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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사회에서는 도시적 여건을 갖춘 읍성이 많지 않은데다가 농촌을 배후지로 하고 있었고, 이로 인해 양자 간에는 경제적인 의존관계가 높았기 때문에 분산된 구매력을 모아 장을 상설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간혹 교통이 발달한 행정 중심지의 경우는 수요자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장날 간격을 5일보다 더 줄여 2~3일 간격으로 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전라도의 중심지인 전주나 나주의 경우가 그러하였다.




전주는 서울, 평양, 개성 등과 함께 상설점포라고 할 수 있는 시전이 있었던 곳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주민들이 이용하는 전주읍장은 상설화되어 있지 않아 동문, 서문, 남문, 북문 등 사대문의 입구에서 번갈아 장이 열렸는데, 2일에는 남문 밖, 4일에는 북문 밖, 7일에는 서문 밖, 9일에는 동문 밖에 장이 섰다. 그 중에서도 2일과 7일에 열리는 장은 큰 장으로, 4일과 9일에 열리는 장은 작은 장으로 각각 부렸다. 나중의 읍내장도 2일, 4일, 7일, 9일 등 열흘에 네 번 열려 다른 곳에 비하면 배나 자주 열렸다.


[함께보기: 오일장의 역사]


전라도 부안은 규모가 큰 군은 아니지만 해안을 끼고 있어 생산물이 풍부한데다가 교통의 요충지여서 이곳 역시 읍내장을 둘로 나누었다. 장날을 보면, 읍내상장(邑內上場)은 2 · 7일에, 읍내하장(邑內下場)은 4 · 9일에 열리므로 결국 열흘에 네 번 여는 셈이다.

오일장은 정기시장인데, 구체적으로는 한 달을 30일로 잡아 여섯 번, 열흘을 단위로 하면 두 번 여는 장이다. 장날은 주변 장을 고려하여 상인들이 순환할 수 있도록 하였다. 그래서 매달 1일, 6일, 11일, 16일, 21일, 26일 등 6일을 여는 장이 주변에 있으면 2일, 7일, 12일, 17일, 22일, 27일 등 5일 간격으로 장을 열게 되며, 여기에 들른 상인은 다음 날은 매달 3일과 8일이 들어가는 날에 여는 장으로 이동한다.


정기시장과 그 주기는 세 가지 원리에 의해 형성된다. 중국대륙의 장시체계를 연구한 스키너(G. W. Skinner)는 전통 농민사회의 시장이 정기성(定期性)을 띠는 원인에 대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설명하였다.


첫째는 공급자, 즉 생산자나 상인의 입장으로, 이들이 하나의 시장에만 의존하기에는 이익이 불충분하다는 점이다. 시장이 정기적으로 열리면 공급자는 서로 다른 개시일을 이용하여 판로를 여러 개의 시장에 의존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이러한 정기시는 대량생산자나 순회상인이 아닌 소규모 생산자로서의 농민에게도 이점이 있다. 예를 들어 집에서 키우는 몇 마리의 닭이 낳은 달걀은 매일같이 시장에 나가 팔 만큼의 수량이 되지 못한다. 농민의 생산규모는 이와 같이 5일 간격으로 열리는 시장 하나에만 의존하더라도 충분하며, 그 대신 하나의 시장에서 많은 고객을 대할 수 있어 좋은 것이다.


둘째는 소비자의 입장으로, 시장의 정기성은 여행거리를 줄이는 방법이 된다. 농민들의 전통적인 소비규범은 검약을 강조하며, 또 자급자족적인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시장에 매일 나갈 필요가 없다. 하나의 시장권 내에 있는 가구의 수가 증가하여 상인의 입장에서는 장을 매일 열어 상설화하기에 충분한 수준까지 도달한다고 하더라도, 농민 소비자의 입장에서는 그들의 소비형태가 여전히 이전과 같아 5일 간격의 장에 어떠한 불편도 느끼지 못한다면 그러한 변화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셋째는 교통 · 운송수단으로, 정기시장은 그것이 발달하지 않은 지역에서 그 기능을 수행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교통 · 운송수단이 아무리 발달해 있어도 농촌의 인구는 분산되어 있기 때문에 거리 이동에 많은 비용이 든다. 그러므로 교통비와 시간을 아끼려는 농민들과 단순한 생계수단으로 장사를 계속하는 영세상인이 존속하는 한 농촌의 정기시장은 계속 그 기능을 발휘할 것이다.


수원의 우시장은 전국적으로 이름난 곳이다. 장날이면 각지에서 소장수와 농민들이 몰려들어 언제나 성시를 이루었다. 수원의 우시장은 일반장과 함께 서는데, 성내(城內) 시장은 10일 간격인 9일, 19일, 29일에, 성외(城外) 시장도 역시 10일 간격인 4일, 14일, 24일에 열어 합치면 5일장을 여는 셈이 된다.


[도리도표/ⓒ한국학중앙연구원]

서울을 기점으로 주요 대로상의 거점과 거리를 표로 그린 첩으로,

상인이나 여행객이 지참했던 19세기 유물이다.


