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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학교에도 원활한 운영을 위한 교칙이 있듯 옛날 서당에도 학규가 있었다.

 

서당은 현실적으로 한자를 익히고 한문을 해독하기 위해 설립한 교육기관이지만, 향촌사회에서 서당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교육목표는 인륜을 밝히고 예법을 널리 보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학규에는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기 마련이었다. 조선시대 유학자의 문집 가운데에는 당시에 실제로 시행했거나 혹은 시행하기 위해 제정한 서당의 학규가 많이 실려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쓴 <남계서당학규(南溪書堂學規)>이다.

조선 중기 문신 남계 박세채 초상(유복본)/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3호/ⓒ경기도박물관
조선 중기 문신 남계 박세채가 작성한 <남계서당학규(南溪書堂學規)>

<남계서당학규(南溪書堂學規)> 서당 학규의 요점

1. 서당의 입학은 독지향학(篤志向學)한 자로서 늘 내독(來讀)하는 자를 허입(許入)하되 현족미품(顯族微品)을 가리지 않는다.
2. 거처에는 반드시 연장자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하고 10세 이상 연장자가 출입할 때 소자(少者)는 반드시 기립한다.
3. 언어는 반드시 신중하고 예법과 문자에 관한 말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음설패란(淫䙝悖亂)하거나 신괴(神怪)한 일들은 말하지 않는다. 타인의 과오나 조정주현(朝廷州縣)의 득실은 말하지 않는다.
4. 성현의 성리서가 아니면 피람(披覽)할 수 없다. 다만 사서(史書)는 열람할 수 있으나 이단(異端) 및 과거문자(科擧文字)는 일체 입당(入堂)을 허락하지 않는다.
5. 사장(師長, 스승과 어른)이 강당에 있으면 복상복(服上服)하여 앞에 나아가 배례(拜禮)하고 사장은 좌상(座上)에서 부수(俯手)하여 답한다.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

이 학규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 즉 입학과 공부방법에 대한 규정 및 서당에서 지켜야 할 생활수칙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입학에 대한 규정은 "공부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을 선택해서 입학시키되 그 출신에 구애받지 말라"고 되어 있다. 수학할 의지만 있다면 현족(顯族)뿐만 아니라 한미한 사람(微品)까지도 서당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향촌사회에서 유교적인 인륜을 밝히고 예법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는 서당에 출입하는 계층을 양반만으로 국한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좀 더 넓은 층이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학규를 이와 같이 제정한 것이다.

 

학습과 관련된 규정들은 매우 구체적이다. 우선 "성현의 성리학 책이 아니면 펴보지도 말고 이단서(異端書)는 아예 서당에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고 하여 서당에서 학습해야 할 책들을 성리서로 제한하였고, 불서(佛書)나 제자백가(諸子百家)에 관한 책은 아예 서당에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했다. 서당에 출입하는 학동들이 어리기 때문에 이단서를 읽으면 그 사상에 쉽게 빠져들 것이라고 판단했기 대문이다. 사서(史書)는 성리서가 아니지만 지나온 역사를 알기 위해 읽도록 권장하였다. 또 "종일 책을 읽되 조금이라도 의문 나는 곳이 있으면 즉시 질문하고 모르는 것을 지나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여 책의 내용, 즉 성혀느이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학문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서당에서 지켜야 할 생활수칙도 매우 엄격했다. "삭망에는 훈장에게 재배례(再拜禮)를 행한 후 동서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읍례(揖禮)를 행하라"고 하여 훈장과 동료에게 언제나 예의를 갖추도록 권장하였다. 서당생활은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동료 상호간의 존경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음담패설이나 신비롭거나 괴이한 이야기 및 조정과 군현(郡縣)의 득실(得失)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규정도 있었는데, 이는 세속화를 막으려는 조처였다. 특히 조정과 군현의 득실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게 한 것은 서당이 서원과 같이 정치성 짙은 기구로 변모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제정한 규칙이었다. 또 "편한 곳은 연장자에게 양보하고 열 살 이상의 연장자가 출입할 때 연소자는 반드시 기립하라"든지 "식사할 때에는 나이순으로 조용히 앉아서 하되 항상 배부름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 등은 여러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인 서당에서 학동들 간에 일어날 수 있는 세부적인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면서 서당의 원만한 운영을 위한 규칙이라는 점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함께보기 : 서당 교육의 내용과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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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백범일지>/ⓒ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백범일지>는 백범 긴구가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 하 2권으로 되어 있다. 김구가 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틈틈이 써놓은 친필원고라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임시정부의 역할 등 독립운동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조선 말기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도 유용한 사료이다. 1947년 12월15일 국사원에서 처음 김구의 아들 김신에 의해 초간발행을 필두로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10여본이 출판사를 통해 중간되었다.

