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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연령층은 7~8세 이상의 유소년부터 중장년까지 다양했지만, 대부분은 어린 학동들이었다. 이들은 연령상 한창 놀이를 즐길 나이이므로 학습보다는 놀이에 더욱 큰 관심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은 인류학자인 윤학준(尹學準)의 어린 시절 추억담인데, 그는 일제강점기에 할아버지를 훈장으로 모시고 가숙(家熟)에서 '천자문'을 배웠다고 한다.


대관령서당 선생님과 학생들 기념 촬영(1959)/ⓒ국가기록원


저녁 무렵 아이들은 옆집 마당에서 '진 뺏기 놀이'에 열중해서 함성을 지르며 놀고 있는데, 그 고함소리를 귓전으로 들으면서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글을 읽어야 한다는 것 또한 이만저만한 고역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마음은 콩밭에 가 있어서 글이 머리에 들어갈 리가 없었다. 그때마다 할아버지의 벼락은 떨어졌고, 회초리가 날아오기 마련이었다.


따라서 이런 어린 학동들의 관심을 공부로 유인하기 위해 흥미를 유발하는 여러가지 놀이가 동원되었다. 그중 하나가 '글자 찾기 놀이'인데, 이것은 '천자문' 등을 통해 이제 막 글자를 익혀가는 어린 학생들의 놀이 중 하나였다.


두 사람 이상 복수의 개구쟁이가 책을 가운데 두고 둘러 앉는다. 그리고 책장을 넘기면서 과(戈)나 식(式) 따위의 (삐침이 비슷한) 글자를 누가 먼저 가장 많이 찾아내는가 하는 놀이이다. 순간적인 승부이기 때문에 자못 시끄럽다. 이 '삐침' 찾기 놀이에 싫증이 나면 이번에는 같은 글자가 나란히 있는 것을 찾는 놀이를 한다. 이 놀이의 경우에는 모양은 비슷하나 다른 글자, 가령 강(岡)자와 망(罔)자가 나란히 있는 것을 짚었을 때는 페널티가 붙는다.


삐침이나 한자의 부수가 같은 글자 찾기와 유사하나 뜻이 다른 글자 찾기는 놀이를 통해서 글자를 정확하게 인지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는 좋은 방편이었다. 이는 앞으로 사서삼경과 같은 경전을 학습하는 과정에서 미처 익히지 못한 글자를 자전(字典)이나 옥편(玉篇)에서 찾아야 할 때 매우 손쉽게 찾기 위한 학습방법 중의 하나였다.


학습과 관련된 본격적인 놀이로는 '초(初) 중(中) 종(終) 놀이'가 있었다. 학동 서넛이 짝이 되어 한 학동이 옛사람의 시구(詩句) 한 구절을 소리 높여 읊으면 다른 학동이 이에 호응하여 대구(對句)를 찾아내는 것으로, 시 창작에 도움이 되는 놀이였다. 또 '화승작(火繩作)'이나 '각촉부시(刻燭賦詩)'와 같은 놀이도 있었다. 이것은 시간을 정해 놓고 글짓기를 겨루는 것으로, 짧은 시간 내에 글을 얼마나 짜임새 있게 잘 짓느냐를 경쟁하는 놀이였다.


학동들의 야외 수업/ⓒ대구광역시 중구 도심재생문화재단


공부하는 데 필요한 정신 집중 강화와 체력 보강을 위한 놀이도 있었다. 정신집중 강화를 위한 것으로는 '투호(投壺)'가 있었다. 서당의 마당에 항아리를 놓고 여러 사람이 편을 갈라 10여 걸음 떨어진 곳에서 화살을 항아리 속에 던져 많이 넣은 편이 이기는 것인데, 항아리에 화살을 집어넣으려면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원래 이 투호는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향사례(鄕射禮)와 더불어 유생들이 예법을 익히고 시행하는 의식이었다. 그래서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투호를 향사례와 함께 흥학(興學)의 일환으로 보고 수령들에게 이를 실시하도록 권장하였다.


