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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탑동에 있는 신라 오릉/신라 시조인 1대 박혁거세거서간과 왕비 알영, 제2대 남해차차웅, 3대 유리이사금, 4대 파사이사금의 무덤이라 전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신라의 개국 시조면서 경주 박씨의 시조인 박혁거세의 출생에서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서술했다. 혁거세란 명왕明王, 성왕聖王, 철왕哲王의 뜻이며 존호다.-이병도설)

 

진한 땅에는 예부터 여섯 마을이 있었다.(다음 신화를 서대석 교수는 육촌장 신화라고 이름지었다. 내용은 씨족 집단의 거주 지역과 족장의 이름을 이야기한 것으로서 천신 숭배 집단의 부계 혈연을 중심으로 집단 생활을 하던 사정을 말해 주는 것으로 보았다. 한편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이 여섯 마을 사람들을 조선의 유민으로 보았다.)

 

첫째는 알천 양산촌(閼川 楊山村)으로, 남쪽은 지금의 담엄사(曇嚴寺)며, 촌장은 알평(謁平)이라고 한다. 처음에 [하늘에서] 표암봉(瓢嵓峯, 경주시 동천동의 금강산에 있는 봉우리인데 그 아래에 석탈해왕릉이 보인다.)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급량부(及梁部) 이씨(李氏)의 조상이 되었다. (노례왕 9년에 부部를 설치하고 급량부라 했는데 고려 태조 천복天福 5년 경자년에 중흥부中興部로 고쳤다. 파잠波潛, 동산東山, 피상彼上,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둘째는 돌산 고허촌(突山 高墟村)으로, 촌장은 소벌도리(蘇伐都利)라고 한다. 처음에 형산(兄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사량부(沙梁部, 양梁은 도道로 읽어야 하며, 간혹 탁涿으로 쓰는데 역시 음은 도다.) 정씨(鄭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남산부(南山部)라 하며, 구량벌(仇良伐), 마등오(麻等烏), 도북(道北), 회덕(廻德) 등 남촌(南村)이 이에 속한다.('지금은'이라고 한 것은 고려 태조 때 설치한 것이며 아래의 예도 그렇다.)

 

셋째는 무산 대수촌(茂山 大樹村)으로, 촌장은 구례마(俱禮馬, 구俱를 구仇로 표기하기도 한다.)라고 한다. 처음에 이산(伊山 혹은 개비산皆比山이라 한다.)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점량부(漸梁部, 양梁은 탁涿이라고도 한다.) 또는 모량부(牟梁部) 손씨(孫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장복부(長福部)라고 하며, 박곡촌(朴谷村) 등 서촌(西村)이 이에 속한다.

 

넷째는 자산 진지촌(觜山 珍支村 혹은 빈지賓之, 빈자貧子, 빙지氷之라고도 한다.)으로, 촌장은 지백호(智伯虎)라고 한다. 처음에 화산(花山)으로 내려와서 본피부 최씨(崔氏)의 조상이 되었으며, 지금은 통선부(通仙部)라고 한다. 시파(柴巴) 등 동남촌(東南村)이 이에 속한다. 최치원은 본피부 사람이다. 지금의 황룡사(皇龍寺) 남쪽과 미탄사(味呑寺) 남쪽에 옛터가 있는데 여기가 최치원이 옛 집이라는 설이 거의 확실하다.

 

다섯째는 금산 가리촌(金山 加利村, 지금의 금강산-현재의 경주 북쪽에 있는 산-백률사栢栗寺 북쪽산)으로 촌장은 지타(祗沱 혹은 지타只他라고도 한다.)라고 한다. 처음 명활산(明活山)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한기부(漢歧部) 또는 한기부(韓歧部) 배씨(裵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가덕부(加德部)라고 하는데, 상서지(上西知), 하서지(下西知), 활아(活兒) 등 동촌(東村)이 이에 속한다.

 

여섯째는 명활산 고야촌(明活山 高耶村)으로, 촌장은 호진(虎珍)이라고 한다. 처음에 금강산으로 내려왔는데, 이 사람이 습비부(習比部) 설씨(薛氏)의 조상이 되었다. 지금은 임천부(臨川部)로, 물이촌(勿伊村), 잉구미촌(仍仇彌村), 궐곡(闕谷 혹은 갈곡葛谷이라고도 한다.) 등 동북촌(東北村)이 이에 속한다.

 

위의 글을 살펴보면 여섯 부의 시조는 모두 하늘에서 내려온 듯하다. 노례왕 9년(132년)에 처음으로 여섯 부의 명칭을 고쳤고, 또 여섯 성(姓)을 주었다. 지금 풍속에 중흥부를 어머니, 장복부를 아버지, 임천부를 아들, 가덕부를 딸이라 하는데 그 실상은 자세하지 않다.