 

조선시대에 크게 성행했던 서당의 모습을 그 말기에, 그것도 '상놈'이 쓴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일반적으로 서당은 양반의 자제들이 향교나 서원에 가기 전에 학습했던 사설 교육기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상놈이 쓴 기록이란 바로 김구(金九, 1876~1949)의 <백범일지>를 가리킨다. 김구는 평민 출신의 어느 한 노인이 양반들이 쓰던 말총갓을 쓰고 출타하였다가 양반에게 들켜 갓을 찢기는 봉변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서 양반과 평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어른들에게 물었다. 어른들은 글공부를 해서 과거에 합격하면 양반이 된다고 대답하였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 아니지만 어른들은 어린 김구에게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김구는 어떻게든 공부를 해서 과거에 합격하고 싶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했다. 아버지께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님은 주저하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어서 다른 동네 서당에 다녀야만 하는데, 양반의 서당에서는 나 같은 상놈은 잘 받아 주지도 않거니와, 설혹 받아 준다고 해도 양반의 자식들이 업신여길 터이니 그 꼴은 차마 못 보겠다는 것이다. 아버님은 집안아이들과 이웃동네 상놈친구의 아이들 몇 명을 모아 새로 서당을 하나 여셨다. 수강료는 가을에 쌀과 보리를 모아 주기도 하고, 청수리 이 생원이라는 분을 선생으로 모셔 왔다. 이 생원은 신분은 양반이지만 글공부가 모자라 양반 서당에서는 써 주는 데가 없어서 우리 선생으로 오신 것이다.

이러한 김구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서당에 대한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서당에 출입하는 학동들의 신분에 따라 양반 서당과 상놈 서당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이다. 서당이 이와 같이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양반 서당에 상놈 학동이 다닐 수 없었고 평민 서당에 양반 학동이 드나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 후기 향교의 상황과 유사하였다. 향교의 동재(東齋)에는 양반 출신의 유생만 출입하고 서재(西齋)에는 평민 출신의 교생만 드나들었으며, 설령 결원이 생겨도 상대의 재(齋)에 드나들려 하지 않았다. 서당이나 향교 모두 신분을 철저히 따져 출입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조선 말기에는 평민들도 마음대로 서당을 꾸리고 글공부를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평민들이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는 것이 말기에야 비로소 시작된 것은 아니다. 평민들이 서당에서 글공부를 한 것은 조선 중기 이후 어느 시점부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평민들도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다는 것은 조선시대 평민들의 문자 인식률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위 인용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김구가 이미 서당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익혀서 소설책을 읽을 줄 알고 천자문도 동냥글로 다 떼었다는 사실이다. 평민들도 어린 나이에 한글을 익히고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셋째, 훈장에 대한 예우가 열악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사회가 농업사회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지만, 일 년의 학채(學債)를 쌀과 보리로 주었으며, 그것도 가을에 한 차례 모아서 지급했다는 사실을 통해 당시 훈장에 대한 예우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만일 흉년이 들면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기 대문에 나중에 받기로 한 학채는 지급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평민 서당의 학부모들은 대부분 가난하여 저축해 놓은 자금도 없었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학채를 받아 낼 길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사실은 이러한 평민 서당이 오래 존속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학동들이 모여서 공부할 장소 마련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지원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김구의 증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우선 우리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우리 집에서 선생의 식사를 받들어 모시기로 했다. -중략- 우리집에서 석 달을 지내고 나서 산동(山洞) 신존위(申尊位)의 집 사랑으로 글방을 옮겼다. -중략- 그런데 불과 반년 만에 신존위와 선생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결국 그 선생님을 내보내게 되었다.  선생님이 밥을 너무 많이 자신다는 것이 쫓아낸 이유였다. 그러나 사실은 (신존위가) 자기 자식은 머라가 나빠서 공부를 못하는데 내 공부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시기한 것이었다. -중략- 참으로 이른바 상놈의 생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서당은 처음에 김구의 집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선생의 식사를 그의 집에서 제공하기로 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겨우 석 달이 지나서 신존위의 집 사랑으로 옮겨지고 불과 반년 만에 신존위와 선생이 반목하여 서당 운영이 끝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김구나 신존위 등을 비롯한 평민 집안의 경제적 여건이 제대로 된 강학(講學) 공간을 마련할 수 없었으며, 동시에 학채는 고사하고 훈장의 숙식조차 제공하기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재력이 있어야만 강학공간을 마련하고 훈자으이 숙식을 제공하며 학채도 지급할 수 있는데, 평민들의 재력이 매우 부실했기 때문에 설령 한때 서당을 설립한다고 해도 장기간 운영되지 못하고 단기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실정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상놈 출신이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과거에 급제한 후 관리가 되거나 학문에 종사하여 대학자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평민들은 중도에서 공부의 목표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은 이따금 내게 이렇게 충고하셨다. "-중략-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이나 배우거라" 그리하여 나는 땅문서 짓기, 소장(訴狀) 쓰기, 축문 쓰기, 혼서문 쓰기, 편지 쓰기 등을 짬짬이 익혀서 무식한 우리 집안에서느느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문중에서는 내가 장차 존위 한 자리는 하리라고 기대했다.

