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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진흥왕릉/ⓒ한국학중앙연구원,유남해

제24대 진흥왕은 즉위할 당시 열다섯 살('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일곱 살로 되어 있다.)이었기 때문에 태후가 섭정을 했다. 태후는 법흥왕의 딸이며, 법흥왕의 아우인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의 왕비다. 임종 무렵 머리칼을 깎고 법복을 입고 세상을 떠났다.

 

승성(承聖(남조 양梁나라 간문제簡文帝 소강蕭綱의 연호다.) 3년(554년) 9월, 백제의 군사가 진성(珍城)을 침공해 와서 남녀 3만 9천명과 말 8천필을 빼았아 갔다.

국보 3호 북한산 신리 즌흥왕 순수비/ⓒ국립중앙박물관

이보다 앞서 백제가 신라와 군사를 합하여 고구려를 치고자 모의 했다. 이때 진흥왕이 말했다.

 

"나라의 흥망은 하늘에 달려 있다. 만약 하늘이 고구려를 싫어하지 않는다면 내가 어찌 감히 바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 말을 고구려에 알렸더니, 고구려는 그 말에 감격하여 신라와 화친을 맺었다. 이 대문에 백제는 신라를 원망하여 침략해온 것이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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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이사금 왕릉/ⓒ경주문화관광
탈해이사금 왕릉/ⓒ경주문화관광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탈'은 '토吐'와 동음이며 '치'는 '이', '니'의 훈차자로서 치질금은 이사금, 이질금과 같은 뜻이다.)은 남해왕 때에(고본古本에 임인년에 왔다고 했으나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일연은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술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했다. 가까운 임인년이면 노례왕이 즉위한 뒤일 것이므로 서로 왕위를 양보하려고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앞의 임인년이라면 혁거세의 시대다. 때문에 임인년이라 한 것은 틀렸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駕洛國) 바다 한가운데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북을 시끄럽게 두드리며 맞이하여 그들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배는 나는 듯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 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과 하서지촌下西知村이라는 이름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도 나오며 대왕암에서 3~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포구 가에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노파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있었다.

 

[노파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는 원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일로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가?"

 

배를 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 있었고 배 안에는 길이가 스무 자에 너비가 열세 자나 되는 상자가 하나 있었다. 아진의선이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아래 매어 두고는 길흉을 알 수가 없어 하늘을 향해 고했다. 잠시 후에 열어 보니 반듯한 모습의 남자 아이가 있었고, 칠보(七寶, 불가의 일곱 가지 보물로서 금, 은, 유리琉璃, 마노瑪瑙, 호박琥珀, 산호珊瑚, 차거硨磲)와 노비가 가득 차 있었다.

 

이레 동안 잘 대접하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 (또는 정명국正明國 사람이라고도 하고 완하국琓夏國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완하는 화하국花夏國이라고도 한다. 용성국은 왜倭의 동북쪽 1,000리 지점에 있다. '삼국사기'에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고 했는데 일연의 주석처럼 일본과 관련 있는 나라이다.) 우리나라에 일찍이 스물여덟 용왕이 있는데, 사람의 태(胎)에서 출생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온 백성을 가르치고 성명(性命)을 바르게 닦았습니다. 8품의 성골(姓骨)이 있으나 간택을 받지 않고 모두 큰 자리(大位, 왕위를 말한다.)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자 아들 구하기를 빌어 7년 만에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군신을 모아 묻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으니 길상(吉祥)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고,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고 또한 칠보와 노비까지 배에 싣고 띄워 보내면서, '아무 곳이나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루어라.'라고 축원했습니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말을 끝내자 아이는 지팡이를 짚고 노비 두 명을 데리고 토함산으로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곳에] 이레 동안 머물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을 살펴보니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오래도록 살 만했다. 그래서 내려가 살펴보니 바로 호공(瓠公,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그의 혈족과 성씨가 자세하지 않고 박을 허리에 매고 있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보았다.)의 집이었다. 이에 곧 계책을 써서 몰래 그 옆에 숫돌과 숯을 묻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그 집에 가서 말했다.

 

"여기는 우리 조상이 대대로 살던 집이오."

 

호공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이들의 다툼이 결판이 나지 않아 관청에 고발했다. 관청에서 물었다.

 

"무슨 근거로 너의 집이라고 하느냐?"

 

아이가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깐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가 빼앗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십시오."