 

전한(前漢) 지절(地節, 서한 선제宣帝 유순劉詢의 연호다.) 원년(기원전 69년) 임자년(고본古本에는 건무建武 원년이라고도 하고 또 건원建元 3년이라고도 했는데, 모두 잘못된 것이다.) 3월 초하루에 여섯 부의 조상들은 각기 자제들을 거느리고 알천(閼川) 남쪽 언덕에 모여 다음과 같이 의논했다.

 

"우리들은 위로 군주가 없이 백성들을 다스리기 때문에 백성들이 모두 방자하여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다. 덕 있는 사람을 찾아 군주로 삼아 나라를 세우고 도읍을 정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그러고는 높은 곳으로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아래 나정(蘿井, 우물은 이 부족이 농경 생활을 하고 있음을 뜻한다. 지금은 신라정新羅井이라고 하는데 경주의 탑정동 솔밭에 있따.) 옆에 번갯불과 같은 이상한 기운이 땅을 뒤덮었고 백마(하늘을 나는 천마의 의미가 있으며 하늘의 사자다.) 한 마리가 꿇어앉아 절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래서 찾아가 보니 자주색 알(혹은 푸른 큰 알이라고도 한다.)이 하나 있었다. 말은 사람들을 보더니 길게 울고는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태양신의 정기를 받아 고귀하게 태어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서대석 설) 그 알을 깨뜨려 사내아이를 얻었는데, 모습과 거동이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사람들이 놀라고 이상히 여겨 동천(東泉, 동천사東泉寺는 사뇌야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니, 몸에서 빛이 나고 새와 짐승들이 춤을 추며 천지가 진동하고 해와 달이 맑아졌다. 그래서 혁거세왕(赫居世王, 이 말은 향언鄕言이다. 혹은 불구내왕弗矩內王이라고도 하는데, 밝은 빛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박'은 우리말 '밝光明'에 대한 음차자音借字며, '혁赫'의 훈'밝'에 대한 음차자인 '박'자로 성을 삼은 것이라는 견해가 설득력이 있다.-양주동, 이동환-해설가들에 다르면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선도성모와 같은 존재며, 중국 황실의 공주로서 성도산에 와서 깃들었다는 신모다. -이동환-가 낳은 것이다. 중국 사람들이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양하는 말에 어진 사람을 낳아서 나라를 세웠다는 말이 그것이다. 그러기에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은 것 역시 서술성모가 나타났음을 뜻함이 아니겠는가."라고 한다.)이라 이름하고 위호(位號)는 거슬한(居瑟邯) (또는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한다. 처음 입을 열었을 때 스스로 "알지 거서간이 한 번 일어났다."라고 했으므로 그 말에 따라 일컬은 것인데, 이후부터 왕의 존칭이 되었다.)이라고 했다.

 

당시 사람들은 다투어 축하하며 말했다.

 

"이제 천자가 이미 내려왔으니, 덕이 있는 왕후를 찾아 짝을 맺어드려야 한다."
(이하는 왕비 알영 부인을 맞이하는 이야기인데, 고운기의 고증에 의하면 부인이 태어난 해는 혁거세가 왕위에 오른 5년 뒤라고 기록하고 있어 여기와는 다르다.)

 

그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이도흠에 의하면 '알'은 사물의 핵심이나 근원을 말하며, '씨'의 대칭어로 여성에게만 쓰였다고 한다. 서대석은 알영정을 나정에 대응되는 마을의 중심지로 보았다.-英井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도 한다.) 가에 계룡이 나타나 왼쪽 옆구리에서 여자 아이를 낳았다.(혹은 용이 나타나 죽었는데 그 배를 갈라 얻었다고도 한다.) 여자 아이의 얼굴과 용모는 매우 아름다웠으나 입술이 닭부리와 같았다.(닭은 새로운 태양의 도래를 알리는 새다. 이러한 닭 토템은 신성 관념의 반영이며 신라 전체의 토템으로 확장된다.) 아이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서 목욕시키자 부리가 떨어져 나갔다. 그 때문에 시내 이름을 발천(撥川)이라 했다.

 

남산 서쪽 기슭(지금의 창림사昌林寺이다.)에 궁궐을 짓고 성스러운 두 아이를 받들어 길렀다. 남자 아이는 알에서 태어났는데, 그 알이 박처럼 생겼다. 향인들이 바가지를 박(朴)이라 했기 때문에 성을 박씨로 했다. 여자 아이는 태어난 우물 이름을 따서 이름을 지었다.

