 불교가 최후의 결론적 불교이다." 라고 하였고, "인도의 원천적 불교, 중국의 분파적 불교에 대하여 한국은 원효, 보조에 의하여 최후의 회통 불교를 실현하였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일반적으로 인도나 중국, 일본과 다른 한국 불교의 특성은 일승(一乘)과 일미(一味)의 인식틀로 전개된다는 점, 즉 독창성과 더불어 종합성을 강조하는 측면에 있다고 본다. 이를 '통불교(通佛敎)'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예컨데 다른 나라 불교인들의 인식틀을 보면 자기 종파의 교설에만 충실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불교 사상가들은 불교를 받아들인 이래 어느 종파와 어느 학파에 얽매이지 않았다. 어느 종파, 어느 학파에 얽매이지 않았던 근거는 이들의 저술 목록에 잘 나타난다. 이들은 유식 불교를 신봉하면서도 천태가나 선가를 겸업했고, 또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불설에 입각한 융통성 위에서 자신의 학문적 화두를 밀고 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인도나 중국, 일본 사상가들은 자기 종파의 교설에만 충실하고 있다. 그러한 점은 그들의 교상판석의 틀에서 잘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교판으로 알려진 법상종의 3시교판에서는 요의교로서 '해심밀경'을, 천태종의 5시8교에서는 법화 열산시를, 화엄종의 5교 10종판에서는 대승원교로서 법화보다 화엄을 우위에 두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들 모두는 '가장 나중에 오는 장작이 제일 위에 오는' 것 처럼 교판을 통해 자기 종파의 우월성을 표현해 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원효는 중국의 교판가들을 향해 "만일 한쪽에만 한결같이 그렇다고 집착하면 두 설을 다 잃을 것이요, 만일 상대를 인정해 주어 자기 설만 고집하지 않으면 두 설을 다 얻을 것이다."라고 갈파한 뒤, 5시 4종으로 판석하려는 견해를 '대롱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격'이라고 비판하고 회통의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대해 서양 학자들은 이러한 한국 불교의 특성인 통불교의 '통'이나 회통불교의 '회통'이 "당신들이 즐겨먹는 비빔밥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불교의 특징은 다양한 개체들이 물리적으로 결합된 비빔밥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삼투된 곰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곰탕은 돼지나 소의 뼈와 살과 양념들이 모여서 무수한 시간 동안 끓는 물속에서 화학적 고투를 거쳐 우러나온 것이다. 이러한 일승과 일미의 인식틀 위에서 정립된 종합성과 독창성이 바로 한국 불교의 특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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