 

탈해의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그는]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고 맏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니, 이 사람이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 여기서 '토해'는 '탈해'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인[白衣]에게 마실 물을 떠오게 했다. 그런데 하인이 물을 길어 오면서 도중에 먼저 맛보려 하자 입에 잔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하인이 맹세했다.

 

"이후로는 가깝든 멀든 감히 먼저 물을 맛보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입에서 잔이 떨어졌다. 그 뒤로 하인은 두려워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에 세속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 부르는 우물이 바로 그곳이다.

 

노례왕이 죽자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 정사년(57년) 6월 탈해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옛날 내 집이었다고 하여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에 성을 석씨(昔氏)라 했다. 어떤 사람은 까치로 인해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버리고 성을 석(昔)씨로 했으며(이병도설에 의하면 까치는 길조요 예지豫智의 새이므로 이를 토템으로 삼은 것 같기도 하다.), 상자 속에서 알을 깨고 출생했기 때문에 탈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째인 건초(建初, 후한 장제章帝 유달劉炟의 연호다.) 4년 기모년 79에 죽은 뒤 소천구(疏川丘)에 장사 지냈다. 그 이후에 신(神)이 말했다.

 

"내 뼈를 조심해서 묻으라"

 

두개골의 둘레가 세 자 두 치, 몸통뼈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에 치아는 하나로 엉켜 있었으며, 뼈마디는 사슬처럼 이어져 있어 이른바 천하에 둘도 없는 장사의 골격이었다.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하니, 신이 또 말했다.

 

"내 뼈를 동악에 두라.(탈해왕릉은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의 길가에 큰 소나무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받들어 모셨다.

이런 말도 있다. [탈해왕이] 죽은 뒤 27대 문무왕 대 조로調露 2년 경신년(680년) 3월 15일 신유일辛酉日 밤, 태종의 꿈에 매우 위엄 있고 사나워 보이는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탈해왕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라고 했다. 왕이 그의 말대로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국사國祀가 끊이지 않았으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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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제27대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문화컨텐츠닷컴

제27대 덕만(德曼/德萬)의 시호는 선덕여대왕(善德女大王, 불법의 수입에 남달랐으며 경주 남산 신유림에 능이 있다.)이고, 성은 김씨며 아버지는 진평왕이다. 정관(貞觀, 당나라 태종 이세민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 사용했으며 치세로 유명하여 '정관지치貞觀之治'라는 말이 있다) 6년 임진년(632년)에 즉위하여 16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세 가지 일을 미리 알았다.

첫째는, 당태종이 붉은색, 자주색, 흰색의 세 가지로 그린 모란꽃 그림과 씨앗 세 되를 보내 왔다(신라의 삼국 통일에 기여한 당나라와 우호 관계를 보여 주는 예다). 왕이 꽃 그림을 보고 말했다.

"이 꽃은 정녕코 향기가 없을 것이다."

명을 내려 씨를 뜰에 심도록 했더니 그 꽃이 피었다가 질 때까지 과연 그 말과 다름이 없었다(모란꽃이 향기가 없다는 말은 수사적 비유다).

둘째는, 영묘사(靈妙寺, 선덕여왕 즉위 원년인 632년에 세워진 절로 찰간지주刹竿支柱만 남아 있다.) 옥문지(玉門池)에서 한겨울에 수많은 개구리들이 모여 사나흘 동안 울어 댔다. 나라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겨 왕에게 물었다. 왕은 급히 각간(角干) 알천(閼川)과 필탄(弼呑) 등에게 정예 병사 2000명을 이끌고 서둘러 서쪽 교외로 가서 여근곡(女根谷, 여인의 생식기 모양이라는 뜻으로 경주에서 대구로 철길을 따라가다 보면 건산과 아화 사이에 있다.)을 물어보면 그곳에 틀림없이 적병이 있을 테니 습격하여 죽이라고 말했다.

두 각간이 명을 받고 나서 각기 1000명을 거느리고 서쪽 교외로 가서 물었더니 부산(富山) 아래에 과연 여근곡이 있었고, 백제 군사 500명이 그곳에 숨어 있었으므로 그들을 에워싸서 죽였다. 백제 장군 우소(亏召)는 남산 고개 바위 위에 숨어 있었는데, 포위하여 활을 쏘아 죽였다. 백제 후원병이 1200여 명이 왔지만 역시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였다.