김홍도의 '서당'/ⓒ국립중앙박물관

비록 출발은 과거에 합격해서 양반이 되고 가문의 명성을 떨치려는 목표에서 시작했으나 어려운 교육환경 아래에서는 그것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유서필지(儒胥必知)>에 나오는 것과 같은 아전 글(吏文)이나 익혀서 토지매매 문서와 소장, 축문이나 혼서 등 실용문을 서 주고 '시골에서 이름난 문장'으로 행세하다가 존위, 즉 면장(面長)이라도 한 자리 차지하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현실적인 여건이 이와 같이 열악했지만 그래도 재능이 있으면 나름대로 성공할 수도 있었다. 다음은 <백범일지>에 나오는 그러한 사례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좋은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못되자 아버님이 무척 걱정을 하셨다. 그러던 중 마침 글공부할 길이 하나 열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쪽으로 십 리쯤 되는 학명동(鶴鳴洞)에 정문재(鄭文哉)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이지만 과거하는 글로는 지방에서 알아주는 선비였고, 더구나 큰어머니와는 6촌 남매간이었다. -중략- 그의 집에는 여러 곳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시와 부(賦)를 짓고, 한쪽에는 서당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정문재는 재능을 기반으로 소기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재능 있는 평민이 제아무리 뛰어 보았자 그와 같이 훈장질하는 것이 최상이었다. 평민들이 오를 수 있는 '성공의 사다리'는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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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서당의 모습/ⓒ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

서당은 서원과는 달리 관으로부터 설립허가를 얻어야 하는 기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백범일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설치가 자유로웠다.

집안이 가난하여 좋은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못되자 아버님이 무척 걱정을 하셨다. 그러던 중 마침 글공부할 길이 하나 열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쪽으로 십 리쯤 되는 학명동(鶴鳴洞)에 정문재(鄭文哉)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이지만 과거하는 글로는 지방에서 알아주는 선비였고, 더구나 큰어머니와는 6촌 남매간이었다. -중략- 그의 집에는 여러 곳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시와 부(賦, 작자의 생각이나 눈앞의 경치 같은 것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한문문체)를 짓고, 한쪽에는 서당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백범일지 中-

수요자의 필요에 따라 언제든지 자유롭게, 다양한 수준의 서당을 설립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으나, 설립주체나 운영방식에 따라 구분하면 대략 다음의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훈장 자영(自營) 서당'으로, 훈장이 소일거리나 생계 유지를 위해 자신의 집에 개설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서원은 대부분 이른바 '촉학구(村學究)' 도는 '궁생원(窮生員)'이라 불리는 시골의 선비들이 설립하였다. 이들은 경제적으로 빈한한 처지에 있었기 때문에 학동들로부터 일종의 수업료인 학채를 쌀이나 나락, 또는 곡물이나 돈으로 받았다. 이들은 학동을 가르치는 일이 없을 때에는 마을사람들의 소장(訴狀)이나 편지를 대신 써 주고 그 대가를 받아 생활하기도 했다.

