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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교자/출처:(주)천재교육


가마는 본래 특별한 경우 외에는 문신만이 타고 무관이나 음관(蔭官, 음직이 제수된 자)은 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음관은 정식으로 과거를 거쳐 관직에 오른 자가 아니므로 일반문신과 차별을 두기 위해 가마를 타지 못하게 하였다. 한편 무관이 가마 타는 것을 금지한 이유는 문신에 비해 천시된 탓도 있지만, 무관은 전쟁터에서 말을 달려야 하는 몸이므로 평소에도 말을 타는 일을 몸에 익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일반적으로 가마라 하면 여자들이 타고 다니던 탈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여자들이 타는 가마라면 지붕과 벽이 있는 유옥교자를 상상하기 쉽다. 하지만 조선 초기만 하더라도 여자들이 타고 다니던 가마도 지붕과 벽이 없이 사방이 트여 있는 평교자가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남녀가 내외하는 습속이 강화되고 유교적인 윤리가 강화되면서 여자들이 평교자 타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생겼다. 부녀자들이 가마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가는 모습이 보기에 좋지 않고, 때로는 말을 주고받으며 희롱하기도 한다 하여 아름다운 풍속을 어지럽힌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15세기 초 태종 때에는 양반 부녀자들로 하여금 사방이 가려진 유옥교자를 타고 다니되, 유옥교자가 없으면 말을 타고, 말이 없으면 차라리 걸어다니라 하여 평교자 타는 것을 금했다. 그러나 평교자 타는 것이 오랜 습속인데다가 유옥교자가 고가품으로 구하기도 어려워 이러한 법령은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그래서 세종 때에는 1품관이나 2품관의 처가 타고 다닐 푸른색 옥교와 3품관의 처가 타고 다닐 검은색 옥교를 나라에서 만들어 보여 주고 관원들에게 그대로 본떠 만들게 하기도 하였다.


전통 가마 행렬/출처:(주)천재교육


그런데 여자들 중에도 가마를 탈 수 있는 사람은 아주 소수였다. 3품관 이상의 처, 어머니, 딸, 며느리만이 탈 수 있었다. 처음에는 여자들이 옥교를 타는 일이 많지 않았지만, 16세기쯤에는 많은 여자들이 옥교를 탔다. 나중에는 사치풍조가 번지면서 지체 높은 여인이 가마를 타지 않고 바깥나들이를 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게 되었다. 그와 더불어 부와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수단으로 가마가 활용되면서 많은 여자들이 가마를 탔다. 장사치의 처와 달, 고관의 첩들도 가마를 타고 다녔고, 18세기쯤에는 전라도에서 아전(衙前, 조선시대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서 행정 일을 보던 하급 관리)집안 여자들이 옥교를 타고 다녀 양반들의 눈총을 샀다. 19세기가 되면 의관(醫官)이나 역관(曆官) 집 여자들은 물론이고, 기생에 바느질하는 침선비(針線婢)까지 가마를 타고 다닐 지경이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시집가는 날은 여염집 여자들도 가마를 타게 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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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에는 사람의 오복(五福)을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 이렇게 다섯가지로 일컬었는데, 그 중 고종명은 일생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덕을 베풀며 살다가 제명대로 일생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종명은 오복중 다른 것을 모두 포함하는 의미라고 할 수 있으며, 조선시대에 사람들은 누구나 고종명을 희망했다.


고종명을 말할 때는 주로 회갑(回甲)과 회혼(回婚) 그리고 회방(回榜)을 주로 거론하는데, 회갑은 태어난 지 만으로 60살이 되는 것을 말하고, 회혼은 혼인을 한 지 60년이 된 것을 말하며, 회방은 과거에 합격한 지 60년이 된 것을 말한다.


평균 수명이 지금과 같지 않은 옛날에는 60세까지 사는 경우가 아주 드물었기 때문에 회갑을 맞이한 사람은 성대하게 베풀고, 더욱 장수하기를 축원하는 잔치를 열었다.