 

경주 여근곡/ⓒ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셋째는, 왕이 병도 없을 때인데 모든 신하들에게 말했다.

"내가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이 되면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忉利天, 불가에서 말하는 욕계육천欲界六天의 둘째 하늘이다.) 가운데 장사 지내라."

신하들은 그곳이 어디인지 몰라 물었다.

"어디입니까?"

왕이 말했다.

"낭산(狼山, 높이가 몇십 미터에 불과한 나지막한 언덕이다. 사천왕사 터와 가까이 있다.)의 남쪽이다."

과연 그달 그날에 이르러 왕이 죽었다. 신하들은 왕을 낭산 남쪽에 장사 지냈다. 그 후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 지금의 경주시 배반동에서 불국사로 가다 보면 나오는데 터만 남아 있다.)를 지었다. 불경에 말했다.

"사천왕천(四天王天, 육계육천의 하나로서, 동방은 지국천持國天, 서방은 광목천廣目天, 남방은 증장천增長天, 북방은 다문천多聞天이라 한다.) 위에 도리천이 있다."

이에 대왕이 신령스럽고 성스러웠음을 알게 되었다.

왕이 살아 있을 당시 신하들이 왕에게 말했다.

"모란꽃과 개구리의 두 가지 일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왕이 말했다.

"꽃 그림에 나비가 없어 향기가 없는 것을 알았다. 이는 당나라 황제가 배필이 없는 나를 놀린 것이다. 개구리의 성난 모습은 군사의 형상이고, 옥문(玉門)이란 여인의 음부로서 여인은 음이 되며 그 색깔이 흰데, 흰색은 서쪽을 나타내기 때문에(이러한 해석은 그 당시 신라에 음양오행설이 보편화되었음을 의미한다.) 군사가 서쪽에 있음을 알았다. 남근(男根)이 여근(女根)에 들어가면 반드시 죽게 된다. 다라서 쉽게 잡을 수 있음을 안 것이다."

신하들은 모두 여왕의 그 성스러운 지혜에 감탄했다.

세 가지 색의 꽃을 보낸 것은 아마도 신라에 세 여왕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인가? 세 여왕은 선덕(善德), 진덕(眞德), 진성(眞聖)이니 당나라 황제의 놀라운 선견지명이 있었던 것이다. 선덕여왕이 영묘사를 세운 것에 관해서는 '양지사전(良志師傳)에 모두 실려 있다.

별기(別記)에는 이 선덕여왕 시대에 돌을 다듬어 첨성대(경주시 인왕동에 있으며 반월성에서 바라보인다. 첨성대는 평지에 세워져 있어 실제 관측에는 부적당한 구조물이고 선덕여왕 시절에 천문 관측 기록이 없다는 점 등이 논란이 되고 있다.)를 쌓았다고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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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한 때 처음으로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는데, 응소(應邵, 후한 여남汝南 사람으로 원소袁紹 밑에서 벼슬을 했고 고대의 예의, 풍속, 관직 등에 밝았다.)는 "옛날 조선국" 이라고 했다.

'신당서(新唐書)'의 주에 이렇게 말했다.

"평양성은 옛날 한(漢)나라의 낙랑군이다."

'국사(國史)'에 이렇게 말했다.

"혁거세 30년에 낙랑 사람들이 와서 투항했고, 또 제3대 노례왕(弩禮王) 4년에 고구려 제3대 무휼왕(無恤王)이 낙랑을 정벌하여 멸망시키니, 그 나라 사람들이 대방(帶方), 북대방과 함께 신라에 투항했다.

또 무휼왕 27년에 광무제(光武帝)가 사신을 보내 낙랑을 정벌하여 그 땅을 빼앗아 군현으로 삼으니, 살수(薩水) 이남이 한나라에 예속되었다. 이상의 여러 글에 의하면 낙랑은 바로 평양성이어야 마땅하다. 어떤 사람들은 낙랑은 중두산(中頭山) 아래 말갈과의 경계고 살수는 지금의 대동강이라고 하는데, 어느 말이 옳은지는 알 수 없다."

 

「낙랑예관‘樂浪禮官」이 새겨진 수막새/ⓒ국립중앙박물관

 

또 백제 온조왕(溫祚王)이 말했다.

"동쪽에는 낙랑이 있고 북쪽에는 말갈이 있다. 이는 아마 옛날 한나라 때의 낙랑군 속현의 땅이었을 것이다."