 

둘째, '유지 독영(獨營) 서당'으로, 유지나 부자가 자신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해 훈장을 초빙하고 그에 다른 경비 일체를 부담하는 형태이다. 이러한 경우에는 자제 교육을 위해 많은 경비를 들이면서 '독선생'을 초청하였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훈장의 학식이나 교육경력이 출중했다. 흔하지는 않지만 이때 제한적으로 서당을 개방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일가친척이나 인근의 자제들에게는 '어깨너머 공부' 혹은 '동냥공부'를 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서당 운영 경비를 유지나 부자 혼자서 감당하지 못할 경우에는 서너 명이 협동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이는 유지 독영 서당의 한 변형으로 볼 수 있다.

 

셋째, '마을 공영(共營) 서당'으로, 마을 전체의 구성원이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서당을 설립하고 훈장을 초빙하는 형태이다. 서당 운영을 위해 학계를 조직하여 기금을 조성하고 학전을 구입하여 여기에서 나오는 소출로 서당을 운영하였다. 마을에 동계(洞契)가 조직되어 잇을 경우, 굳이 학계를 조직하지 않고 동계에서 직접 서당 운영을 담당하기도 했다. 훈장을 초빙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마을의 원로 중에 학식이 높은 인물이 있을 경우에는 그를 선정하기도 했다. 마을에 거주하는 호수(戶數)가 많지 않거나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할 경우에는 인근의 서너 마을과 합동하여 서당을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는 마을 공영 서당의 한 형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넷째, '문중 공영 서당'으로, 문중이 주도하여 서당을 운영하는 형태이다. 따라서 서다으이 학동은 문중의 자제들로만 구성되었으며 운영에 필요한 경비는 모두 문중에서 지출하였다. 조선 후기에 문중이 크게 번성하면서 이러한 형태의 서당이 성행하였다. 훈장은 위의 '마을 공영 서당'처럼 대부분 외부에서 초빙하였으나 문중 구성원 중 학식이 뛰어난 원로가 있을 경우에는 그를 추대해서 학동들을 가르치도록 했다. 한 가정에서 아버지나 할아버지가 아들이나 조카 및 손자를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서당도 있으나, 이러한 경우 대부분 친척의 자제들도 함께 배웠기 때문에 이는 '문중 공영 서당'의 한 형태로 볼 수 있다.

 

다섯째, '관립(官立) 서당'으로, 관의 자원에 의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형태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학교를 진흥시키는 것(興學校)'은 수령이 관심을 쏟아야 할 7가지 업무(守令七事) 중 하나였는데, 조선 후기의 수령 중에는 백성의 교육에 남다른 관심을 가진 인물이 많았다. 이들은 향교와 서원뿐만 아니라 서당에까지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이러한 서당은 수령이 교체된 후 후임수령이 이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으면 곧바로 운영이 어려워져 폐쇄되고 말았다. 향촌의 사족과 수령이 함께 설립한 반관반민(半官半民) 성격의 서당도 있었으나 이는 '관립 서당'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외에도 학문에 뜻을 둔 몇 명의 선비들이 모여 독서와 강학 및 토론의 공간으로 서당을 설립하는 경우가 있었다. 예컨대 김장생(金長生, 1548~1631)의 문인(門人) 송흥주(宋興周), 최명룡(崔命龍) 등이 황산(黃山)에 서당 몇 칸을 지어 강학하는 장소로 삼았던 것이라든지, 정온(鄭蘊, 1569~1641)의 아버지인 정유명(鄭惟明)이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과 함께 역천서당(嶧川書堂)을 지어 학문을 연마하는 곳으로 삼았던 것 등이 그러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서당은 초등교육을 위해 만들었다기보다 이미 상당한 수준에 도달한 학자들이 강학공간으로 마련한 것이었기 때문에 위의 구분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국가기록원

다음으로 서당의 구성에 대해 살펴보면, 서당의 인적 구성은 훈장과 접장(接長) 및 학동으로 이루어진다.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 후기에는 매우 다양한 서당이 존재했기 때문에 훈장의 학문 수준 또한 천차만별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훈장의 수준은 그다지 높지 않았다. 경(經) 사(史) 자(子) 집(集)에 두루 통달한 훈장은 거의 드물었으며, 언해(諺解)를 보고서 경전의 대강의 뜻을 겨우 설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훈자으이 출신신분도 다양하여 몰락한 양반과 평민 출신의 유랑 직식인이 대부분이었고, 심지어는 도망노비 출신도 종종 있었다. 따라서 훈장에 대한 대우가 형편없었으며, 경우에 다라서는 멸시나 놀림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훈장의 대우에 대해서는 다음의 탄원서를 통해서도 쉽게 확인해볼 수 있다. 탄원서는 충청도 홍산현(鴻山縣) 내산내면 저동리에 사는 박영식(朴永植)과 한인교(韓仁敎) 등이 1884년에 수령에게 제출한 것이다.