 

두 성인이 열세 살이 되는 오봉(五鳳) 원년 갑자에 남자 아이를 왕으로 세우고, 여자 아이를 왕후로 세웠다. 그리고 나라 이름을 서라벌(徐羅伐 또는 서벌徐伐(지금의 풍속에 경京 자를 서벌이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또는 사라(斯羅) 또는 사로(斯盧)라고 했다.

 

처음에 왕이 계정(鷄井)에서 태어났으므로 계림국(鷄林國)이라고도 했는데 이것은 계룡이 상서로움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일설에는 탈해왕(脫解王) 때 김알지(金閼智)를 얻자, 숲 속에서 닭이 울었으므로 국호를 고쳐 계림이라 했다고 한다. 후세에 이르러 국호가 신라로 정해졌다.

 

박혁거세는 61년 동안 나라를 다스리다가 하늘로 올라갔는데 이레 후 시신이 땅에 흩어져 떨어졌고 왕후도 세상을 떠났다.(왕후는 경주의 오릉五陵에 혁거세와 같이 묻혀 있다고 한다.) 나라 사람들이 한 곳에 장사를 지내려 하자 큰 뱀이 쫓아다니며 이를 방해했다. 그래서 머리와 사지[五體]를 제각기 장사 지내 오릉(五陵)으로 만들었는데 이를 사릉(蛇陵 '삼국유사'에 나오는 '뱀'을 긍정적으로 본다면 뱀이야말로 합장을 막고 오릉을 만든 매개자이다.)이라고도 한다. 담엄사 북쪽의 능이 바로 이것이다. 그 후 태자 남해왕(南解王)이 왕위를 계승했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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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해이사금 왕릉/ⓒ경주문화관광
탈해이사금 왕릉/ⓒ경주문화관광

탈해치질금(脫解齒叱今, 토해이사금吐解尼師今이라고도 한다. '탈'은 '토吐'와 동음이며 '치'는 '이', '니'의 훈차자로서 치질금은 이사금, 이질금과 같은 뜻이다.)은 남해왕 때에(고본古本에 임인년에 왔다고 했으나 잘못된 것이다. -여기서 일연은 '삼국사기-신라본기'의 기술이 잘못되었음을 비판했다. 가까운 임인년이면 노례왕이 즉위한 뒤일 것이므로 서로 왕위를 양보하려고 다투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앞의 임인년이라면 혁거세의 시대다. 때문에 임인년이라 한 것은 틀렸음을 알 수 있다.) 가락국(駕洛國) 바다 한가운데 배가 와서 닿았다. 그 나라의 수로왕(首露王)이 신하와 백성들과 함께 북을 시끄럽게 두드리며 맞이하여 그들을 머물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배는 나는 듯 달아나 계림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阿珍浦, 지금도 상서지촌上西知村과 하서지촌下西知村이라는 이름이 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도 나오며 대왕암에서 3~4킬로미터 떨어진 곳이다.)에 이르렀다.

 

그때 마침 포구 가에 혁거세왕의 고기잡이 노파 아진의선(阿珍義先)이 있었다.

 

[노파가] 배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이 바다 가운데는 원래 바위가 없는데 무슨 일로 까치가 모여들어 우는가?"

 

배를 당겨 살펴보니 까치가 배 위에 모여 있었고 배 안에는 길이가 스무 자에 너비가 열세 자나 되는 상자가 하나 있었다. 아진의선이 배를 끌어다가 나무 숲 아래 매어 두고는 길흉을 알 수가 없어 하늘을 향해 고했다. 잠시 후에 열어 보니 반듯한 모습의 남자 아이가 있었고, 칠보(七寶, 불가의 일곱 가지 보물로서 금, 은, 유리琉璃, 마노瑪瑙, 호박琥珀, 산호珊瑚, 차거硨磲)와 노비가 가득 차 있었다.

 

이레 동안 잘 대접하자 아이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본래 용성국(龍城國) 사람입니다. (또는 정명국正明國 사람이라고도 하고 완하국琓夏國 사람이라고도 하는데, 완하는 화하국花夏國이라고도 한다. 용성국은 왜倭의 동북쪽 1,000리 지점에 있다. '삼국사기'에는 다파나국多婆那國이라고 했는데 일연의 주석처럼 일본과 관련 있는 나라이다.) 우리나라에 일찍이 스물여덟 용왕이 있는데, 사람의 태(胎)에서 출생하여 대여섯 살 때부터 왕위를 이어받아 온 백성을 가르치고 성명(性命)을 바르게 닦았습니다. 8품의 성골(姓骨)이 있으나 간택을 받지 않고 모두 큰 자리(大位, 왕위를 말한다.)에 올랐습니다. 이때 우리 부왕 함달파(含達婆)가 적녀국왕(積女國王)의 딸을 맞아 왕비로 삼았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없자 아들 구하기를 빌어 7년 만에 알 한 개를 낳았습니다. 그러자 대왕이 군신을 모아 묻기를 '사람이 알을 낳은 일은 고금에 없으니 길상(吉祥)이 아닐 것이다.'라고 하고, 궤짝을 만들어 나를 넣고 또한 칠보와 노비까지 배에 싣고 띄워 보내면서, '아무 곳이나 인연 있는 곳에 닿아 나라를 세우고 집안을 이루어라.'라고 축원했습니다. 그러자 문득 붉은 용이 나타나 배를 호위하여 이곳에 이른 것입니다."