신라 사람 역시 낙랑이라 불렀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지금 고려에서도 낙랑군부인(樂浪郡夫人)이라 한다. 또 태조가 김부(金傅,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이며 태조는 왕건王建을 말한다.)에게 딸을 시집보내면서 역시 낙랑공주라고 했다.

-삼국유사 기이(紀異) 제1, 낙랑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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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617호 '천마총 금제 관식(나비 모양 관장식)'은 경북 경주시 황남동 천마총에서 출퇴된 5~6세기 신라시대 유물로 높이 23cm, 너비 23cm 크기이다.

새날개 모양 관장식과 마찬가지로 관모의 앞에 꽂아 장식하기 위한 장식구로, 새날개 모양 관장식과 비교했을 때 크기가 절반가량 작고 한 장의 금판으로만 제작되었으며, 뚫림 무늬나 달개의 배치 등에서 화려함이 다소 떨어지는 관장식이다.

하지만 전체적인 화려함이나 재질에서 다소 차이가 있지만 나비 모양 관장식도 새날개 모양 관장식과 마찬가지로 신라의 지방 수장 무덤에서 출토되는 위세품 중 하나이므로 향후 새날개 모양 관장식과의 연관 및 관계는 밝혀내야할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보물 617호 '천마총 금제 관식(나비 모양 관장식)'/ⓒ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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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1411호, 임신서기석/국립중앙박물관]



보물 1411호 '임신서기석'은 최대 높이 32cm, 최대 너비 12.3cm의 크기로 1934년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금장리 석장사터 부근에서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비석의 제작연대는 비석의 비문에 새겨진 임신년(壬申年)이 정확히 언제인지는 명확하지 않아 정확한 연대를 알 수 없으나 아마도 화랑도가 번창하던 552년 또는 612년 경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첫머리에 임신년(壬申年)이라는 간지(干支, 십간과 십이지를 조합한 연대표)가 있고, 별도의 구획선 없이 5행 74자를 새겼는데, 화랑도의 기본정신에 따른 충도의 실천으로 신라에 충성을 서약하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므로 '임신서기석(壬申誓記石)'이라고 명명했다.


비문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壬申年六月十六日 二人幷誓記 天前誓 今自三年以後 忠道執持 過失无誓 若此事失 天大罪得誓 若國不安大亂世 可容行誓之 又別先辛未年 七月卄二日 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임신년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해 기록하며, 하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충도를 집지하고 허물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이서약을 어기면 하늘에 큰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편안하지 않고 크게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충도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앞서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즉 시, 상서, 예기, 전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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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456호 '금목걸이'/국립중앙박물관]


보물 456호 '금목걸이'는 경북 경주시 노서동 215번지 무덤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유물이다.

경주시 노동동과 노서동에 모여있는 큰 무덤들은 대부분 5세기~6세기 전반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며, 대형 무덤은 보통 왕이나 왕족 등 신라 최상류층의 무덤으로 추정되기 때문에 노서동 215번지 무덤에서 출토된 유물 또한 신라 최상류층과 관련된 것으로 볼 수 있다.


6세기 전반이 되면 목걸이뿐만 아니라 금관이나 귀걸이 모두 매우 장식적으로 변하는데, 이 '금목걸이'는 굵은 고리귀걸이의 샛장식에 사용하는 작은 고리를 여러 개 연결하여 또 하나의 둥근 구슬모양으로 엮어 만든 것이 특징이다. 작은 고리에는 새김눈(‘目’자처럼 가로 또는 세로로 조각한 눈금선 문양) 장식이 있고, 하트(heart) 모양의 달개를 여러개 매달아 보다 풍성하고 화려하게 장식을 했다. 목걸이의 하단 가운데에는 한 개의 곡옥(曲玉)을 넣어 장식효과를 높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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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한(辰韓)

진한(辰韓) 또는 진한(秦韓) 이라고도 한다.



[사진 경주 입실리 출토 세형동검 진한시대의 유물인 세형동검, 동과, 동모. 경주 입실리 출토. 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후한서'에서 이렇게 말했다.

 "진한의 노인들이 스스로 말하기를, 진(秦)나라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한국(韓國)으로 오자 마한이 동쪽 경계의 땅을 떼어 주고 서로 불러 무리를 이루었는데, 진나라 말과 유사하여 간혹 진한(秦韓)이라 했다고 한다. 열두 개의 작은 나라가 있는데 모두 1만호씩이고 각기 나라라 일컬었다."