사인(士人) 김양렬(金養烈)은 나이가 50세로 아내를 잃고 홀아비로 살면서 어린 아들을 거느린 채 사방을 떠돌아다니면서 글을 가르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희들이 아이들을 가르치려고 금년 봄에 그를 우리 마을로 초청해서 일 년 동안 아이들을 가르치느라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 대가로 받은 곡식(舌耕)은 겨우 나락 5가마에 불과했는데 그는 이를 잘 아는 제자의 집에 유치해 두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이번 봉고(封庫, 지방관의 비위 사실을 확인한 뒤 창고를 봉하는 제도)할 때 감관(監官)과 색리(色吏)가 관의 명령을 받고 집집마다 수색하다가 이 나락 5가마를 발견하고서 압류하여 봉고하고서 읍내로 가버렸습니다. 이는 전무후무한 일대 변괴입니다. 홍산(鴻山)이 비록 땅이 좁고 가난한 고을이라고 하지만 어찌 꼭 가난한 선비의 양식을 압류해야 만족하겠습니까? -중략-
진대(賑貸, 관곡을 어려운 백성에게 꾸어주던 것)를 받아야 할 이때에 오히려 글을 가르치고 받은 나락 5가마를 빼앗아 봉고하니, 저 슬프고 가난한 선비가 굶주림의 구렁텅이로 떨어지는 것을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중략- 저희들은 그 사람에게 아이들의 교육을 부탁했기에 차마 그가 굶주림 때문에 떠돌이생활을 하는 것을 좌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절박한 사연을 수령님께 사실대로 하소연하니 봉고한 나락 5가마를 즉시 지급해 주시기 바랍니다.

방영식 등은 자신의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양반 출신의 김양렬을 훈장으로 맞아들였다. 그는 50세의 홀아비로 자식까지 딸려 있었으나 먹고살기 위해 훈장 노릇을 하느라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고 있었다. 그가 일 년 내내 학동을 가르치고 받은 대가는 겨우 나락 5가마였는데, 그것조차도 별감과 색리의 착오로 관에 몰수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학부모인 박영식 등이 수령에게 타원서를 제출하여 몰수된 나락 5가마를 훈장에게 돌려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런데 위 탄원서에 훈장노릇을 하는 것을 설경(舌耕), 즉 '혀로 밭을 간다'고 표현하고 있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사람들이 훈장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 준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은 남에게 글을 가르치고 그 대가로 돈을 받는 행위를 수치로 여겼다. 돈을 받고 남을 가르친다는 것을 글을 파는 행위, 즉 천(賤)하기 짝이 없는 상업행위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농업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었다. 그래서 부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기 위해 '혀로 밭은 간다'고 표현했으며, 수업료인 '학채'나 '강미(講米)'도 '폐백(幣帛)'이라 칭했던 것이다.

 

훈장에 대한 인식이나 대우가 이와 같았기 대문에 자연히 훈장에 취임하는 인물의 학식이나 인품이 탁월할 수 없었다. 그저 그런 인물들이 훈장역할을 했던 것이다. 그렇다 보니 학동들의 눈에도 훈장이 훌륭해 보이지 않았다. 김구는 어린 시절 그를 가르쳤던 훈장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한 바 있다.

열네 살이 되고 보니 만나는 선생이 대개 고루해서 내 마음에 차지 않았다. 아무개 선생은 '벼 열 섬짜리', 아무개 선생은 '다섯 섬짜리' 하고 수강료가 많고 적은 것으로 선생의 할격을 짐작했다. 어린 내가 보기에도 선생들의 마음 씀씀이나 처신이 남의 스승이 될 자격이 없어 보였다.

