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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학교에도 원활한 운영을 위한 교칙이 있듯 옛날 서당에도 학규가 있었다.

 

서당은 현실적으로 한자를 익히고 한문을 해독하기 위해 설립한 교육기관이지만, 향촌사회에서 서당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교육목표는 인륜을 밝히고 예법을 널리 보급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학규에는 이러한 내용이 포함되기 마련이었다. 조선시대 유학자의 문집 가운데에는 당시에 실제로 시행했거나 혹은 시행하기 위해 제정한 서당의 학규가 많이 실려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가 박세채(朴世采, 1631~1695)가 쓴 <남계서당학규(南溪書堂學規)>이다.

조선 중기 문신 남계 박세채 초상(유복본)/경기도 유형문화재 제163호/ⓒ경기도박물관
조선 중기 문신 남계 박세채가 작성한 <남계서당학규(南溪書堂學規)>

<남계서당학규(南溪書堂學規)> 서당 학규의 요점

1. 서당의 입학은 독지향학(篤志向學)한 자로서 늘 내독(來讀)하는 자를 허입(許入)하되 현족미품(顯族微品)을 가리지 않는다.
2. 거처에는 반드시 연장자에게 좋은 자리를 양보하고 10세 이상 연장자가 출입할 때 소자(少者)는 반드시 기립한다.
3. 언어는 반드시 신중하고 예법과 문자에 관한 말이 아니면 말하지 않는다. 음설패란(淫䙝悖亂)하거나 신괴(神怪)한 일들은 말하지 않는다. 타인의 과오나 조정주현(朝廷州縣)의 득실은 말하지 않는다.
4. 성현의 성리서가 아니면 피람(披覽)할 수 없다. 다만 사서(史書)는 열람할 수 있으나 이단(異端) 및 과거문자(科擧文字)는 일체 입당(入堂)을 허락하지 않는다.
5. 사장(師長, 스승과 어른)이 강당에 있으면 복상복(服上服)하여 앞에 나아가 배례(拜禮)하고 사장은 좌상(座上)에서 부수(俯手)하여 답한다.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

이 학규를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 즉 입학과 공부방법에 대한 규정 및 서당에서 지켜야 할 생활수칙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먼저 입학에 대한 규정은 "공부하겠다는 굳은 의지를 가진 사람을 선택해서 입학시키되 그 출신에 구애받지 말라"고 되어 있다. 수학할 의지만 있다면 현족(顯族)뿐만 아니라 한미한 사람(微品)까지도 서당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데, 향촌사회에서 유교적인 인륜을 밝히고 예법을 널리 보급하기 위해서는 서당에 출입하는 계층을 양반만으로 국한해서는 안 되었기 때문이다. 좀 더 넓은 층이 참여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학규를 이와 같이 제정한 것이다.

 

