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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양과 태평양 사이에 있는 크고 작은 섬들로 이루어진 필리핀은 말레이계의 인종을 모체로 하고 있다. 수많은 섬으로 이루어졌다고는 하지만 국민의 96%가 루손(Luzon) 섬이나 민다나오(Mindanao) 섬 등 주로 11개의 섬에 거주하고 있다.


필리핀은 300년이 넘게 스페인의 통치를 받은 결과 민족적으로 많은 혼혈을 발생시켰고, 생활, 언어, 음악 등 문화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유럽화되어, 동남아시아 중에서도 독특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20세기에 들어화서는 미국의 영향까지 더해져 현재 인구의 대다수가 향유하고 있는 음악은 만돌린, 기타, 키보드 등을 사용한 팝이나 가요곡풍의 노래가 압도적이고, 가톨릭교회의 음악이나 서양고전음악이 생활 속에서 큰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필리핀에서는 이러한 서구의 영향을 받으며 스페인적인 색채를 남기면서도 새로운 필리핀양식이라고 불리는 음악과 무용이 생성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론달라(rondalla)이다. 론달라는 만돌린, 기타, 더블베이스를 기본으로 하는 민속적 성격의 합주인데, 스페인문화의 흔적을 보이고 있고, 노래의 가창방식이나 발성, 사교댄스적인 동작도 서양적이다. 또한 필리핀 하면 더올리는 티니클링(tinikling)이라는 대나무춤은 서양적으로 변용되어 전승되고 있다. 이것은 긴 두 개의 대나무 봉을 리드미컬하게 서로 부딪히게 하고, 무용수는 발이 사이에 끼지 않게 규칙적으로 스텝을 밟으며 추는 춤이다.


필리핀 전통무용 티니클링/ⓒ필리핀관광부 FaceBook



한편 필리핀에는 인구비율이 적기는 하지만 서양의 영햐을 받지 않고 독자적인 음악문화를 전승하고 있는 소수민족들이 있다. 대표적인 것은 루손 섬 북부의 산지민족 이로로트(Igorot)족과 남부의 민다나오 섬과 술루(Sulu) 열도에 살고 있는 여러 민족들이다.


필리핀 북부의 이로로트족이 살고 있는 칼링가(Kalinga)지역에서는 평평한 징이나 대나무로 만든 악기를 6명이 하나의 그룹이 되어 연주하는 형태가 있다. 합주의 원리는 비슷한 리듬을 차례대로 연주하여 겹쳐나가는 방식인데, 이러한 점은 인도네시아의 가물란과도 통하는 점이다. 다만 가믈란과 같이 선율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양한 음색을 조합하여 그것을 일정한 리듬형에 얹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필리핀 북부 칼링가 지역/ⓒ위키백과



칼링가 지역음악세서 사용하는 악기는 강사(gangsa), 통가통(tongatong), 발링빙(balingbing), 사게이포(saggeypo), 쿨리빗(kulibit), 온낫(onnat), 통갈리(tongali), 팔동(paldong) 등이 있다.


강사는 평평한 면을 가진 징의 일종으로 6명이 함께 연주한다. 연주방법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강사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손바닥으로 쳐서 소리를 내는 방법과 징에 끈을 달아서 왼손으로 들고 오른손의 채로 쳐서 소리를 내는 방법이다. 처음에 이 합주를 들으면 어떤하 ㄴ규칙도 없이 대충 치는 것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신체의 움직임과 음의 변화를 주의 깊게 관찰하면 이 합주가 얼마나 구체적으로 구성되었는지를 알 수 있다.


통가통은 굵은 대나무통을 바닥에 쳐서 소리를 내는 악기로, 역시 6명이 한 조가 되어 연주한다. 대나무통 윗부분의 구멍을 손으로 막거나 열면서 변화의 폭을 넓히며 연주한다.


발링빙은 대나무의 한쪽을 쪼개서 만든 악기로, 좌선을 하는 승려들이 졸거나 딴 생각을 할 때 치는 죽비와 비슷하게 생겼다. 오른손으로 쪼개지 않은 부분을 잡고 왼손바닥에 가볍게 튕겨내듯이 치면 "비웅비웅"과 같은 울림이 난다. 이 악기도 6명이 함께 연주한다.


사게이포는 6명이 한 조가 되어 이루어지는 팬파이프이다. 지공이 없는 1개의 대나무관을 한 사람씩 연주하여 팬파이프와 같은 효과를 낸다. 연주자들은 복식호흡을 하면서 조금씩 시간을 어긋나게 하여 한 사람씩 참가해나가는 방법을 취하고 있다.