[도리도표/ⓒ한국학중앙연구원]

조선 순조 연간에 제작된 8도전도의 도리도표첩. 채색목판본


위와 같이 상거래가 활발한 지역에서 정기시장의 개시일이 늘어나는 현상은 당연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상설화되지 않고 분설(分設)되어 간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수요자인 농민의 특성이 반영되어 있기 때문이며, 상인의 입장에서도 시장이 포섭할 수 있는 지역적인 범위를 넓히고 거래를 통해 발생하는 이익을 골고루 나눌 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6대로(大路), 또는 이후의 10대 간선도로 중에 서울에서 호서와 호남으로 향하는 도로는 수원을 거쳐 간다. 서울에서 서남쪽으로 나 있는 6대로의 하나인 제5대로 제주로는 1770년에 나온 신경준의 '도로고(道路考)'에 의하면 한성에서 출발하여 동작진을 건너 과천에 이르고, 사근천을 건너 수원에 도착하면 그 다음은 진위-소사점-아주교-성환역-직산-천안-차령-공주-니성-여산-삼례역-태인-정읍-장성-영암-해남-제주에까지 이른다. 이책은 화성건설 이전에 나왔기 때문에 여기서 수원은 화성 축조 이전의 구읍(舊邑)을 가리키는 것이다. 구 읍치 남쪽 아래의 황구지천을 건너면 독산성이 있기 때문에 황구지천을 건너기 위해 설치한 다리가 세람교이다.


장길은 두 장시를 지름길로 연결한다. 경기지역 장시의 연결은 서울을 구심점으로 방사선을 이루고 있었다. 다른 지역과 달리 이웃하는 장의 개시일이 지방의 장들과는 달리 순차적으로 연결되어 있지 않은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수원장 역시 정조의 화성 축조 이전에는 이웃 장들과 마찬가지로 서울로 모이는 선사으이 한 장에 불과하였으므로 포섭범위는 비교적 넓었지만 주변 장들의 중심을 차지한 것은 아니었다. 화성 축조 이전의 옛 수원장 자리는 구 읍치에 있어 현 위치보다 남쪽 아래로 위도상 남양장과 나란히 하고 있어 서로 대등한 위치에 있었고, 따라서 서울을 향해 올라가는 물자들이 남양장과 수원장을 모두 거칠 수 없었다.

화성 축성 이전에 서울을 떠나는 주요 시발점은 양재역(良才驛)이었으며, 광주에 이르러 용인과 수원 방면으로 길이 나뉘었는데, 그 분기점이 낙생역(樂生驛)이다. 광주를 거쳐 경상도 동래로 향하는 역로는 조선 말엽까지 그대로 존속되었다. 즉 용인 구흥(駒興)과 김령(金嶺)을 경유하여 죽산과 음죽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수원을 경유하는 역로는 양재역에서 시작하여 용인을 거쳐 삼남으로 향하는 대로(大路) 도중에 낙생역이나 구흥역에서 분기(分岐)하는 간로(間路)였다.

본래 옛 수원과 남양의 치소(治所)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다. 남양은 서해로 돌출한 반도이기 때문에 육로를 통해 수원으로도 갈 수는 있지만 서울이 목적지인 경우는 옛 수원장을 경유해야 할 이유가 없다. 유통체계로 볼 때 화성 축조 이전까지 세람교는 육로로 올라온 남쪽의 물산들이 수원구읍에 이르는 마지막 관문에 해당한다. 세람교를 건넌 물자들은 동북쪽으로 과천을 통과하여 올라간 것이 아니라, 서북쪽으로 현 화성시 봉담면 동화리에 있던 동화역을 지나 매송면 어천리를 거쳐 노량진을 향해 올라갔다.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역을 수원의 읍치로 천장(遷葬)함과 동시에 화성이라는 신도시를 건설하고 원행로(園幸路)를 새로 개설하였는데, 이것이 호서와 호남으로 가는 대로와 신작로가 생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화성을 통과한 역로는 팔달문을 나와 수원천을 따라 남진하게 되었으며, 이를 계기로 수원은 광주(廣州)와 더불어 삼남으로 가는 주요 길목으로 부각되었다.

화성 건설로 수원 인근의 장시체계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조선 후기 수원을 중심으로 하는 장시는 북쪽으로 서울 방면, 동쪽으로 용인 방면, 남서쪽으로 남양 방면, 그리고 남쪽으로 평택 방면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장시들은 모두 삼남에서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이 구조에서 서울방면 외에 나머지 세 방면은 화성 건설 이후에 변화를 겪는데, 그것은 수원장과 일정한 관계를 맺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변화는 구 읍치를 화성으로 이읍(移邑)한 데 따른 결과이다.


송파는 한강, 동빙고, 용산, 마포 등과 더불어 한강의 오강(五江)이라고 하였다. 송파를 거점으로 한강을 오르내리는 수운(水運)은 강원도까지 닿았고, 마행상(馬行商)들은 이곳을 기점으로 전국을 돌았다. 장날이면 이러한 마행상인들과 뱃사람들이 들끓어 270여 호의 객줏집이 성업을 이루었다고 한다. 송파장은 원래 오일장이므로 본장날은 하루지만, 그 전날과 다음 날 물선을 실어 오고 내가는 화물과 상인들로 붐볐으므로 거의 상설화하다시피 한 것이다. 서울로 공급되는 경기도 남동부의 쌀 · 숯 · 담배 · 소 · 채소 · 곡식 등이 모두 송파나루를 건넜다.


1900년을 전후로 경인선 및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는 등 운손수단의 발달과 교통로의 변화로 송파장의 경기는 후퇴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서는 서울 장안 곳곳에 상점이 들어서면서 상권이 분산되어 갔다. 또 상권이 약화되자 행상인들은 직접 물건을 들고 경성시내를 돌아다녀 송파장의 쇠퇴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결국 1925년의 을축년 대홍수로 송파진이 물에 잠기는 사건이 일어나자 솦아의 옛 모습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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