회혼은 앞서 말한 것 처럼 결혼을 한지 60년이 되는 것을 말하므로, 회갑보다도 훨씬 어려웠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15~20세에 결혼을 했다고 가정하더라도 회혼을 맞이하는 나이가 되면 최소 75살~80살이 되어야 회혼이 가능했는데, 부부가 모두 살아 있어야 가능하다는 점에서도 그 확률이 대단히 낮을 수 밖에 없었다.

회혼식은 노부부가 다시 신랑과 신부가 되어 결혼식(회혼례)을 올리는 것으로 아들과 사위가 혼인식을 거행하는 집사와 신랑을 인도하는 기러기 아범이 되고, 달과 며느리가 신부의 수발을 드는 수모가 되었으며, 손자 손녀들이 구경꾼이 되어 큰 잔치를 열었다.


회방 또한 과거에 합격한지 60년을 뜻하는 것으로 회갑, 회혼보다도 훨씬 확률이 낮았다. 조선시대에는 보통 과거에 합격하는 평균 연령이 30세를 넘었다고 하는데, 한 사람의 회방연을 구경하려면, 그 사람의 나이가 보통 90세는 되어야 가능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의 문인인, 장혼(張混 1759~1828)의 문집인 '이이엄집(而已广集)에는 회갑과, 회혼 그리고 회방이 얼마나 맞이하기 어려운 것인지를 잘 표현하고 있는데,


세상에서 희귀한 일이라고 칭하며 사람들이 경하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생년의 회갑, 등과의 회방, 초례의 회근이 그것이다. 이것은 황왕(皇王)과 제백(帝伯)의 권세로도 취할 수 없고, 진나라나 초나라 도주공(陶朱公)이나 의돈의 부(富)로도 구할 수 없으며, 현인군자의 덕이라도 반드시 얻을 수는 없는 것이다. 오직 장수한 후에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회갑을 맞이하는 것은 열에 대여섯이고, 회방을 맞이하는 것은 백에 서넛이며, 회혼은 천에 한둘이다.


     회갑을 넘기기도 어려웠던 시절에 회갑과 회혼 그리고 회방을 모두 맞이하는 것은 극히 드물고 어려운 일이었다. 따라서 고종명은 건강하게 적당한 부를 가지고 덕을 베풀면서 평안하게 노후를 맞이하는,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큰 복록을 누리는 것으로 당시 사람들에게는 커다란 희망사항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어찌 보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도 고종명은 일생을 살아가는 변하지 않는 목표이자 중요한 가치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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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민장(民狀)이란 일반 백성이 관청에 올리는 소장(訴狀)을 말하는데, 옛날 당시에는 소지(所志)라고 하였다. 자신이 '뜻한 바'를 관청에 요청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이러한 민장은 소송, 청원, 진정 등 관청의 판결과 억울함을 풀어줄 수 있는 공권력의 도움을 위한 모든 사건들이 대상이 되므로 당시의 시대상을 파악하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로 인정받는다. 민장은 개인적인 차원에서 개인이 제출하기도 하였지만, 집단소송의 개념처럼 하나의 집단이 하나의 사건에 대해 제출하기도 하였는데, 관청에서는 제출받은 민장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과 더불어 처리결과를 따로 정리해 모아 두었는데 이것을 민장치부책(民狀置簿冊)이라고 하였다.



[소지(所志)/e뮤지엄(박물관포털)]



민장을 통한 소송은 형사 고발에서 부터 민사소송, 행정적 청원, 행정 소송, 행정 보고 등 매우 다양했으며, 이는 재판 자체가 수령에 대한 일종의 청원 형태이기 때문이었다.

민장 중 가장 많은 내용은 부세문제와 민간의 갈등에 대한 문제인데, 부세 문제는 생활기반인 토지와 관련된 전정, 안정적인 노동력과 관련된 군정, 그리고 19세기 조선사회에서 가장 큰 문제였던 환정(환곡), 그리고 각 지방 고을에서 자체적으로 부과했던 잡세 등이 주된 것이었다. 즉 조선후기 '삼정문란'과 관련한 내용들이 주를 이룬다. 민간의 갈등으로는 노비, 토지, 재산 등을 둘러싼 소유권 문제와 산지(山所) 즉, 묘터를 둘러싼 산송, 채무와 관련된 소송, 소작권, 초지, 수리 이용권 등을 둘러싼 문제가 여기에 포함된다. 더불어 관의 행정적 조치와 그에 따른 불만도 많이 포함되어 있다.