쿨리빗은 대나무로 만든 현악기를 말한다. 굵은 대나무를 준비하고 그 표피를 가늘고 길게 잘라내어 줄로 사용하는데, 이때 양쪽 끝이 잘라지지 않게 주의하여, 만들어진 줄과 본체의 사이에 작은 줄 받침을 끼우면 줄에 장력이 생겨 훌륭한 현악기가 된다. 이것이 쿨리빗이다. 완성된 악기를 양손으로 잡고 엄지, 검지, 장지를 사용하여 현을 뜯는데, 양손을 사용하기 때문에 혼자 연주해도 2성부의 음악과 같이 들린다.


온낫은 칼링가에서 사용하는 구금(口琴), 즉 입으로 부는 현악기를 말한다. 구금은 대나무로 만들기도 하고, 금속으로 만들기도 한다. 대나무 구금의 경우, 잘게 잘라진 대나무의 끝을 손가락으로 튕기고 구강을 공명통으로 삼아 소리를 내는데, 입의 형태에 따라서 다른 소리가 나기 때문에 독주뿐 아니라 합주로도 즐길 수 있다.


통갈리는 코로 부는 대나무 피리를 말한다. 조상연혼과의 대화나 아름다운 사랑의 속삭임의 대용으로 사용되는 통갈리는 칼링가에서 매우 귀중한 존재로 여겨지고 있다.


팔동은 대나무 종적으로 앞에 구멍이 3개, 뒤에 1개가 있다. 우리나라의 단소와 같은 계통으로 형태뿐 아니라 음색도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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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사람들이 타고 다니던 기구로는 수레와 가마가 있었다. 수레와 가마를 구분하는 기준은 바퀴의 유무이다. 바퀴가 있는 것은 수레라 하고 바퀴가 없는 것은 가마라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수레는 널리 쓰이지 못했다. 고구려 고분벽화에 소가 끄는 수레가 보이기는 하지만 그 후로는 수레가 널리 사용되었던 흔적을 찾기 어렵다. 18세기에 박제가(朴齊家)가 '북학의(北學議)'에서 수레의 좋은 점을 열거하며 수레를 사용하자고 열렬히 주장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수레의 사용은 거의 진전이 없었다.


무용총 우거도-중국 길림성 집안현 소재 고구려 무용총 벽화 中/ⓒ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렇게 된 데에는 까닭이 있었다. 운송수단이 발달하려면 그에 맞추어 도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야 했다. 그러나 19세기 초 영국에서 돌을 잘게 부수어 도로를 포장하는 매커덤공법이 시행되기 전까지는 전 세계적으로 도로의 포장에 커다란 진전이 없었다. 유럽에서도 16세기 후반에 초보적인 형태의 사륜마차가 나타났고, 여럿이 함께 타는 합승마차는 17세기에 가서야 등장했던 것도 도로 포장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도로사정은 땅의 자연적인 상태가 도로에 적합한지 아닌지에 따라 결정될 수밖에 없었다. 평탄한 땅이 넓게 펼쳐져 있으면 수레가 통행하기 쉬웠다. 하지만 한반도 지형은 산이 많고 그에 다라 골짜기도 많아서 바퀴 달린 수레가 통행하기 어려웠다. 우리나라의 고대 전투에서 전차(戰車; Chariot)전투를 거치지 않고 곧바로 기마전투가 발달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조선시대에 개개인이 들고 지고 전국을 돌아다니며 상품을 파는 보부상(褓負商)의 활약이 두드러졌던 것도 수레의 사용이 어려워 물자 운송이 대량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람의 힘만으로 물건을 운반할 수 없을 때에는 소나 말의 등에 물건을 실어 운반할 수는 있으나, 바퀴 달린 수레에 소나 말을 매어 운반하는 방법은 일반화되기 어려웠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수레가 쓰이기는 했지만 사람이 타는 승용보다는 물자를 운반하기 위한 운송용으로 쓰였다.


그러나 적지만 승용수레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승용수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초헌(軺軒)이다. 초헌은 초거(軺車)라고도 하는데, 바퀴 하나가 달린 높다란 수레를 말한다. 즉 의자에 기다란 끌채가 좌우로 붙고, 의자 아래에는 기둥이 있고, 그 밑에 커다란 바퀴 하나가 달려 있다. 옛날 중국에서 일반적으로 수레라 하면 말 네 마리가 끌었는데, 초(軺)는 한두 마리 말이 끄는 가볍고 작은 수레를 말했다. 그리고 헌(軒)은 높다란 집을 뜻했다. 따라서 초헌은 사람이 올라타는 부분이 높이 있는 간단한 외바퀴 수레를 말한다.


