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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편으로는 자연환경과 어울리게 지어야 하고, 좋은 자연환경을 찾아 지어야 하며, 또 한편으로는 자연환경의 악조건을 이겨 낼 수 있게 지어야 했다.


좋은 자연환경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집터를 찾아야 했다. 그때 활용된 것이 풍수지리였다.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비판했듯이 풍수지리에 비합리적인 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좋은 자연환경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풍수에 좋은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집 주변 산세의 모양을 가리키는 형국(形局), 집의 방향을 가리키는 좌향(坐向), 집 자리를 가리키는 혈(穴) 등 꽤 복잡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했다. 그런데 풍수(風水)라는 것은 본래 '장풍득수(藏風得水)'를 가리키는 것으로, 장풍은 찬바람이 휘몰아치지 않아 추운 겨울을 나기에 족한 조건을 가리키며, 득수는 농사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을 가까운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조건을 가리킨다. 풍수에 맞는 조건이란 결국은 살기 편한 자리였다.



흔히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뒤쪽에 산이 있고 앞쪽이 낮아 물이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을 길지로 여겼다. 이 역시 생활의 편리성과 관계가 깊다. 주변은 거센 바람이 몰아치지 않도록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앞은 시원스럽게 탁 트였으며, 볕이 잘 드는 곳이 바로 풍수에 맞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배산임수는 생활필수품을 쉽게 조달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는 매일 길어 와야 했고, 때로는 냇가에 나가 빨래를 해야 했다. 또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고 구들을 데우기 위해서는 나무를 해야 했다. 물과 나무를 가까운 데서 쉽게 구하기 위해서는 배산임수의 조건이 필요했던 것이다.


집은 자연환경을 극복하여 살기 편한 곳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집의 구조는 기후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강우량, 강설량, 일조량, 바람, 습도, 지형 등 모든 것이 집의 모양과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는 지붕의 물매가 가파르며, 햇볕이 강한 곳에서는 창살이 촘촘하다. 바람이 강한 곳에서는 지붕을 묶어 놓기도 한다. 심지어는 기왓골의 깊이까지도 비가 많은 곳에서는 깊다. 길게 앞으로 뻗은 처마도 비가 안으로 들이치지 않게 하고 뜨거운 햇볕을 막아 방 안을 서늘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의 가옥구조 중에 기후와 관련하여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마루와 온돌이다. 대청, 안청, 마래라고도 부르는 마루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벌레를 차단하고 통풍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시설이다. 남쪽 지방에서 발달한 마루는 덥고 습한 기후를 이겨 내려는 노력과 지혜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더위와 습기보다는 추위를 막는 것이 더 중요했던 평안도, 함경도 지역의 민가에는 마루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함경도의 집은 양통집이라 하여 한 용마루 아래에 간격을 두지 않고 앞뒤로 방을 배치했다. 이는 추운 지방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방 안의 열을 최대한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려 부뚜막/ⓒ국립중앙박물관


한편 우리 주거생활의 특색을 이루는 구들 또는 온돌(溫突)이라는 난방법은 일찍이 고구려의 서민가옥에서 유래되었다. 온돌이 언제부터 일반화되었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지만, 처음에는 서민들의 난방법이었던 온돌이 전국적으로 전 계층에 일반화된 것은 조선 후기로 보인다.

처음 온돌은 방 전체를 데우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 일부를 데우는 '쪽구들' 형태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에는 대개의 경우 부엌의 부뚜막에 불을 때어 밥을 짓고 물을 끌이면서 동시에 온기가 방바닥 밑을 지나게 하여 방 전체를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채용했다. 이는 적은 연료로 장시간 실내를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난방법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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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두레/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두레는 물론 공동노동, 생산조직이라는 1차적 목적을 가진다. 그러나 그와 함께 그 구성원들이 바로 전근대시기 피지배 농민층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과연 이들 민중의 의사결정과정이나 내용이 어떠했었는지 매우 궁금하기만 하다. 구레의 회의는 두레숙의 제의와 결부된 대동(大同)회의로서, 파제 후 음복과 함께 이루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두레회의의 내용은 두레가 기본적으로 농업 생산조직이었으므로 조직의 구성과 임원의 선출, 농사의 방식과 회계, 결산 등 조직과 농사 관련 내용이 주가 되었다. 그러나 두레의 구성원들이 바로 마을의 공동체적인 운영에 실질적으로 기능하는 청장년집단이었기 때문에 마을 관련 사항도 함께 논의하기 마련이었다. 회의는 유사집(도가집-都家집. 동업자들이 모여서 계나 장사에 대한 의논을 하는 집, 계나 굿 따위의 마을 일을 도맡아 하는 집)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조사되지만, 원래는 두레꾼의 집회소인 농청(農廳)에서 이루어졌다.