학습과 관련된 규정들은 매우 구체적이다. 우선 "성현의 성리학 책이 아니면 펴보지도 말고 이단서(異端書)는 아예 서당에 가지고 들어오지 말라"고 하여 서당에서 학습해야 할 책들을 성리서로 제한하였고, 불서(佛書)나 제자백가(諸子百家)에 관한 책은 아예 서당에 가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엄격히 규제했다. 서당에 출입하는 학동들이 어리기 때문에 이단서를 읽으면 그 사상에 쉽게 빠져들 것이라고 판단했기 대문이다. 사서(史書)는 성리서가 아니지만 지나온 역사를 알기 위해 읽도록 권장하였다. 또 "종일 책을 읽되 조금이라도 의문 나는 곳이 있으면 즉시 질문하고 모르는 것을 지나치는 일이 없게 하라"고 하여 책의 내용, 즉 성혀느이 가르침을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학문의 지름길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서당에서 지켜야 할 생활수칙도 매우 엄격했다. "삭망에는 훈장에게 재배례(再拜禮)를 행한 후 동서로 나뉘어 서로를 향해 읍례(揖禮)를 행하라"고 하여 훈장과 동료에게 언제나 예의를 갖추도록 권장하였다. 서당생활은 스승과 제자, 선배와 후배, 동료 상호간의 존경과 신뢰가 바탕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음담패설이나 신비롭거나 괴이한 이야기 및 조정과 군현(郡縣)의 득실(得失)에 관한 이야기는 하지 말라"는 규정도 있었는데, 이는 세속화를 막으려는 조처였다. 특히 조정과 군현의 득실에 대해 언급하지 못하게 한 것은 서당이 서원과 같이 정치성 짙은 기구로 변모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에서 제정한 규칙이었다. 또 "편한 곳은 연장자에게 양보하고 열 살 이상의 연장자가 출입할 때 연소자는 반드시 기립하라"든지 "식사할 때에는 나이순으로 조용히 앉아서 하되 항상 배부름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 등은 여러 사람이 함께 생활하는 공간인 서당에서 학동들 간에 일어날 수 있는 세부적인 갈등을 미연에 방지하면서 서당의 원만한 운영을 위한 규칙이라는 점에서 눈에 띄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함께보기 : 서당 교육의 내용과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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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서 교육하는 내용은 강독(講讀)과 제술(製述) 및 습자(習字)였다. 강독은 먼저 <천자문(千字文)> <유합(類合)> <추구(推句)> 등을 통해 한자(漢字)를 익힌 후 <동몽선습(童夢先習)> <소학(小學)> 및 사서삼경(四書三經, 사서와 삼경을 이르는 것으로 사서는 논어, 맹자, 대학, 중용을 삼경은 시경, 서경, 역경을 일컫는다.) 등을 통하여 한문을 터득하도록 하였다. <천자문>을 예로 들어 강독방식을 소개해보면, 먼저 훈장이 그 첫머리에 나오는 '天地玄黃 宇宙洪荒'의 글자 하나하나를 짚어 가며 "하늘 천, 따지, 검을 현, 누를 황, 집 우, 집 주, 넓을 홍, 거칠 황" 이라고 음(音)과 훈(訓)을 함께 가르쳐 준 후 이를 통재로 해석하여 "하늘과 땅은 검고 누르며 우주는 넓고 크다"라고 뜻풀이를 해주었다. 학동은 이를 익숙해질 때까지 몇 차례 반복하여 성독(聲讀)하고, 다음 날 훈장이나 접장 앞에서 암송하여 통과되면 비로소 다음 진도가 나갔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천자문>을 모두 마치면 한문을 이해하기 위한 기본한자는 익혔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그 후에는 한문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동몽선습> 등을 읽었다. 예를 들어 그 책의 첫머리에ㅣ 나오는 "天地之間萬物之中 惟人最貴 所貴乎人者 以基有五倫也"를 학동으로 하여금 글자 하나하나의 음과 훈을 새겨 읽도록 한 후, 훈장이 토(吐)를 달아서 "天地之間 萬物之中에 惟人이 最貴하니 所貴乎人者는 以基有五倫也라"고 읽어 주고 학동으로 하여금 익숙해질 때까지 성독하도록 했다. 그 후 이 문장을 해석하여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만물 가운데 오직 사람이 가장 귀하니, 사람이 귀한 이유는 오륜이 있기 대문이다"라고 풀이해 준 후 다음 날 이 문구를 다 암송하고 해석이 틀리지 않으면 다음 구절을 공부하도록 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글자의 의미나 문장의 해석을 놓고 훈장과 학동 간에 질의응답 및 토론 등을 하였다. 암송을 위해 여러 차례 성독하였는데, 이때 그 횟수를 셈하기 위해 서산(書算, 책갈피의 일종으로 여러 개의 오린 문양을 종이 위에 만들어 접었다 폈다 하면서 수를 셈하도록 만든 것)을 사용하기도 했다.

서산(書算), 서수(書數)라고도 한다/ⓒLH토지주택박물관

강독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하여 <소학>과 사서삼경 등을 다 읽으면 기본적인 문리(文理)를 깨달았다고 판단하였으며,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기 위해 때대로 <통감(通鑑)>이나 <사기(史記)> 등을 읽도록 했다. 도 제술할 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명문장(名文章)과 명시(名詩)가 수록된 <당송문(唐宋文)>과 <당률(唐律)> 등도 읽었다.