초헌/ⓒ네이버지식백과



초헌은 1440년(세종 22)에 만든 우리나라 고유의 수레이다. 그래서 중국 사신이 초헌을 보고는 신기해하여 잠시 태워 준 일도 있었다. 이 초헌은 가마와는 뚜렷이 다른 독특한 탈것이었다. 그러므로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니었다. 중앙의 육조 판서, 참판이나 지방의 도 관찰사급에 해당하는 2품 이상의 관원이 타는 것이었다. 고위관원뿐 아니라 왕자나 왕의 사위인 부마도 타고 다녔다.


초헌, '기산풍속도첩'/ⓒ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초헌의 기다란 끌채에는 가로로 길게 멍에목을 끼워 앞뒤로 양쪽에서 초헌을 끌고 가므로 초헌을 움직이려면 서너 사람이 필요했다. 그러므로 당연히 격이 높은 수레로 높은 벼슬의 상징과 같은 수레였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나 형과 아우가 나란히 초헌을 타고 가는 것을 가문의 영예로 알았다. 그러나 불편한 점도 있었는데, 바퀴가 하나밖에 없기 때문에 바닥의 진동이 그대로 전해져서 울퉁불퉁한 길에서는 심하게 덜거덕거렸다.


좌거, 김홍도 안릉신영도(安陵新迎圖)/ⓒ국립중앙박물관



초헌 외에 흔히 보기는 어려웠지만 좌거(坐車)라는 수레도 있었다. 좌거는 흔히 중국에서 사용되었지만, 중국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조선에도 있었다. 좌거란 말 그대로 앉아서 타고 가는 수레로, 형태는 가마와 같은데 바퀴가 달려 있고 말이 끄는 것이다. 이는 1786년에 김홍도가 그린 안주목사 부임행렬 그림에 등장한다. 구체적인 모양은 유옥교자(有屋轎子)처럼 지붕과 벽체가 있고, 사면에 휘장이 둘려 있으며, 바퀴가 둘 달려 있다. 가마부분의 옆으로 뻗은 멍에목을 앞뒤로 네 사람이 잡고, 맨 뒤에서 다시 한 사람이 끌채를 잡아 균형을 유지하며 가는 가마형 수레이다. 그러나 이런 수레가 널리 사용되지는 않은 듯하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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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교자/출처:(주)천재교육


가마는 본래 특별한 경우 외에는 문신만이 타고 무관이나 음관(蔭官, 음직이 제수된 자)은 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음관은 정식으로 과거를 거쳐 관직에 오른 자가 아니므로 일반문신과 차별을 두기 위해 가마를 타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무관이 가마 타는 것을 금지한 이유는 문신에 비해 천시된 탓도 있지만, 무관은 전쟁터에서 말을 달려야 하는 몸이므로 평소에도 말을 타는 일을 몸에 익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반적으로 가마라 하면 여자들이 타고 다니던 탈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여자들이 타는 가마라면 지붕과 벽이 있는 유옥교자를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여자들이 타고 다니던 가마도 지붕과 벽이 없이 사방이 트여 있는 평교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남녀가 내외하는 습속이 강화되고 유교적인 윤리가 강화되면서 여자들이 평교자 타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생겼다. 부녀자들이 가마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고, 때로는 말을 주고받으며 희롱하기도 한다 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5세기 초 태종 때에는 양반 부녀자들로 하여금 사방이 가려진 유옥교자를 타고 다니되, 유옥교자가 없으면 말을 타고, 말이 없으면 차라리 걸어다니라 하여 평교자 타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평교자 타는 것이 오랜 습속인데다가 유옥교자가 고가품으로 구하기도 어려워 이러한 법령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세종 때에는 1품관이나 2품관의 처가 타고 다닐 푸른색 옥교와 3품관의 처가 타고 다닐 검은색 옥교를 나라에서 만들어 보여 주고 관원들에게 그대로 본떠 만들게 하기도 하였다.