두레회의는 전기와 후기로 나누어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하나는 호미모듬이며 농사 준비회의로서 2월경에 이루어졌다. 여기서는 1년 농사의 대소사를 결정하였다. 두레의 재조직 및 역원 선출, 신입례와 신참례, 농사 순서 결정, 두레 셈이 기본원칙 확인, 농악기의 보수나 구입, 품앗이와 품삯 결정, 호미모듬 의례준비 등이었다. 두레농사 후의 회의는 호미씻이가 끝난 후에 한 해의 결산, 상호부조, 농악기 보수, 마을살림, 마을의 대소 공사(길닦기, 풀베기)해결 등으로 이루어졌다.

두레는 마을단위의 매우 개방적이고 민주적인 조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노동력을 단위로 결성되는 공동체조직이었기 때문에 가입과정에서 노동력의 수준을 점검하는 재미있는 심사절차가 있었다. 흔히 주먹다음이로 통칭되는 가입례와 관련하여 대표적인 것이 들돌 들기와 진세턱이다.

[들돌 들기/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마을의 미성년자가 16~17세가 되면 성녕으로서 자연스럽게 두레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때 사용되는 것이 바로 들돌(전라도는 들독, 제주도는 뜽돌)이다. 들돌은 둥그럼 돌로 손때가 묻어 반질반질하며, 보통사람이 들기에는 약간 힘에 겨운 무게이다. 들돌은 대개 당산나무나 동간의 밑에 보존되어 있으며, 대 , 중, 소로 무게가 다른 둥근 돌을 모셔 신앙의 대상으로 섬기는 경우도 있다. 이 들돌을 들거나 들어서 어깨 위로 넘기면 당당한 가입의 자경을 얻는데, 이는 노동 담당자로서 생산활동에 참가할 자격을 인정받는 의미를 지닌다. 마을에 따라서는 7월 백중에 청장년들이 모여 힘을 겨루고 장사(수머슴)를 뽑는 데에 이용되기도 한다. 이 경우에 장사는 두레의 대표가 되거나 임금을 갑절로 받는 특혜를 부상으로 받는다.

다음으로 신입례는 신입자들이 주로 술이나 가벼운 안주를 대접하는 것인데, 이를 진세턱이라고 한다. 진세턱의 기록이 문서로 남은 경우도 있다. 이 신입례는 두레에서 1인의 동등한 노동력 인정 절차이자 성년식 통과의례라고도 할 수 있다. 들돌 들기와 신입례는 두레조직의 세대 교체와 생산력 제고, 구성원 사이의 연대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성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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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시장과 장터 문화



 시장은 시간과 공간의 일치를 통해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물자가 만나는 곳이다. 시장은 물자가 유통되는 중심지이기 때문에 일대의 지역은 서로 간에 거미줄과 같은 연결망을 이루게 된다. 일단 사람들이 모이면 서로 간에 정보가 오고 가는데, 이것도 역시 지역과 지역을 엮는 끈으로 작용한다.