 

말을 끝내자 아이는 지팡이를 짚고 노비 두 명을 데리고 토함산으로 올라가 돌무덤을 만들었다. [그곳에] 이레 동안 머물면서 성안에 살 만한 곳을 살펴보니 초승달 모양의 봉우리 하나가 있는데 오래도록 살 만했다. 그래서 내려가 살펴보니 바로 호공(瓠公,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그의 혈족과 성씨가 자세하지 않고 박을 허리에 매고 있었기에 붙은 이름으로 보았다.)의 집이었다. 이에 곧 계책을 써서 몰래 그 옆에 숫돌과 숯을 묻고 다음 날 이른 아침에 그 집에 가서 말했다.

 

"여기는 우리 조상이 대대로 살던 집이오."

 

호공이 그렇지 않다고 하자 이들의 다툼이 결판이 나지 않아 관청에 고발했다. 관청에서 물었다.

 

"무슨 근거로 너의 집이라고 하느냐?"

 

아이가 말했다.

 

"우리 조상은 본래 대장장이였는데, 잠깐 이웃 고을에 간 사이에 그가 빼앗아 살고 있는 것입니다. 땅을 파서 조사해 보십시오."

 

탈해의 말대로 땅을 파보니 과연 숫돌과 숯이 나왔으므로 [그는] 그 집을 빼앗아 살게 되었다. 이때 남해왕은 탈해가 지혜로운 사람임을 알아보고 맏공주를 아내로 삼게 하니, 이 사람이 아니부인(阿尼夫人)이다.

 

어느 날, 토해(吐解, 여기서 '토해'는 '탈해'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가 동악(東岳)에 올랐다가 돌아오는 길에 하인[白衣]에게 마실 물을 떠오게 했다. 그런데 하인이 물을 길어 오면서 도중에 먼저 맛보려 하자 입에 잔이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탈해가 꾸짖자 하인이 맹세했다.

 

"이후로는 가깝든 멀든 감히 먼저 물을 맛보지 않겠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입에서 잔이 떨어졌다. 그 뒤로 하인은 두려워 감히 속이지 못했다. 지금 동악에 세속에서 요내정(遙乃井)이라 부르는 우물이 바로 그곳이다.

 

노례왕이 죽자 광무제(光武帝) 중원(中元) 2년 정사년(57년) 6월 탈해가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옛날 내 집이었다고 하여 다른 사람의 집을 빼앗았기 때문에 성을 석씨(昔氏)라 했다. 어떤 사람은 까치로 인해 상자를 열었기 때문에 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버리고 성을 석(昔)씨로 했으며(이병도설에 의하면 까치는 길조요 예지豫智의 새이므로 이를 토템으로 삼은 것 같기도 하다.), 상자 속에서 알을 깨고 출생했기 때문에 탈해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왕위에 있은 지 23년째인 건초(建初, 후한 장제章帝 유달劉炟의 연호다.) 4년 기모년 79에 죽은 뒤 소천구(疏川丘)에 장사 지냈다. 그 이후에 신(神)이 말했다.

 

"내 뼈를 조심해서 묻으라"

 

두개골의 둘레가 세 자 두 치, 몸통뼈의 길이는 아홉 자 일곱 치에 치아는 하나로 엉켜 있었으며, 뼈마디는 사슬처럼 이어져 있어 이른바 천하에 둘도 없는 장사의 골격이었다. 뼈를 부수어 소상(塑像)을 만들어 대궐 안에 안치하니, 신이 또 말했다.

 

"내 뼈를 동악에 두라.(탈해왕릉은 경주시 동천동 금강산의 길가에 큰 소나무를 배경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그곳에 받들어 모셨다.

이런 말도 있다. [탈해왕이] 죽은 뒤 27대 문무왕 대 조로調露 2년 경신년(680년) 3월 15일 신유일辛酉日 밤, 태종의 꿈에 매우 위엄 있고 사나워 보이는 한 노인이 나타나 "나는 탈해왕이다." 내 뼈를 소천구에서 파내 소상을 만들어 토함산에 안치하라."라고 했다. 왕이 그의 말대로 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국사國祀가 끊이지 않았으니, 이를 동악신東岳神이라고도 한다.