 또 최치원은 말했다.

 "진한은 본래 연나라 사람들이 피신해 온 곳이다. 때문에 탁수(琢 水)의 이름을 취해 살고 있는 읍과 마을을 사탁(沙琢), 점탁(漸) 등으로 불렀다. 신라 사람들의 방언에 탁을 도로 발음하기 때문에 지금은 때때로 사량(梁)이라 쓰고, 양(梁) 역시 '도'로 읽는다." 

 신라는 전성기에 서울이 17만 8936호였고, 1360방, 55리, 35개의 금입택(金入宅)-부유하고 윤택한 큰집이 있었다. 그것은 남택, 북택, 오비소택, 본피택, 양택, 지상택, 재매정택, 북유택, 남유택, 대택, 빈지택, 장사택, 상앵택, 하앵택, 수망택, 천택, 양상택, 한기택, 비혈택, 판적택, 별교택, 아남택, 금양종택, 곡수택, 유야택, 사하택, 사량택, 정상택, 이남택, 사내곡택, 지택, 사상택, 임상택, 청룡사, 교남택, 항질택, 누상택, 이상택, 명남택, 정하택 등이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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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초기 여러나라의 성장과정/두산백과]


 마한(馬韓)

 '삼국지( 三國志) 위지(魏志)' 에서 이렇게 말했다.

 (삼국지 위지는 진(晉)나라 역사가 진수(陳壽)가 편찬한 위, 촉, 오 삼국의 정사 '삼국지' 중 위나라 부분으로 '위서(魏書)'가 정확한 말이다. 여기에 마한 50여 국의 이름이 있으며 백제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위만이 조선을 공격하자 조선 왕 준(準)은 궁중 사람들과 측근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남쪽 한(韓)나라 땅에 나라를 세우고 마한(馬韓)이라 했다."

 견훤(甄萱)이 태조에게 글을 올려 말했다.

 "옛날에 마한이 먼저 일어나고 혁거세(赫居世)가 일어나자, 이에 백제가 금마산(金馬山)에서 나라를 세웠습니다.(금마산은 지금의 전북 익산에 있다.)

 최치원(崔致遠)이 말했다.

 "마한은 고구려요, 진한은 신라다.

 (삼국사기 본기에 이하면 신라가 먼저 갑자년에 일어났고 고구려는 그 뒤 갑신년에 일어났다고 했는데, 이것은 왕 준(準)을 말한 것이다. 이로써 동명왕이 일어났을 때는 이미 마한을 합병했음을 알 수 있고, 이 때문에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일컫는 것이다. 지금 사람들이 간혹 금마산을 마한으로 알고 백제라고 하는 것은 잘못되고 황당한 일이다. 고구려 땅에 본래 마읍산(馬邑山)이 있었기 때문에 마한이라 이름지은 것이다.)"

 사이(四夷)는 구이(九夷)와 구한(九韓), 예(穢), 맥(貊)이 있으니, '주례(周禮)에서 "직방씨(職方氏)가 사이와 구맥을 관장했다."라고 한 것은 동이족 즉 구이를 말한 것이다.(사이四夷는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을 일컫는다. 직방씨는 주나라 때의 관직명으로 천하의 지도와 토지에 관한 일을 했다.)

 '삼국사(三國史)'에서 이렇게 말했다.

 "명주(溟州)는 옛날 예국(國)이었는데, 농부가 밭을 갈다가 예왕의 인장(印章)을 얻어 바쳤다."

 또 이렇게 말했다.(명주는 지금의 강릉이다.)

 "춘주(春州)는 옛날 우수주(牛首州)며 옛날의 맥국인데, 어떤 이는 지금의 삭주(朔州)가 맥국이라고 하고, 어떤 이는 평양성(平壤城)이 맥국이라고 한다."(삭주는 지금의 평안북도 삭주군)

 '회남자(淮南子)'의 주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동방의 이(夷)는 아홉 종류나 있다."

 '논어정의(論語正義)' 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구이란 첫째 현도, 둘째 낙랑, 셋째 고려, 넷째, 만식(滿飾), 다섯째 부유(鳧臾), 여섯째 소가(素家), 일곱째 동도(東屠, 여덟째(倭), 아홉째 천비(天鄙)다."

 '해동안홍기(海東安弘記)' 에서는 이렇게 말했다.(해동안홍기는 신라의 승려 안홍이 지은 책이다.)

