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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도화녀와 비형랑'/ⓒ한국학중앙연구원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이고 성은 김씨다.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태건(太建, 남조南朝 진陳나라 선제宣帝의 연호) 8년 병신년(576년)에 즉위하여 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음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을 폐위시켰다.

 

진지왕릉/25대 진지왕과 46대 문성왕이 함께 묻혀있는 무덤/사적 제517호(진지왕릉), 사적 제518호(문성왕릉)/ⓒ경주문화관광

 

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의 민가의 여인이 얼굴이 고와 당시 도화랑(桃花娘)이라 불렸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여자가 지켜야 할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천자의 위엄이 있다 해도 남편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가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인이 말했다.

"차라리 저자에서 죽어 딴마음이 없기만을 바랍니다."

왕은 여인을 희롱하여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는가?"

"됩니다."

그래서 왕은 여인을 놓아 보냈다.

이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고, 2년 뒤에 여인의 남편 역시 죽었다.

열흘 남짓 지난 어느 날 밤에 왕이 생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여인의 방에 와서 말했다.

"네거 지난번 약속한 바와 같이 이제 네 남편이 죽었으니 되겠는가?"

여인이 좀처럼 승낙하지 않고 부모에게 여쭙자 부모가 말했다.

"임금의 명령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그리고 딸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임금은 이레 동안 그곳에 머물렀는데, 항상 오색 구름이 지붕을 감싸고 방 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레 후 왕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여인이 이로 인해 임신하여 달이 차 곧 해산하려고 하자 천지가 진동했다.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은 아이가 매우 특이하다는 말을 듣고는 거두어 궁중에서 길렀다. 열다섯 살이 되자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비형이 매일 밤마다 먼 곳으로 달아나 놀자 왕이 날랜 병사 쉰명에게 지키게 했다. 그러나 비형은 매일 월성을 넘어 서쪽 황천(荒川, 경성 서쪽, 지금의 경주 남천 하류인데 신원사 터가 보이는 곳이다.) 언덕 위로 가서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 날랜 병사들이 숲 속에 숨어서 엿보니, 귀신들이 여러 절의 종소리를 듣고 각기 흩어지면 비형랑 역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군사들이 와서 이런 일을 아뢰니 왕이 비형랑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들을 거느리고 논다는 것이 사실이냐?"

비형랑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神元寺, 경주시 탑정동에 있다.) 북쪽 시내에 다리를 놓아라."

비형은 왕의 명령을 받을어 귀신들에게 돌을 다듬게 하여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그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불렀다.

왕이 또 물었다.

"귀신들 중에서 인간 세상에 나와 정치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비형이 대답했다.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의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왕이 말했다.

"데려 오너라."

이튿날 비형이 길달과 함께 나타나자, 왕은 그에게 집사의 벼슬을 내렸다. 길달은 과연 충직하기가 세상에 둘도 없었다.

이때 각각(角干, 신라 관등의 제1위인 이벌찬伊伐飡) 임종(林宗)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은 길달을 대를 이을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이 길달에게 흥륜사(신라 초기 불교 사찰의 중심으로 진흥왕 5년 544년에 세웠으며 경주시 사정동에 터만 남아 있다.) 남쪽에 누문(樓門)을 짓게 하자, 길달은 매일 밤 그 문 위에 가서 잤다. 때문에 이름을 길달문(吉達門)이라 했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둔갑해 도망치자 비형은 귀신을 시켜 붙잡아 죽였다. 그래서 귀신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무서워 도망쳤다. 그때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성스러운 임금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의 집이 여기로세.

날뛰는 온갖 귀신들이여,

이곳에는 함부로 머물지 마라.

 

만간에서는 이 가사를 써 붙여 귀신을 쫓곤 한다.('처용랑과 망해사' 조에도 처용의 얼굴을 붙여 귀신을 쫓았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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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불국사/경주시>


<사진 석굴암/경주시>


먼 옛날 신라시대 신문왕 때입니다.