 

제술은 시(詩), 부(賦), 표(表), 책(策) 등을 짓는 것을 말한다. 조선 후기에 대부분의 훈장들은 시를 짓는 데 나름대로 지삭과 재능이 있었다. 서당에서는 주로 오언절구(五言絶句) 등을 많이 짓도록 했으며, 간혹 과거 응시생을 위해 고풍십팔구시(古風十八句詩)도 익혔다고 한다. 고풍십팔구시는 7언(言) 18구(句)로 운(韻)을 달지 않고 짓는 시였다. 그러나 부나 표 또는 책에 능숙하지 못한 훈장이 상당히 많아서 제술교육을 하지 않는 서당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습자는 해서(楷書)를 위주로 교육했으나 이것이 익숙해지면 행서(行書)와 초서(草書)를 익히도록 하였다. 친구나 가족끼리 주고받는 간찰 등을 작성할 때에는 대부분 행초서로 썼기 때문에 이를 해독하지 못하면 일상생활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조선시대에는 종이가 매우 귀했기 때문에 서당에서는 분(粉)을 기름에 개어서 널조각에 바른 분판(粉板)을 이용하여 글씨연습을 했다. 과거에서 응시자의 글씨를 평가하고 관리를 채용할 때에도 '신언서판(身言書判)'이라 하여 글시체가 평가의 중요한 기준이 되었기 대문에 어려서부터 정확하고 예술성이 높은 글씨체를 익히려 노력하였다.

조선시대의 글씨노트, 분판(粉板)/ⓒ전주역사박물관

서당은 여러 가지 형태로 존속되고 다양한 방식으로 운영되었기 때문에 이에 따라 학습방법도 다른 경우가 많았다. 학동들이 서당에서 기숙(居接)하거나 가까운 집에서 매일 통학할 경우에는 일강(日講)이라 하여 매일매일 강의하였다. 그러나 서당에서 기숙하지 않거나 통학하기 어려울 정도로 먼 거리에 사는 학동들을 위해서 매월 10일이나 15일 간격으로 두세 번, 도는 특정한 날에 한 번 강의를 하였다. 이를 차례대로 순강(旬講), 망강(望講), 월강(月講)이라 하였는데, 학동들은 지정한 날 서당에 모여 이전에 학습했던 내용을 훈장 앞에서 암송하여 그 성취 정도를 평가받고 훈장이나 접장으로부터 새로운 내용을 배웠다. 따라서 순강이나 망강을 하는 날이면 학동들이 저마다 성독하는 소리로 서당은 하루 종일 시끄러웠다.

조선시대 서당의 모습/ⓒ한국전통서당문화진흥회

강을 하는 방식도 면강(面講)과 배강(背講)으로 구분되었다. 훈장의 얼굴을 마주한 채 책을 보면서 글을 읽고 그 뜻을 풀이하는 것을 면강이라 하고, 책을 보지 않고 뒤돌아 앉아서 암송하고 그 뜻을 해석하는 것을 배강이라고 하였다. 임문강독(臨文講讀), 즉 책을 보면서 글을 읽고 그 뜻을 풀이하는 것은 초보자들이 선호하였으나 공부가 점차 깊어지면서 배강을 주로 하였다.

 

서당교육에서 주목할 만한 것은 계절에 따라 학습내용을 달리했다는 점이다. 학습 내용과 방법을 계절의 기후와 조화를 이루도록 하여 겨울에는 경사(經史)와 같은 어려운 과목을 학습하게 하고, 여름에는 시율(詩律)과 같은 흥미 본위의 공부를 익히도록 하였다. 또 봄과 가을에는 <사기(史記)>나 고문(古文)과 같은 글을 읽게 하여 학자로서 뜻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이는 모두 학습효과를 높이기 위해 취해진 조처였다. 아울러 무더운 여름철에는 고요하고 시원한 산방(山房)으로 강학장소를 옮겨 더위를 피하면서 시회(詩會) 등을 개최하여 심신의 피로를 풀고 재충전의 기회도 마련하였다.

 

조선시대의 서당에서 널리 사용하였던 교재들 중 <천자문>은 중국 양(梁) 무제(武帝)의 명을 받아 주흥사(周興嗣)가 지은 책으로, '천지현황(天地玄黃)'과 같이 4자씩 1구를 구성하여 모두 250구로 되어 있다. 자연현상으로부터 인륜도덕에 이르기까지 초학자가 알아야 할 상식이나 지식들을 고시(古詩)의 형태로 표현하였기 대문에 한자를 익히려는 초보자들이 가장 널리 사용한 입문서이다. 이 책이 우리나라에 언제 전래되었는지 명확하지 않으나 조선시대에는 한글로 음과 훈을 붙인 <천자문>이 널리 보급되었다.