훈장 아래에는 오늘날의 조교 또는 보조교사의 역할을 하는 접장이 있었다. 물론 모든 서당에 접장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규모가 큰 서다으이 경우, 훈장 한 사람이 많은 학동의 교육을 모두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제자 가운데 우수한 자를 접장으로 선발하여 초보 학동의 지도를 맡겼던 것이다. 접장은 학동들이 게으름을 피우거나 과제를 해 오지 않았을 경우에 훈장을 대신해서 이들을 체벌할 수 있는 권한도 있었다. 따라서 접장은 한편으로는 훈장으로부터 수업을 받고 다른 한편으로는 초보 학동의 지도를 담당하였다. 일반적으로 접장에게는 보수가 지급되지 않는 대신 수업료가 면제되었다. 이들은 초보 학동들에게 선생님이자 동문 사형(師兄)이었기 대문에 초보 학동에게 미치는 영향이 훈장보다 큰 경우가 많았다.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국가기록원

학동들의 연령층이나 계층은 매우 상이하였다. 일반적으로 양반 서당에는 양반 자제만이 출입하였으며 평민 서당에는 평민 자제만 입학하였다. 평민이 양반 서당에 다닐 경우, 양반층 자제의 텃세에 견디기 힘들었다는 사실 또한 <백범일지>에 잘 나타나 있다. 양반 자제는 평민 서당에 출입조차 하지 않으려 했다. 자신들의 체모가 손상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서당에 출입하는 학동들의 연령은 매우 다양하나 7~8세에 입학하여 15~16세에 마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선비였던 구상덕(仇相德, 1706~1761)이 농사와 농촌에서의 일상생활을 37년간 빠짐 없이 기록한 일기책인 <승총명록>을 살펴보면 '생원'이라 불리던 중장년도 서당에 출입하였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글 공부할 마음이 간절했다. 아버지께 서당에 보내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님은 주저하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어서 다른 동네 서당에 다녀야만 하는데, 양반의 서당에서는 나 같은 상놈은 잘 받아 주지도 않거니와, 설혹 받아 준다고 해도 양반의 자식들이 업신여길 터이니 그 꼴은 차마 못보겠다는 것이다.
-백범일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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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연령층은 7~8세 이상의 유소년부터 중장년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어린 학동들이었다. 이들은 연령상 한창 놀이를 즐길 나이이므로 학습보다는 놀이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은 인류학자인 윤학준(尹學準)의 어린 시절 추억담인데, 그는 일제강점기에 할아버지를 훈장으로 모시고 가숙(家熟)에서 '천자문'을 배웠다고 한다.


대관령서당 선생님과 학생들 기념 촬영(1959)/ⓒ국가기록원


저녁 무렵 아이들은 옆집 마당에서 '진 뺏기 놀이'에 열중해서 함성을 지르며 놀고 있는데, 그 고함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면서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글을 읽어야 한다는 것 또한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마음은 콩밭에 가 있어서 글이 머리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의 벼락은 떨어졌고, 회초리가 날아오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이런 어린 학동들의 관심을 공부로 유인하기 위해 흥미를 유발하는 여러가지 놀이가 동원되었다. 그중 하나가 '글자 찾기 놀이'인데, 이것은 '천자문' 등을 통해 이제 막 글자를 익혀가는 어린 학생들의 놀이 중 하나였다.


두 사람 이상 복수의 개구쟁이가 책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는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면서 과(戈)나 식(式) 따위의 (삐침이 비슷한) 글자를 누가 먼저 가장 많이 찾아내는가 하는 놀이이다. 순간적인 승부이기 때문에 자못 시끄럽다. 이 '삐침' 찾기 놀이에 싫증이 나면 이번에는 같은 글자가 나란히 있는 것을 찾는 놀이를 한다. 이 놀이의 경우에는 모양은 비슷하나 다른 글자, 가령 강(岡)자와 망(罔)자가 나란히 있는 것을 짚었을 때는 페널티가 붙는다.


삐침이나 한자의 부수가 같은 글자 찾기와 유사하나 뜻이 다른 글자 찾기는 놀이를 통해서 글자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다. 이는 앞으로 사서삼경과 같은 경전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미처 익히지 못한 글자를 자전(字典)이나 옥편(玉篇)에서 찾아야 할 때 매우 손쉽게 찾기 위한 학습방법 중의 하나였다.


학습과 관련된 본격적인 놀이로는 '초(初) 중(中) 종(終) 놀이'가 있었다. 학동 서넛이 짝이 되어 한 학동이 옛사람의 시구(詩句) 한 구절을 소리 높여 읊으면 다른 학동이 이에 호응하여 대구(對句)를 찾아내는 것으로, 시 창작에 도움이 되는 놀이였다. 또 '화승작(火繩作)'이나 '각촉부시(刻燭賦詩)'와 같은 놀이도 있었다. 이것은 시간을 정해 놓고 글짓기를 겨루는 것으로, 짧은 시간 내에 글을 얼마나 짜임새 있게 잘 짓느냐를 경쟁하는 놀이였다.


