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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이불개 過而不改, 시의과의 是謂過矣.


잘못을 하고도 고치지 않는다면, 그것이 곧 잘못이다.


-공자 논어(論語), 위령공편(衛靈公篇) 29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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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맹자/네이버]


 맹자의 성선설

 사람은 누구나 남에 대하여 '차마 해치지 못하는 마음(不忍之心)'이 있다. 옛날 선왕(先王)은 이 불인지심이 있어서 남들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정치가 있게 되었다. 정치인이 불인지심을 가지고 남에게 잔인하게 하지 못하는 정치를 하면, 세상을 다스리는 일은 이것을 손바닥 위에서 움직이는 것처럼 쉬울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누구나 다 남에 대하여 불인지심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어떤 사람이 한 아이가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것을 별안간 보았을 때 놀라고 측은한 마음이 생겨 가서 붙든다. 이것은 어린 아이의 부모와 교제를 맺기 위한 것도 아니요, 동네 사람들과 벗들에게 칭찬을 받기 위한 것도 아니요, 또 그냥 내버려 두었다고 원망하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렇게 한 것도 아니다.

 이런 것에 의해서 살펴보면 사람치고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부끄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사양하는 마음(辭讓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요, '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마음(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측은지심은 인(仁)의 단서요, 수오지심은 의(義)의 단서요, 사양지심은 예(禮)의 단서요, 시비지심은 지(智)의 단서이다. 사람들이 이 사단(四端)을 지니고 있는 것은 마치 몸에 사지(四肢)가 있는 것과 같다. 이 사단을 지니고 있으면서 내 스스로가 선한 일을 잘 할 수 없다고 하는 이는 그 임금을 해치는 사람이다.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사단을 확충시킬 줄 알면 이것은 마치 불이 타서 번져 나가고 샘물이 솟아서 흘러가는 것과 같다. 정말 이것을 잘 확충시킬 줄 안다면 사해(四海)를 보존할 수 있을 것이요, 만약 이것을 확충시키지 못한다면 부모도 제대로 섬기지 못할 것이다.[맹자,공손추상/동양철학산책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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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공자/네이버 지식백과]

 

공자와 맹자-고대 유가 사상

1)자연과 인간의 선성

 

유가 이전의 상고시대에는 복록수(福祿壽)로 표징되는 행복한 삶과 수덕(修德)으로 표징되는 도덕적 삶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었고 명목에서나 실질에서나 그 두 가지 모두가 위정자가 추구해야 할 바의 것이었다. 그러나 도덕과 행복을 동시에 추구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는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적 경향이 자리를 잡으면서 점차 약해지기 시작하였고 종국에는 오로지 도덕적 삶에 충실한 삶만이 인간 본연의 자세이자 바람직한 삶으로 여겨지기에 이르렀다. '논어'나 '맹자'를 시작으로 하는 유가 계통의 문헌에서 도덕적 삶에 대한 언급은 넘쳐흘러도 행복한 삶에 대한 언급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공자 내지 유가 사상이 행복한 삶을 무시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공자는 전쟁과 하극상이 끊이없이 벌어졌던 혼란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세상 사람들이 겪는 삶의 고통과 불행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수없이 목도하였다. 그런데 그는 그 모든 원인이 위정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부패에 있다고 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공자는 그러한 세상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도덕을 바로 세우는 것이 필요했고, 왜 그것이 마땅하고 사람으로서 해야 할 본연의 것인지를 밝히는 것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공자는 우주와 사람이 갖는 본연의 모습을 밝혀 그것을 기초로 사람들 특히 위정자들을 교화하고자 힘썼고 그러한 교화에 앞장 설 지식인들을 키우는 데에 평생을 바쳤다.

 

[사진 맹자/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면 이러한 공자의 사상의 근간에 자리 잡은 우주 자연의 본연의 모습은 무엇일까? 공자의 가르침을 표상하는 유가적 전통은 우선 우리를 둘러싼 우주 자연을 평화롭고 생명력이 가득한 유기체로 파악한다. 사실 이것은 유가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동양 사상의 공통된 전제이다. 그런데 유가 사상에서 좀 독특한 것은 그러한 생명력이야말로 선한 것 중의 선한 것이라는 점이 강조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데 유가는 우주 자연의 생명력을 어질다거나(仁) 성실하다고(誠) 표현한다. 곧 유가에게 우주 자연은 지극히 선한것, 최고선이다. 유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우주 자연의 품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 모습을 닮는다. 인간도 우주 자연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그 속성을 보존하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주 자연에 깃든 생명력의 본질은 인간의 본질이 된다. 그것이 선천적으로 인간에게 주어진 도덕성이고, 그렇기 때문에 인간의 본질은 선하다.

 물론 인간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무릇 우주 자연의 품에서 태어나 생명 있는 것들은 모두 마찬가지다.(이 주장에 대해서는 유가 내부에서도 이견이 있다.) 하지만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는 본질만 있는 것이 아니라 육체 같은 기적 질료(氣質)가 있고, 그것에 기인하는 욕망과 감정이 있으며, 생각하고 판단하는 의식 주관, 곧 마음이 있다. 모든 존재에 동일한 것은 본질이지 기질이나 마음이 아니다. 인간과 다른 존재의 차이는 실상 이 기질과 마음에서 발생한다. 유가는 인간의 기질과 마음이 다른 어떤 존재보다도 뛰어나다고 생각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어느 것보다도 자신에게 주어진 선천적 도덕성을 잘 발휘할 수 있는 존재, 도덕적 존재가 된다. 곧 인간은 동물과 같이 욕망과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기질이 가장 깨끗하기 때문에 동물보다 순화된 욕망 및 감정 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다른 동물은 의식 주관이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신의 도덕적 본성을 반성하지 못하지만 인간은 의식 주관이 발달했기 때문에 자신의 도덕적 본성을 반성하여 그에 걸맞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마음은 이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고, 저쪽으로도 움직일 수 있다. 말하자면 의식 주관은 행위를 이런 방향으로도 저런 방향으로도 이끌어 갈 수 있다. 하지만 마음이 인간의 본질을 향해 움직이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마음이 인간의 본질을 자각하여 그 본질을 반영하는 행위를 선택한다는 것은 곧 우주 자연의 도덕성, 생명력을 살려 내는 길이고, 그를 통해서 모든 만물을 길러 내는 천지의 사업에 동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인간은 천지와 함께 우주를 떠받치는 세 기둥(三才)이 될 수 있으며, 그 생명력이 사회적으로 전파되어 태평한 세상을 만들 수 있고, 개인적으로도 영원함과 합치되어 참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행복에 이르는 지혜, 이정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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