전통 가마 행렬/출처:(주)천재교육


그런데 여자들 중에도 가마를 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였다. 3품관 이상의 처, 어머니, 딸, 며느리만이 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여자들이 옥교를 타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16세기쯤에는 많은 여자들이 옥교를 탔다. 나중에는 사치풍조가 번지면서 지체 높은 여인이 가마를 타지 않고 바깥나들이를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부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마가 활용되면서 많은 여자들이 가마를 탔다. 장사치의 처와 달, 고관의 첩들도 가마를 타고 다녔고, 18세기쯤에는 전라도에서 아전(衙前,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행정 일을 보던 하급 관리)집안 여자들이 옥교를 타고 다녀 양반들의 눈총을 샀다. 19세기가 되면 의관(醫官)이나 역관(曆官) 집 여자들은 물론이고, 기생에 바느질하는 침선비(針線婢)까지 가마를 타고 다닐 지경이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시집가는 날은 여염집 여자들도 가마를 타게 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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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먹는 일은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먹을 것을 유달리 중시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속담뿐 아니라 대표적인 예로 진달래꽃을 참꽃, 철쭉꽃을 개꽃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철쭉꽃이 진달래꽃보다 아름다워도 먹지 못하는 철쭉꽃은 '개꽃', 먹을 수 있는 진달래꽃은 '참꽃'이라고 불렀다. 꽃 자체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가와 없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루의 시각을 밥 먹을 때로 구분했는데, 그래서 저녁밥을 먹는다고 하지 않고 통상 '저녁'을 먹는다고 말한다. 또 인사말로 '밥 먹었느냐'는 말을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예전에 너무 가난하고 굶주리고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인사말이 생겼다고 오해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어에서 '굿 모닝', '굿 이브닝'이라는 말을 우리는 "아침밥 먹었습니까?", "저녁밥 먹었습니까?"로 인사했던 것이다. 시간을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밥 먹는 때로 생각했던 관습이 매우 오래 된 것이라는 것은 '끼'라는 말에서도 그대로 보인다. '끼'와 '때'는 본래 같은 말이었다. 16세기 중종 때 편찬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時'를 'ㅂㅅ기니 시'라 풀이했다. 요즘도 노인들은 '세 끼 밥'이라 하지 않고 '세 때 밥'이라는 표현을 쓴다. 어원으로 살펴보더라도 '끼'는 '때'와 함께 하나의 낱말에서 갈라져 나온 말이다. 또 우리는 뭐든지 먹는다고 표현했다.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의 말들이 먹는다는 말 한마디로 표현된다. 영어에서는 물이나 술을 마시는 것을 'drink' 담배 피우는 것을 'smoke'로 표현하지만 우리말에서는 모두 먹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마음도 먹고, 욕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귀도 먹고, 겁도 먹고, 잊어먹고, 떼어먹고 등의 표현이 보여 주듯 우리의 오래된 언어생활에도 먹는 것을 중요시 했다는 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 우리는 예전부터 다른 민족에 비해 많이 먹었다. 성인 남자는 한 끼에 420cc의 곡물을 먹었는데, 이는 지금의 식사량에 비하면 3배에 이르는 것으로, 일본인은 물론 중국인에 비해서도 꽤 많은 양을 먹었다. 끼니는 예전에는 '조석(朝夕)끼니'라는 말 처럼 한 두 끼를 먹었으며, 해가 긴 여름철이나 힘든 일을 할 때에는 간단한 점심(點心)을 포함하여 세 끼를 먹기도 했다. 예전에는 어린이도 180cc를 먹어 지금의 어른 보다도 더 많이 먹었던 셈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먹었을까? 그 원인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난해서 그랬다는 지적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전에 너무나 어렵게 살아서 먹을 것이 생기면 정신없이 허겁지겁 많이 먹는 습성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전의 가난이나 기근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이전에는 중국, 일본, 서양 어디나 흉년, 기근이 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심지어는 영아 살해 등의 풍습이 횡행했다. 우리민족이 많이 먹었다는 것은 늘 많이 먹었다는 것이지 어쩌다가 한 번 먹을 것이 생겼을 때 닥치는 대로 많이 먹었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하면 늘 많이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었다. 조선시대에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쌀을 주식으로 삼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수출, 공출 등으로 쌀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 남한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쌀의 완만한 증산, 보리의 급격한 증산이 식생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쌀은 칼로리가 높고, 고른 영양소를 갖추고 있는 우수한 식품이다. 또, 벼는 파종량에 비해 수확량이 많고, 벼농사는 토지 이용도가 높아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훌륭한 곡식이었다.

 가장 중요한 부식인 김치는 무, 오이, 가지 등으로 만들었는데, 18세기부터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여 지금처럼 빨간 김치가 생겨났으며, 19세기에는 배추가 주재료로 부상했다.

 식사도구로는 밥상과 수저를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작은 소반을 써서 식사를 했고 성인은 각자 따로 상을 받아 먹었다. 집 구조가 조리를 하는 부엌과 밥을 먹는 방으로 분리되어 있고, 부엌에서 방에 이르는 동선이 복잡하여 소반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중국이나 일본이 13, 14세기부터는 젓가락만으로 밥을 먹었던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젓가락과 함께 숟가락을 써서 식사를 하고 있다. 이는 우리 상차림에는 항상 국이 있었는데, 그 국이 건더기가 많고 뜨거웠기 때문에 숟가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통사회와생활문화/이해준 송찬섭 전경목 정연식 정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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