학동들의 야외 수업/ⓒ대구광역시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


공부하는 데 필요한 정신 집중 강화와 체력 보강을 위한 놀이도 있었다. 정신집중 강화를 위한 것으로는 '투호(投壺)'가 있었다. 서당의 마당에 항아리를 놓고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10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화살을 항아리 속에 던져 많이 넣은 편이 이기는 것인데, 항아리에 화살을 집어넣으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원래 이 투호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향사례(鄕射禮)와 더불어 유생들이 예법을 익히고 시행하는 의식이었다. 그래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투호를 향사례와 함께 흥학(興學)의 일환으로 보고 수령들에게 이를 실시하도록 권장하였다.


체력을 보강하는 놀이로는 줄넘기와 '태격'이 있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은 새끼줄로 줄넘기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자신을 찾아와 글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에게 먼저 줄넘기를 3천 번 하도록 한 후에 글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또 일개 가문에서 전해 오는 일이기는 하지만, 전라도 김제의 어느 가문에서는 태극을 음차한 '태격'이라는 무예를 익혀 몸을 단련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놀이는 아니지만 이황(李滉, 1501~1570)의 '활인심방(活人心方)'에 나오는 도인법(導人法)은 공부하면서 생긴 심신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서당에서 널리 행해졌다.


서당의 행사로 개접례(開接禮)와 파접례(罷接禮)가 있다. 개접례와 파접례는 일종의 개강식과 종강식인데, 주로 규모가 큰 서당에서 실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접은 대략 3월에서 5월 사이에 했고, 파접은 7월 이후 날씨가 쌀쌀해지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모든 서당이 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농촌의 경우에는 일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농번기에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서당에 다니며 공부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서당의 행사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책거리였다. 책씻이(冊施時) 또는 세책례(洗冊禮)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학동들이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스승에게 감사의 표시로 떡을 해서 올리는 간단한 잔치였다. 책 한 권을 다 읽은 학동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다른 학동들도 이 날은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덩달아서 좋아했다. 다음은 어린 시절 안동에서 서당을 다닌 윤학준의 추억담이다.


나에게 도 하나의 즐거움은 가끔씩 들어오는 '책거리 떡'이다. '책거리 떡'이란 '학생'이 책을 한 권 데면 감사의 뜻으로 스승에게 가져오는 떡이다. 예부터 내려오는 관습인데, 떡이 마치 귀(耳) 모양 같아서 '귀떡'이라고도 한다. 크기도 귀만한고 속은 비어 있으며 겉에는 노란 콩고물을 입힌다. 속이 비어 있는 것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소견이 넓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도량이 있고 틀이 큰 사람이 되라는 소망이 것들어 있다.


책거리는 때가 되면 의례적으로 행하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학부모들이 학동들의 학업 성취 정돌을 확인하고 격려하며 훈장의 노고에 감사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이때 먹는 떡 하나에도 이와 같이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책거리로 송편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송편과 같이 속이 지식으로 꽉 찬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서당행사 중의 하나로 봄에 등산을 하거나 여름에 천렵(川獵)을 하기도 하였다. 정기적으로 실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봄이 되면 훈장과 학동들이 산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고 높은 곳에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 영조 대에 경상도 고성현(固城縣)에서 훈장 노릇을 하던 구상덕(仇尙德, 1706~1761)은 봄이 되면 학동들과 산에 올랐는데,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여름에는 시원한 강이나 계곡으로 물놀이를 나가 더위에 지친 신심을 회복하고 공부를 향한 의욕을 재충전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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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은 조선시대에 성행한 초급 교육기관 중의 하나였다. 서당의 기원을 무엇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고구려시대의 경당(扃堂)으로까지 소급하는 학설도 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인들은 책을 좋아하여 -중략- 저잣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여기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경당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문무교육을 겸비한 사설 교육기관이기에 이를 서당의 기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서긍(徐兢,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에서 고려로 파견돼 왔던 사절의 한 사람)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여염집들이 있는 거리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 두서너 채가 마주 보고 있는데, 백성의 자제들이 이곳에 모여 스승에게서 경서를 배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경관과 서사가 서당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의 경당과 고려의 경관과 서사가 서당의 모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서당/ⓒ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 서당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된 것은 16세기로, 사림파가 정계에 등장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동에 거주하던 김진(金璡, 1510~1560)은 1525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등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임하현(臨河縣)으로 이거한 후 부암(傅巖) 근처에 서당을 설립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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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의 곁에 서당 한 채를 짓고 자제와 고을의 어린이를 불러 모아 학령(學令, 학교에서 학생들의 활동과 수업내용, 처벌 규정을 정한 학칙)을 세우고 수업과정을 엄히 하였다. 가르치는 데 열성적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고 수십 년 하였더니 학도(學徒)의 기상이 크게 일어났고 경전을 외우는 소리가 온 마을에 가득하였다.