 

<추구>는 학동의 한자교육을 위해서 만든 기초교재 중의 하나로, 중국과 우리나라의 시 중에서 가장 뛰어난 시구(詩句)를 발췌하여 엮은 책이다. 5언 1구로 2구씩 짝이 되도록 구성하였다. 예컨대 '天高日月明 地厚草木生'과 같이 대구(對句)를 이루도록 구성하여 한자를 습득하면서 동시에 작시(作詩)의 기초적인 방법을 터득할 수 있도록 하였다.

 

<유합> 역시 학동이 한자를 쉽게 배울 수 있도록 만든 교재이다. 총 1,512자로 되어 있어서 수록된 한자의 수가 <천자문>보다는 1.5배쯤 많다. 조선 선조 대의 학자 유희춘(柳希春, 1513~1577)은 이 책에 불교를 숭상하는 내용이 들어 있으며 또 글자 수가 적다고 판단해서 불교와 관련된 내용을 삭제하고 약 1,500자를 보태어 3천 자로 이루어진 <진증유합(新增類合)>을 편찬하였다. 이는 우리나라 학자가 편찬한 초보 한자교재라는 점에서 매우 의미가 있다.

 

<동몽선습>은 조선 명종 대의 학자 박세무(朴世茂)가 저술한 책이다. 이는 <천자문>을 익히고 난 후 한문 문장을 익히기 위해 편찬한 초급교재로, 첫머리에 부자유친(父子有親) 군신유의(君臣有義) 부부유별(夫婦有別) 장유유서(長幼有序) 붕우유신(朋友有信) 등 오륜(五倫)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있다. 이어서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에서부터 명나라까지의 역대사실(歷代史實)과 한국의 단군으로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약술하였다. 영조는 이 책이 오륜과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간명하게 설명한 점을 크게 칭찬하고 교서관(校書館)에서 이 책을 발간해서 널리 보급하도록 지시하였다.

조선 명종 대의 학자 박세무가 저술한 책 <동몽선습>/ⓒ한국학중앙연구원

<소학>은 중국 송의 유자징(劉子澄)이 스승인 주자의 지시에 따라 아이들을 교화시키 ㄹ수 있는 내용을 여러 책에서 발췌하여 편진한 것으로, 주자가 교열과 가필(加筆)을 하였다. 책은 내편과 외편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편은 다시 입교(立敎), 명륜(明倫), 경신(敬身), 계고(稽古)의 4편으로, 그리고 외편은 가언(嘉言)과 선행(善行)의 2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은 금굉필(金宏弼) 1454~1504)과 김안국(金安國, 1478~1543) 등과 같은 조선 전기의 유학자들에게 크게 주목을 받아 이후에 향교와 서원 등 각 교육기관의 기본교재로 널리 보급되었다. 인간으로서 지켜야 할 기본 도리와 도덕의 원리가 잘 집약되어 있어서 조선시대에 가장 널리 읽혔던 한문 교재이자 수신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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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에는 평민들도 서당을 꾸리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도 후기 조선사회로 접어들면서 서당 교육을 평민도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서당은 학동들의 신분에 따라 양반 서당과 상놈 서당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향교에서도 동재(東齋)에는 양반 출신 유생만 드나들 수 있었고, 서재(西齋)에는 평민 출신 교생만 드나들 수 있었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지긴 했지만 어쨋든 조선 말기에는 평민들도 서당을 꾸리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평민들의 문자 인식률 또한 높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신분에 따른 한계는 여전히 높았다.

 하지만 서당의 교사인 훈장에 대한 예우가 매우 열악했고, 평민 서당은 공간문제나 평민들의 미약한 재정능력 등으로 인해 사실상 오래도록 존속되기는 힘들었다. 또한 평민 출신이 서당 공부를 계속 이어간다고 해도 과거급제를 통한 높은 벼슬이나 학문에 종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에 공부의 목표가 대부분 실용문 작성 대행, 면장(面長) 정도로 축소되거나 훈장 노릇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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