-삼국유사 권 제1 기이(紀異)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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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성대왕 괘릉(掛陵)/ⓒ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찬(伊湌, 신라 17관등 중 두 번째로 높은 관직으로 진골만 오를 수 있었다. 이척찬(伊尺飡) 혹은 이간(伊干), 일척간(一尺干), 이찬(夷粲)이라고도 한다.) 김주원(金周元)이 처음에 상재(上宰)가 되었고 원성왕(元聖王)은 각간(角干, 신라 17관등 중 첫 번째로 높은 관직으로 일명 이벌간(伊罰干),우벌찬(于伐飡),이벌찬(伊伐飡),각간(角干),각찬(角粲),서발한(舒發翰),서불한(舒弗邯)이라 하였다.)으로 상재의 다음 자리에 있었다. 원성왕은 꿈에 복두(幞頭, 두건의 일종으로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처음 만들었으며, 귀인이 쓰는 모자의 하나로 보면 된다.)를 벗고 흰 삿갓을 쓰고 12현의 가야금을 들고 천관사(天官寺) 우물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꿈에서 깨어나 사람을 시켜 풀이하게 했더니 이렇게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직책을 잃을 조짐이고, 가야금을 든 것은 칼집을 쓸 조짐입니다. 우물에 들어간 것은 옥에 갇힐 조짐입니다."

 

원성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근심하여 문을 닫고는 나가지도 않았다. 이때 아찬(阿飡, 신라 17관등 중 6번째 관직으로 일명 아척간(阿尺干)·아찬(阿粲)이라고도 하였다.) 여삼(餘三 혹은 여산餘山이라고도 한다.)이 와서 뵙기를 청했다. 원성왕은 병 때문에 나갈 수 없다고 거절했다. 아찬이 다시 한 번 만나기를 청하여 왕이 허락했다.

 

아찬이 말했다.

"공께서 꺼리는 일이 무엇입니까?"

원성왕은 꿈을 풀이한 일을 자세히 말했다. 그러자 아찬이 일어나 절을 하면서 말했다.

"이는 바로 길몽입니다. 공께서 만약 왕위에 올라 저를 버리시지 않는다면 공을 위해 해몽해 드리겠습니다."

 

왕은 주의 사람들을 물러가게 하고 풀이해 줄 것을 청했따. 아찬이 말했다.

"복두를 벗은 것은 그 위에는 사람이 없는 것이고, 흰 삿갓을 쓴 것은 면류관을 쓸 징조입니다. 또한 12현의 가야금을 지닌 것은 12손(孫, 원성왕이 내물왕의 12세손이 된다는 뜻이다. '삼국사기'에 의거)이 왕위를 전해 받을 징조이고, 천관사 우물에 들어간 것은 궁권로 들어갈 좋은 징조입니다."

 

왕이 말했다.

"위로는 김주원이 있는데 어떻게 임금 자리에 오를 수 있단 말인가?"

 

아찬이 말했다.

"청컨대 몰래 북천신(北川神)에게 제사를 지내십시오."

 

왕은 아찬의 말에 따랐다.

얼마 후 선덕왕이 죽자 나라 사람들이 김주원을 왕으로 삼아 궁궐로 맞아들이려고 했다. 그의 집은 북천 북쪽에 있었는데 갑자기 시냇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그래서 왕이 먼저 궁궐로 들어가 즉위하자 대신의 무리들이 모두 따라와서 새로 즉위한 임금에게 절을 하고 축하했다. 이 사람이 바로 원성대왕(元聖大王, 재위 785~798)이다. 대왕의 이름은 경신(敬信)이고 성은 김씨인데, 꿈의 응험이 맞았던 것이다.

 

김주원은 물러나 명주(溟州, 지금의 강원도 강릉 지역)에서 살았다. 왕이 등극했을 때, 여산은 이미 죽었으므로 그의 자손을 불러 벼슬을 내렸다. 왕에게는 손자가 다섯이니 혜충태자(惠忠太子), 헌평태자(憲平太子), 예영잡간(禮英匝干), 대룡부인(大龍夫人), 소룡부인(小龍夫人) 등이다. 대왕은 참으로 인생의 곤궁하고 영화로운 이치를 알았기 때문에 신공사뇌가(身空詞腦歌,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를 지었다.

 

왕의 아버지 대각간(大角干) 효양(孝讓)이 조종의 만파식적을 전해 받아 왕에게 전했다. 왕은 만파식적을 얻었기 때문에 하늘의 은혜를 받아 그 덕이 원대하게 밫났다. 정원(貞元, 당唐나라 덕종德宗 이적李適의 연호로 785~805년까지 사용) 2년 병인년(786년) 10월 11일, 일본의 왕 문경(文慶, '일본제기日本帝記'를 보면, 제55대 문덕왕文德王이 이에 해당되는 듯하다. 그 이외에는 문경이 없는데, 어떤 책에는 왕의 태자라고 하기도 한다.)이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했는데, 신라에 만파식적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군사를 돌리고 금 50냥과 함께 사신을 보내 그 피리를 청했다. 왕이 사신에게 말했다.