"


비록 짧은 기록이지만 초기의 서당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김진은 먼저 집 근처에 서당을 세우고 자기 가=문의 자제와 마을의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그가 과거 응시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문의 자제들을 교육한 것은 유학의 가르침, 즉 '수신제가 (修身齊家)'를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가르치는 일에 더욱 열성적이었고 교육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 년 동안 했더니 마침내 학도의 기상이 크게 진작되고 마을에 경전 읽는 소리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16세기 서당의 모습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양란을 겪고 난 후 정부는 재정적인 이유를 들어 관학(官學)인 향교에 교관(敎官)을 파견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서원의 활동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서당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이러한 사정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고을에는 비록 향교와 서원이 있지만 한갓 문구(文具)로만 설립되어 있을 뿐 교육방도가 크게 무너지고 시설은 형편없이 낡아 유학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공부하고자 하는 선비들은 서당이 아니면 갈 곳이 없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향촌의 사족들은 서당 설립에 열성적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도 양란 이후 무너진 향촌질서를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사족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향촌사족들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곳에서는 수령이 직접 주도하여 서당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7세기에는 향촌 사족과 수령이 적극적으로 도와 서당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양란 이후 무너진 향촌질서를 조속한 시일 내에 회복하려 하였다.


18세기가 되면 서당은 또 한 차례 변모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8세기에 들어와 향촌 곳곳에 동성(同姓)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 성씨가 특정한 마을에 터를 잡아 대대로 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에는 서당의 설립도 자연히 문중(門中) 또는 마을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문중과 마을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해 서당계(書堂契)나 학계(學契)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계(契)를 통해 기금을 조성하고, 이를 고리대로 놓아 이자를 불리든지 혹은 학전(學田)을 구입하여 거기에서 얻어지는 소출로 서당의 학채와 운영비를 조달했다. 이와 같이 18세기에는 문중 또는 마을 중심의 서당이 크게 성행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서당을 통한 교육의 수요가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중인과 평민, 천민층에까지 확대되었다. 평민과 천민들까지도 문자를 터득하여 자신의 의사와 소망을 글로 표현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수요에 발맞추어 등장한 것이 '지식을 팔아 먹고사는' 새로운 계층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몰락한 양반이거나 신흥지식층이라고 할 수 있는 평민 또는 천민 출신의 유랑지식인이었는데, 이들이 설립한 서당이 바로 '훈장 자영 서당'이었다. 훈장의 지적 수준이나 성향이 다양했기 때문에 이들이 설립한 서당의 교육수준도 각기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서당이 번성하여 한 마을에만 서너 개나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학동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서당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아무튼 19세기에는 서당이 크게 성행하였으며, '훈장 자영 서당'이 새롭게 등장하여 중인이나 평민, 천민까지도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함께보기: 조선 말기(후기) 서당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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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에는 평민들도 서당을 꾸리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도 후기 조선사회로 접어들면서 서당 교육을 평민도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서당은 학동들의 신분에 따라 양반 서당과 상놈 서당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향교에서도 동재(東齋)에는 양반 출신 유생만 드나들 수 있었고, 서재(西齋)에는 평민 출신 교생만 드나들 수 있었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지긴 했지만 어쨋든 조선 말기에는 평민들도 서당을 꾸리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평민들의 문자 인식률 또한 높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신분에 따른 한계는 여전히 높았다.

 하지만 서당의 교사인 훈장에 대한 예우가 매우 열악했고, 평민 서당은 공간문제나 평민들의 미약한 재정능력 등으로 인해 사실상 오래도록 존속되기는 힘들었다. 또한 평민 출신이 서당 공부를 계속 이어간다고 해도 과거급제를 통한 높은 벼슬이나 학문에 종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에 공부의 목표가 대부분 실용문 작성 대행, 면장(面長) 정도로 축소되거나 훈장 노릇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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