체력을 보강하는 놀이로는 줄넘기와 '태격'이 있었다. 중봉(重峯) 조헌(趙憲, 1544~1592)은 새끼줄로 줄넘기하는 방법을 고안하여 자신을 찾아와 글 배우기를 청하는 사람에게 먼저 줄넘기를 3천 번 하도록 한 후에 글을 가르쳤다고 전한다. 또 일개 가문에서 전해 오는 일이기는 하지만, 전라도 김제의 어느 가문에서는 태극을 음차한 '태격'이라는 무예를 익혀 몸을 단련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놀이는 아니지만 이황(李滉, 1501~1570)의 '활인심방(活人心方)'에 나오는 도인법(導人法)은 공부하면서 생긴 심신의 스트레스를 풀어 주는 데 아주 효과적이었기 때문에 서당에서 널리 행해졌다.


서당의 행사로 개접례(開接禮)와 파접례(罷接禮)가 있다. 개접례와 파접례는 일종의 개강식과 종강식인데, 주로 규모가 큰 서당에서 실시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개접은 대략 3월에서 5월 사이에 했고, 파접은 7월 이후 날씨가 쌀쌀해지면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모든 서당이 이와 같았던 것은 아니다. 농촌의 경우에는 일손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농번기에 농사를 짓고 농한기에 서당에 다니며 공부를 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서당의 행사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책거리였다. 책씻이(冊施時) 또는 세책례(洗冊禮) 등으로 표현되기도 했는데, 학동들이 책 한 권을 다 읽으면 스승에게 감사의 표시로 떡을 해서 올리는 간단한 잔치였다. 책 한 권을 다 읽은 학동들은 말할 것도 없고, 이를 곁에서 지켜보던 다른 학동들도 이 날은 배불리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덩달아서 좋아했다. 다음은 어린 시절 안동에서 서당을 다닌 윤학준의 추억담이다.


나에게 도 하나의 즐거움은 가끔씩 들어오는 '책거리 떡'이다. '책거리 떡'이란 '학생'이 책을 한 권 데면 감사의 뜻으로 스승에게 가져오는 떡이다. 예부터 내려오는 관습인데, 떡이 마치 귀(耳) 모양 같아서 '귀떡'이라고도 한다. 크기도 귀만한고 속은 비어 있으며 겉에는 노란 콩고물을 입힌다. 속이 비어 있는 것에는 나름대로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이란 모름지기 '소견이 넓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도량이 있고 틀이 큰 사람이 되라는 소망이 것들어 있다.


책거리는 때가 되면 의례적으로 행하는 단순한 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학부모들이 학동들의 학업 성취 정돌을 확인하고 격려하며 훈장의 노고에 감사하는 자리였기 때문에 이때 먹는 떡 하나에도 이와 같이 깊은 의미가 담겨 있었던 것이다. 다른 지방에서는 책거리로 송편을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송편과 같이 속이 지식으로 꽉 찬 사람이 되라는 뜻이었다고 한다.