 

"짐은 선대인 진평왕 대에는 있었다고 들었으나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다."

 

이듬해 7월7일, 다시 사신을 보내 금 천 냥으로 만파식적을 청하며 말했다.

"과인이 신물(神物)을 보고 난 후 다시 돌려드리겠소."

 

왕은 역시 이전과 같은 대답으로 사양하고, 은 3,000냥을 사신에게 주어 금과 함께 돌려보냈다. 8월에 사신이 돌아가자 피리를 내황전(內黃殿)에 보관했다.

 

왕이 즉위한 지 11년 을해년(795년)에 당나라 사신이 서울에 와서 한 달 동안 머물다가 돌아갔는데, 다음 날 두 여자가 내정(內庭)에 나와 아뢰었다.

 

"저희들은 바로 동지(東池)와 청지(靑池, 청지는 바로 동천사東泉寺의 샘이다. 그 절의 기록에, 우물은 바로 동해의 용이 왕래하면서 설법을 듣는 곳이라 했다. 이 절은 바로 진평왕이 만든 것으로 500성중聖衆, 5층탑, 전민田民을 아울러 바쳤다고 한다.)의 두 용의 아내입니다. 당나라 사신이 하서국(河西國, 티베트계통의 당항黨項, 탕구트) 사람 두명을 데리고 와서 우리 남편인 두 용과 분황사 우물(이 우물은 지금도 분황사에 남아 있다.)의 용 등 세 용을 저주하여 작은 물고기로 변하게 하여 통 속에 담아 가지고 돌아갔습니다. 원하옵건대 폐하께서는 두 사람에게 명령하여 저희 남편을 비롯하여 나라를 지키는 용을 돌려주게 하십시오."

 

왕은 뒤쫓아 하양관(河陽館, 경상북도 영천 서쪽인 하양에 있어던 관사)에 이르러 직접 연회를 열고 하서국 사람에게 명령했다.

 

"너희는 어찌하여 우리의 용 세 마리를 이곳까지 데리고 왔느냐? 만약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반드시 극형에 처하겠다."

 

그러자 하서국 사람은 물고기 세 마리를 꺼내 바쳤다. 세 곳에 놓아 주자 제각각 한 길씩이나 뛰어오르고 기뻐하며 사라졌다. 당나라 사람들은 왕의 성스럽고 명철함에 감복했다.

 

어느 날 왕은 황룡사(皇龍寺, 어떤 책에는 화엄사華嚴寺 또는 금강사金剛寺라고 했는데, 절 이름과 경經 이름을 혼동한 것이다.)의 승려 지해(智海)를 궁궐로 청하여 50일 동안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게 했다. 사미(沙彌, 출가하여 정식 승려가 되기 전에 수련 중인 남자 승려) 묘정(妙正)은 항상 금광정(金光井, 대현법사大賢法師로 인해 얻은 이름이다.)에서 그릇을 씻었는데, 자라 한 마리가 샘 가운데에서 떴다 잠겼다 했다. 모정은 늘 먹다 남응ㄴ 밥을 자라에게 주면서 놀곤 했다. 법연이 끝나 돌아가게 되자 사미가 자라에게 말했다.

 

"내가 너에게 며칠 동안 덕을 베풀어 주었는데 어떻게 갚겠느냐?"

 

며칠 후 자라는 작은 구슬 한를 토해 주었다. 사미는 그 구슬을 허리띠 끝에 매달았다.

 

이후부터 대왕은 사미를 보면 애지중지하여 내전으로 불러들여 항상 곁에 두었다. 이때 한 잡간(匝干, 신라 17관등 중 3위 관등)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는데, 역시 사미를 사랑하여 함께 데리고 가기를 청했다. 왕이 허락하여 잡간은 사미와 같이 당나라로 들어갔다.

 

당나라 황제 역시 사미를 보자 총애하고, 승상과 좌우 신하들이 모두 존경하고 신임했다.

그런데 관상을 보는 사람 하나가 황제에게 아뢰었다.

 

"사미를 살펴보건대, 길상(吉相)이 하나도 없는데 다른 사람에게 존경과 신임을 받으니, 반드시 특별한 물건을 지니고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 조사해 보니 사미의 허리띠 끝에서 작은 구슬이 나왔다.

황제가 말했다.

 

"짐에게는 여의주 네 개가 있었는데 지난해에 한 개를 잃어버렸다. 지금 이 구슬을 보니 바로 내가 잃어버린 것이다."