모량리라는 마을에 대성이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 갔지만, 효심도 지극하고 바른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흥륜사의 한 스님이 보시를 받으러 집에 오셨습니다.

보시 할 것이 없던 가난한 대성은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품삯으로 받은 집 근처의 작은 밭이 하나 있어요. 그걸 보시하고 싶습니다."

스님은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며칠 후 대성은 이유 없이 앓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대성이 죽던 날 신라의 재상인 김문량은 아내와 집 앞 마당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불호령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량리에 살았던 김대성이 너의 집에 태어나리라"


김문량은 놀라워하며, 아내를 쳐다보았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내는 갑자기 입덧을 하더니,

행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김문량의 집에 태어난 대성은 어느새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청년이 된 대성은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어느날 사냥을 나간 토함산 기슭에서 곰 한마리를 만났습니다. 자신보다 큰 몸집을 가진 곰을 사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대성은 사냥에 성공합니다.

그는 사냥에 지친 팔다리를 쉴 겸 사냥한 곰을 옆에 두고 그늘에 잠시 누웠습니다.

'큰 곰을 사냥했다고 하면 어머니도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야'

대성은 흐뭇한 마음으로 누워 있다가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곰이 피를 흘리며 잡아먹겠다며 무섭게 으르렁 거렸습니다.

대성은 두려움에 떨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곰이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살려 줄 터이니, 나를 위해 절을 하나 지어 줄 수 있겠소?"



대성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대성은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김대성은 이후 곰을 사냥했던 그 장소에 장수사라는 절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 일로 깨달음을 얻은 김대성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무언가 나도 보답을 해야 해"




김대성은 현생이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를 지었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불사(지금의 석굴암)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이 부모님에 대한 효심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김대성의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 설화는 실제로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조(大成孝二世父母條)에 전하는 이야기 입니다./출처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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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오랑과 세오녀

연오랑과 세오녀 이야기는 삼국사기에는 전혀 내용이 없으나 고려초기 박인량의 '수이전(殊異傳)'에 실려있다.


[사진 삼국유사 권1 연오랑과 세오녀 설화/한국학중앙연구원]


 제8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지 4년 정유년(157년)에 동해 가에 연오랑(延烏郞)과 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았다. 하루는 연오랑이 바다에 가서 해조(海藻)를 따로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혹은 물고기라고도 한다.)가 하나 나타나더니 연오랑을 태우고 일본으로 갔다. 일본 사람들이 그를 보고 말했다.

 "이 사람은 예사로운 인물이 아니다."

 그래서 왕으로 삼았다. 일본제기를 살펴볼 때, 이때를 전후하여 신라 사람으로 왕이 된 사람이 없었다. 이는 변방 고을의 작은 왕이지 진짜 왕은 아니다.

 세오녀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이상하게 여겨 바닷가에 가서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발견했다. 세오녀가 남편의 신발이 있는 바위 위로 올라갔더니 바위는 또 이전처럼 그녀를 싣고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왕에게 알리고 세오녀를 왕께 바쳤다. 부부는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녀는 귀비가 되었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빛을 잃었는데, 일관(日官)이 왕께 아뢰었다.

 "해와 달의 정기가 우리나라에 내렸었는데, 이제 일본으로 가버렸기 때문에 이런 변괴가 생긴 것입니다."


[사진 포항 호미곶 연오랑과 세오녀상/국정브리핑]


 왕이 사신을 보내 두 사람에게 돌아오기를 청하자 연오랑이 말했다.

 "내가 이 나라에 오게 된 것은 하늘의 뜻인데 지금 어떻게 돌아가겠습니까? 그러나 짐의 비(妃)가 짜 놓은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입니다."

 그러고는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서 아뢰고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처럼 빛을 되찾았다. 그리고 연오랑이 준 비단을 임금의 곳간에 간직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의 이름을 귀비고(貴妃庫)라 했다. 하늘에 제사 지낸 곳은 영일현(迎日懸) 또는 도기야(都祈野)라 했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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