서당행사 중의 하나로 봄에 등산을 하거나 여름에 천렵(川獵)을 하기도 하였다. 정기적으로 실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봄이 되면 훈장과 학동들이 산에 올라 경치를 구경하고 높은 곳에 올라서 사방을 바라보며 호연지기(浩然之氣)를 길렀다. 영조 대에 경상도 고성현(固城縣)에서 훈장 노릇을 하던 구상덕(仇尙德, 1706~1761)은 봄이 되면 학동들과 산에 올랐는데, 그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여름에는 시원한 강이나 계곡으로 물놀이를 나가 더위에 지친 신심을 회복하고 공부를 향한 의욕을 재충전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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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은 조선시대에 성행한 초급 교육기관 중의 하나였다. 서당의 기원을 무엇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고구려시대의 경당(扃堂)으로까지 소급하는 학설도 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인들은 책을 좋아하여 -중략- 저잣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여기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경당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문무교육을 겸비한 사설 교육기관이기에 이를 서당의 기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서긍(徐兢,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에서 고려로 파견돼 왔던 사절의 한 사람)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여염집들이 있는 거리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 두서너 채가 마주 보고 있는데, 백성의 자제들이 이곳에 모여 스승에게서 경서를 배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경관과 서사가 서당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의 경당과 고려의 경관과 서사가 서당의 모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서당/ⓒ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 서당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된 것은 16세기로, 사림파가 정계에 등장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동에 거주하던 김진(金璡, 1510~1560)은 1525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등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임하현(臨河縣)으로 이거한 후 부암(傅巖) 근처에 서당을 설립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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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의 곁에 서당 한 채를 짓고 자제와 고을의 어린이를 불러 모아 학령(學令, 학교에서 학생들의 활동과 수업내용, 처벌 규정을 정한 학칙)을 세우고 수업과정을 엄히 하였다. 가르치는 데 열성적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고 수십 년 하였더니 학도(學徒)의 기상이 크게 일어났고 경전을 외우는 소리가 온 마을에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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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짧은 기록이지만 초기의 서당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김진은 먼저 집 근처에 서당을 세우고 자기 가=문의 자제와 마을의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그가 과거 응시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문의 자제들을 교육한 것은 유학의 가르침, 즉 '수신제가 (修身齊家)'를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가르치는 일에 더욱 열성적이었고 교육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 년 동안 했더니 마침내 학도의 기상이 크게 진작되고 마을에 경전 읽는 소리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16세기 서당의 모습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양란을 겪고 난 후 정부는 재정적인 이유를 들어 관학(官學)인 향교에 교관(敎官)을 파견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서원의 활동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서당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이러한 사정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고을에는 비록 향교와 서원이 있지만 한갓 문구(文具)로만 설립되어 있을 뿐 교육방도가 크게 무너지고 시설은 형편없이 낡아 유학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공부하고자 하는 선비들은 서당이 아니면 갈 곳이 없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향촌의 사족들은 서당 설립에 열성적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도 양란 이후 무너진 향촌질서를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사족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향촌사족들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곳에서는 수령이 직접 주도하여 서당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7세기에는 향촌 사족과 수령이 적극적으로 도와 서당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양란 이후 무너진 향촌질서를 조속한 시일 내에 회복하려 하였다.


18세기가 되면 서당은 또 한 차례 변모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8세기에 들어와 향촌 곳곳에 동성(同姓)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 성씨가 특정한 마을에 터를 잡아 대대로 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에는 서당의 설립도 자연히 문중(門中) 또는 마을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문중과 마을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해 서당계(書堂契)나 학계(學契)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계(契)를 통해 기금을 조성하고, 이를 고리대로 놓아 이자를 불리든지 혹은 학전(學田)을 구입하여 거기에서 얻어지는 소출로 서당의 학채와 운영비를 조달했다. 이와 같이 18세기에는 문중 또는 마을 중심의 서당이 크게 성행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서당을 통한 교육의 수요가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중인과 평민, 천민층에까지 확대되었다. 평민과 천민들까지도 문자를 터득하여 자신의 의사와 소망을 글로 표현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수요에 발맞추어 등장한 것이 '지식을 팔아 먹고사는' 새로운 계층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몰락한 양반이거나 신흥지식층이라고 할 수 있는 평민 또는 천민 출신의 유랑지식인이었는데, 이들이 설립한 서당이 바로 '훈장 자영 서당'이었다. 훈장의 지적 수준이나 성향이 다양했기 때문에 이들이 설립한 서당의 교육수준도 각기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서당이 번성하여 한 마을에만 서너 개나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학동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서당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아무튼 19세기에는 서당이 크게 성행하였으며, '훈장 자영 서당'이 새롭게 등장하여 중인이나 평민, 천민까지도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함께보기: 조선 말기(후기) 서당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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