 

황제가 사미에게 묻자 사미는 그 일을 사실대로 아뢰었다. 황제가 말했다.

 

"구슬을 잃어버린 날과 사미가 구슬을 얻은 날이 같다."

 

그 구슬을 빼았고 사미를 쫓아냈는데 그 뒤로는 아무도 사미를 사랑하거나 신임하지 않았다.

 

왕의 능은 토함산 서쪽 동곡사(洞鵠寺, 지금의 숭복사崇福寺다.)에 있는데(그의 능은 물이 차 있어 관을 땅에 묻지 못하고 걸어 놓았다고 하여 괘릉掛陵이라고 부른다.)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또한 왕은 보은사(報恩寺)를 창건하고, 망덕루(望德樓)를 세웠다. 조부 훈입(訓入) 잡간을 추봉하여 흥평대왕(興平大王)으로, 증조부 의관(義官) 잡간을 신영대왕(神英大王)으로, 고조부 법선대아간(法宣大阿干)을 현성대왕(玄聖大王)으로 삼았는데, 현성대왕의 아버지가 곧 마질차(摩叱次) 잡간이다.

-삼국유사 권 제2 紀異 제2-

 

[함께 보기: 만파식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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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도화녀와 비형랑'/ⓒ한국학중앙연구원

 

제25대 사륜왕(舍輪王)의 시호는 진지대왕(眞智大王)이고 성은 김씨다. 왕비는 기오공(起烏公)의 딸인 지도부인(知刀夫人)이다. 태건(太建, 남조南朝 진陳나라 선제宣帝의 연호) 8년 병신년(576년)에 즉위하여 4년 동안 나라를 다스렸는데,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음란하여 나라 사람들이 왕을 폐위시켰다.

 

진지왕릉/25대 진지왕과 46대 문성왕이 함께 묻혀있는 무덤/사적 제517호(진지왕릉), 사적 제518호(문성왕릉)/ⓒ경주문화관광

 

이보다 앞서 사량부(沙梁部)의 민가의 여인이 얼굴이 고와 당시 도화랑(桃花娘)이라 불렸다. 왕이 이 소문을 듣고 궁중으로 불러 관계를 맺으려 했다. 그러자 여인이 말했다.

"여자가 지켜야 할 것은 두 남편을 섬기지 않는 것입니다. 설령 천자의 위엄이 있다 해도 남편이 있는데 다른 사람에게 가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왕이 말했다.

"너를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여인이 말했다.

"차라리 저자에서 죽어 딴마음이 없기만을 바랍니다."

왕은 여인을 희롱하여 말했다.

"남편이 없으면 되겠는가?"

"됩니다."

그래서 왕은 여인을 놓아 보냈다.

이해에 왕이 폐위되고 죽고, 2년 뒤에 여인의 남편 역시 죽었다.

열흘 남짓 지난 어느 날 밤에 왕이 생시와 똑같은 모습으로 여인의 방에 와서 말했다.

"네거 지난번 약속한 바와 같이 이제 네 남편이 죽었으니 되겠는가?"

여인이 좀처럼 승낙하지 않고 부모에게 여쭙자 부모가 말했다.

"임금의 명령을 어떻게 피하겠는가?"

그리고 딸을 방으로 들여보냈다.

임금은 이레 동안 그곳에 머물렀는데, 항상 오색 구름이 지붕을 감싸고 방 안에 향기가 가득했다. 그런데 이레 후 왕이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여인이 이로 인해 임신하여 달이 차 곧 해산하려고 하자 천지가 진동했다. 사내아이를 낳으니 이름을 비형(鼻荊)이라 했다. 진평대왕(眞平大王)은 아이가 매우 특이하다는 말을 듣고는 거두어 궁중에서 길렀다. 열다섯 살이 되자 집사(執事) 벼슬을 주었다. 그런데 비형이 매일 밤마다 먼 곳으로 달아나 놀자 왕이 날랜 병사 쉰명에게 지키게 했다. 그러나 비형은 매일 월성을 넘어 서쪽 황천(荒川, 경성 서쪽, 지금의 경주 남천 하류인데 신원사 터가 보이는 곳이다.) 언덕 위로 가서 귀신들을 거느리고 놀았다. 날랜 병사들이 숲 속에 숨어서 엿보니, 귀신들이 여러 절의 종소리를 듣고 각기 흩어지면 비형랑 역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군사들이 와서 이런 일을 아뢰니 왕이 비형랑을 불러 물었다.

"네가 귀신들을 거느리고 논다는 것이 사실이냐?"

비형랑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왕이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귀신들을 시켜 신원사(神元寺, 경주시 탑정동에 있다.) 북쪽 시내에 다리를 놓아라."