 농민들이 꼭 사거나 팔 물건이 없더라도 구경 삼아 나와 보는 것이 농촌의 시장이다. 장에 나가면 견문을 넓히고, 친지나 친척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다. 시장에서의 만남을 통해 이루어 지는 것 중의 하나가 혼담(婚談)이다. 혼인을 통해 농민들은 사돈을 맺게 되고, 그 유대의 끈이 된 시장은 이들이 가지는 또다른 공동체적 연망(聯網). 시장은 이처럼 조직이 없는 민중에게는 자연스러운 집회장소를 제공한다. 민란의 시작도, 일제 때의 만세운동도 그 배경이 시장이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은 경제적 행위를 하는 공간이지만 농민들에게는 동시에 일상의 활동에서 잠시 해방되는 날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특히 시장에서 행해지는 각종 민속놀이에 의해 만들어진다. 조선 후기에 탈춤의 연희장소로 알려진 곳은 주로 시장터이다. 야유(野游), 오광대(五廣大) 가면극 등이 행해진 경상도 동래(東萊) 중앙통의 시장 터, 수영(水營)의 시장 터, 그리고 고성(固城) 지역 등이 이러한 예이다.


[가락오광대 중 할미,영감 과장의 한 장면/부산일보DB]


 남한강 주변에는 산신과 용신에 대한 별신제가 행해졌다. 육로가 발달하기 전에는 수로가 운송로로 매우 중요하였으므로 강변에 시장이 형성된 경우가 많았다. 더불어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개펄장터에서 이러한 별신제가 열렸다. 남한강이 중원벌을 가로질러 올라가면 충주 목계장에 이르는데, 이곳의 별신제가 바로 이러한 경우이다. 목계장은 소금배가 닿을 때마다 임시로 서는 장이다. 소금배는 대개 한 달에 세 번 닿았으며, 한번 장이 서면 여러 날 지속되었다. 이때마다 음성, 괴산, 청안, 영풍, 제천, 단양 등의 충청도 지역과 경상도 북구 및 강원도 남부의 여러 읍에서 장꾼들이 몰려왔다. 뱃길이 무사하고 장사가 잘 되게 해 달라는 기원을 담은 목계별신제는 매년 봄과 가을에 행해졌다. 별신제는 부용산신과 남한강 용신을 모셔오는 강신굿으로 시작하여 줄다리기 행사로 이어진다.


[사진 충주 목계나루터 전경-목계교가 놓이기 전 이 곳은 백여척의 상선이 집결한던 곳이다./네이버]


 줄다리기는 강을 경계로 동서 양편으로 나누어 줄을 당긴다. 동편은 수줄이고 서편은 암줄이 된다. 줄꾼이 동쪽으로는 강원도 강릉에서, 서쪽으로는 서울에서 까지 동원되었다고 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고 한다. 줄다리기가 끝나면 송신굿으로 행사를 마무리 한다. 이긴 편은 그해 운수가 좋다고 하여 잔치를 벌였다. 줄다리기에 사용된 줄은 남한강 양편에 걸어 놓아 여름장마의 액막이로 떠내려가게 둔다. 이 행사는 1967년을 마지막으로 사라졌다.

 7월 백중이 되면 시골 오일장에서는 농사꾼들을 위해 백중장을 열었다. 이때가 되면 시장권 내에 있는 농사꾼들이 씨름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장으로 모였다. 이 대회는 장의 번영을 목적으로 시장상인들이 추렴을 하여 마련한 각종 행사 중의 하나이다. 이날은 낮부터 밤는게까지 행사가 이어진다. 4월 초파일에는 불놀이를 했으며, 사당패를 불러 풍물, 무등, 줄타기 등을 하였다.

 가뭄이 심하게 들면 사시(徙市), 즉 시장 터를 옮기는 관행이 있었다. 가뭄을 해결하는 것과 시장을 옮기는 것 간에 어떤한 관계가 있었는지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이 있다. 우선 시장은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므로 장터의 이전은 가뭄의 심각성을 알리는 극적인 효과가 있다는 점을 든다. 또 하나는 대체로 이동장소가 강가, 또는 평소에는 물에 잠겨 있던 곳이라는 점인데, 이것 역시 가뭄을 과장하는 방법이 된다. 시장의 특징인 소란함도 이러한 해석 중에 들어 있는데, 시장에서 들리는 소음이 비를 내리게 하는 신을 깨울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떠한 해석이든 시장을 이동한다는 그 자체가 가지는 상징적 효과가 이러한 관행을 만들어 낸 것이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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