 "구한이란 첫째 일본, 둘째 중화(中華), 셋째 오월(吳越), 넷째 탁라, 다섯째 응유(鷹遊), 여섯째 말갈(靺鞨), 일곱째 단국(丹國), 여덟째 여진(女眞), 아홉째 예맥(貊)이다."

[삼국유사/김원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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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이서국 유적지/쿠키뉴스]


 이서국

 노례왕(努禮王) 14년에 이서국(伊西國) 사람이 금성(金城)을 침공해 왔다. 운문사(雲門寺)에 예부터 전해 오는 '제사납전기( 諸 寺納田 記)에서 이렇게 말했다.

 "정관(貞觀) 6년 임진년(632년)에 이서군(伊西郡)의 금오촌(今郚村) 영미사(零味寺)에서 밭을 바쳤다."

 금오촌은 지금의 청도(淸道) 땅이므로 청도군은 옛날의 이서군이다.

 [삼국유사]


 (정관(貞觀):당나라 태종(太宗) 이세민의 연호로 627년에서 649년까지 사용했다.)


이서국 전설

때는 서기 297년. 신라 유례왕은 가야를 정벌하기 위해 길목에 있는 이서국을 공격했다. 이서국은 강하게 저항했다. 신라의 공격에 위기감을 느낀 이서국은 방어뿐 아니라 한 발 더 나아가 금성(지금의 경주)을 공격했다. 이서국의 공격이 워낙 드세 쉽사리 물리칠 수 없었다. 이때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이 나타나 신라군과 함께 이서국을 물리쳤다. 이 군사들을 대나무잎을 귀에 꽂았다고 해 '죽엽군(竹葉軍)'이라 했다. 이서국을 물리친 이후 대나무잎을 귀에 꽂은 군사들은 사라졌다. 다만 대나무잎만 신라 미추왕릉 앞에 쌓여 있었다. 미추왕의 음덕으로 신라가 이서국에 승리할 수 있었다는 전설이다. 금성에서 이서국 군대를 물리친 신라는 이서국을 공격했다. 이서국과 신라는 이서산성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 절벽 위에 축조된 이서산성의 지형적인 특성 때문에 이서산성은 쉽사리 무너지지 않았다. 유례왕이 이서산성에서 멀지 않은 운문사로 군사를 철수시킨 뒤, 보양 스님께 어떻게 하면 이서산성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를 물어봤다. 보양 스님은 "개라는 짐승은 밤에는 잘 지키지만 낮은 지키지 못하고, 앞은 지켜도 뒤는 꺼려 한다. 낮에 북쪽을 공격하라"고 했다. 이서산성이 있는 산의 모습이 달리는 개의 형상을 하고 있는 것을 염두에 둔 말이다. 유례왕이 보양 스님의 말대로 했더니 이서산성은 함락됐다. 신라에 패한 이서국의 왕과 왕족들은 이서산성에서 빠져나와 화양읍 동천리 신둔사 뒷산의 봉우리로 숨었다. 왕과 왕족들이 숨었다고 해, 봉우리 이름이 '은왕봉(隱王峰)'이다. 화양읍 서상리에는 '금장들'이라는 들이 있다. 이서국 왕과 왕족들이 이서산성을 나와 피신하면서, 이서국의 수많은 금은보화를 옮기지 못해 이곳에 묻었다고 한다. 그래서 금장들이라고 한다. 청도군 화양읍 토평리에 나즈막한 산이 하나 있다. 농촌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동산의 모습을 하고 있다. 다른 게 있다면 진입로 한켠에 '이서국 성지'라고 적혀 있는 비석이 하나 있다는 것이다. 비석의 옆면에는 '신라 유례왕 7년(서기 297년) 금성을 공략하다가 반격을 받아 폐성 함락으로 멸망하였다'는 설명이 적혀 있다. 이곳이 이서국의 왕성(王城)인 백곡토성이 있었던 곳이다. 흙으로 만든 성이기에 지금은 성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백곡토성에서 자동차로 5분 거리에 비석에 적혀있는 폐성(吠城)이 있다. 주구산성(走拘山城)이라고도 한다. 산성이 있는 산의 모습이 달리는 개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서산성으로 부른다. 이서산성이 신라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면서 이서국은 멸망했다.[출처:쿠키뉴스/기사원문: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143&aid=0000058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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