비형은 왕의 명령을 받을어 귀신들에게 돌을 다듬게 하여 하룻밤 사이에 큰 다리를 놓았다. 그래서 그 다리를 귀교(鬼橋)라고 불렀다.

왕이 또 물었다.

"귀신들 중에서 인간 세상에 나와 정치를 도울 만한 자가 있느냐?"

비형이 대답했다.

"길달(吉達)이란 자가 있는데 나라의 정사를 도울 만합니다."

왕이 말했다.

"데려 오너라."

이튿날 비형이 길달과 함께 나타나자, 왕은 그에게 집사의 벼슬을 내렸다. 길달은 과연 충직하기가 세상에 둘도 없었다.

이때 각각(角干, 신라 관등의 제1위인 이벌찬伊伐飡) 임종(林宗)에게 자식이 없었으므로 왕은 길달을 대를 이을 아들로 삼게 했다. 임종이 길달에게 흥륜사(신라 초기 불교 사찰의 중심으로 진흥왕 5년 544년에 세웠으며 경주시 사정동에 터만 남아 있다.) 남쪽에 누문(樓門)을 짓게 하자, 길달은 매일 밤 그 문 위에 가서 잤다. 때문에 이름을 길달문(吉達門)이라 했다. 하루는 길달이 여우로 둔갑해 도망치자 비형은 귀신을 시켜 붙잡아 죽였다. 그래서 귀신들은 비형의 이름만 듣고도 무서워 도망쳤다. 그때 사람들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성스러운 임금의 넋이 아들을 낳았으니,

비형랑의 집이 여기로세.

날뛰는 온갖 귀신들이여,

이곳에는 함부로 머물지 마라.

 

만간에서는 이 가사를 써 붙여 귀신을 쫓곤 한다.('처용랑과 망해사' 조에도 처용의 얼굴을 붙여 귀신을 쫓았다는 내용이 있다.)

 

-삼국유사 권1 기이 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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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불국사/경주시>


<사진 석굴암/경주시>


먼 옛날 신라시대 신문왕 때입니다.

모량리라는 마을에 대성이라는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홀어머니를 모시고 가난하게 살아 갔지만, 효심도 지극하고 바른 청년이었습니다.



어느 날 흥륜사의 한 스님이 보시를 받으러 집에 오셨습니다.

보시 할 것이 없던 가난한 대성은 안타까운 마음이었습니다.

"제가 품삯으로 받은 집 근처의 작은 밭이 하나 있어요. 그걸 보시하고 싶습니다."

스님은 환한 웃음을 지었습니다.


며칠 후 대성은 이유 없이 앓다가 죽게 되었습니다.

대성이 죽던 날 신라의 재상인 김문량은 아내와 집 앞 마당을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하늘에서 불호령 같은 소리가 들렸습니다.

"모량리에 살았던 김대성이 너의 집에 태어나리라"


김문량은 놀라워하며, 아내를 쳐다보았습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내는 갑자기 입덧을 하더니,

행복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김문량의 집에 태어난 대성은 어느새 청년으로 자랐습니다.

청년이 된 대성은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어느날 사냥을 나간 토함산 기슭에서 곰 한마리를 만났습니다. 자신보다 큰 몸집을 가진 곰을 사냥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대성은 사냥에 성공합니다.

그는 사냥에 지친 팔다리를 쉴 겸 사냥한 곰을 옆에 두고 그늘에 잠시 누웠습니다.

'큰 곰을 사냥했다고 하면 어머니도 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야'

대성은 흐뭇한 마음으로 누워 있다가 어느새 잠에 빠져들었습니다.



곰이 피를 흘리며 잡아먹겠다며 무섭게 으르렁 거렸습니다.

대성은 두려움에 떨며 살려달라고 애원했습니다.

그러자 곰이 말하기를,

"내가 당신을 살려 줄 터이니, 나를 위해 절을 하나 지어 줄 수 있겠소?"



대성은 비명을 지르며 눈을 떴습니다.

꿈에서 깨어난 대성은 깊은 생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사냥을 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김대성은 이후 곰을 사냥했던 그 장소에 장수사라는 절을 짓도록 하였습니다.

이 일로 깨달음을 얻은 김대성은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를 낳고 길러주신 부모님의 은혜에 무언가 나도 보답을 해야 해"




김대성은 현생이 부모님을 위해 불국사를 지었고,

전생의 부모님을 위해 석불사(지금의 석굴암)를 세우게 되었습니다.



유명한 불국사와 석굴암은 김대성이 부모님에 대한 효심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김대성의 불국사와 석굴암 창건 설화는 실제로 '삼국유사' 대성효이세부모조(大成孝二世父母條)에 전하는 이야기 입니다./출처 경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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