민소를 통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경우에는 상급기관, 나아가 왕에게 까지 호소하기 하였는데, 그것마저 여의치 않게되는 경우에는 민란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농민항쟁의 발생과도 깊은 연관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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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산별신제 하당굿/민족문화대백과사전]


마을제는 그 다양한 명칭처럼 행사의 형식이나 내용에서도 다양한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제일(祭日)은 대개 음력으로 10월 초와 정월 초, 그리고 7월 초로 나타나는데, 7월 초에 지내는 제는 여름고사라 한다. 마을에 따라서는 과거 역병이나 홍수 피해와 관련하여 장승이나 솟대를 세우기도 한다.


풍년을 기원하거나 마을 수호신의 상징으로 세우는 솟대


경기도의 경우 마을제가 끝나고 굿을 여는 곳이 있는데, 크게 도당굿과 별신굿 또는 고창굿으로 나눌 수 있으며, 둘 다 무당과 같이 온 악사들이 공연을 하여 축제분위기를 만든다. 특히 마을제가 끝나고 굿을 할 때는 술장사를 비롯해 각종 장수들과 구경 온 타동네 사람들로 무척 붐볐다고 하니, 마을제는 그 자체로 하나의 축제적 성격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마을제사는 마을공동체 단위의 의례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지만, 중앙정부가 유교적 지방 통치수단의 하나로 설치하거나 시행한 군현 단위의 사직제, 성황제, 여제, 기우제, 향교석전례 등의 제의는 조선 후기에 들어오면서 정치적 혼란기를 통해 쇠퇴의 길을 걷다가 일제강점기에는 제도자체가 소멸함에 따라 자연히 중단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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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격루, 국립고궁박물관


 조선시대 사람들은 해와 달이 바뀌는 것을 달을 보아 알 수 있었으며, 날짜도 달력의 보급으로 알 웃 있었다. 씨뿌리기, 모내기, 김매기 등의 농사일은 달력에 표시된 양력 절기를 보고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의 흐름은 알기 어려웠지만 당시 사람들은 짧은 시간의 흐름에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 해가 뜨면 일어나 일하고 해가 지면 들어가 잠자는 것으로 충분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시간은 지금과는 달랐다. 낮에는 정시법을 적용하여 2시간 간격으로 시간이 바뀌는 12시진을 사용하여 진시, 사시 등으로 시간을 표시했다. 그러나 밤시간은 부정시법을 적용하여 하늘이 어슴푸레한 박명(薄明)을 뺀 나머지 밤시간을 5등분 하여 5경으로 표현했으므로 5경이 가리키는 시간은 계절에 따라 다를 수 밖에 없었다.


해시계, 앙부일구(仰釜日晷)/네이버


 나라에서는 자격루를 표준시계로 삼아 종을 쳐서 그 시간을 일반인들에게 알려 주었다. 그러나 종은 하루에 두 번 울렸다. 성문을 닫고 통행금지가 시작 되는 시간과 성문을 열고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시간 뿐이었다. 정오에는 오고를 쳐서 시간을 알리고, 후에는 오고가 오포, 사이렌으로 대체되었지만 정오의 시보는 서울에 국한되었다.


휴대용 해시계,1849년(현종 15), 가로 11.5㎝, 세로 15.8㎝,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네이버 지식백과


 그러므로 민간에서는 시간을 재는 데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해시계는 가장 널리 쓰인 시계였지만 양반층만이 주로 사용했으며, 그나마 밤이면 사용할 수 없었고 날이 궂어도 쓸 수 없었다. 사람들은 낮시간을 해의 방위에 따라 대략적으로 판별했다. 밤에는 별자리의 움직임을 보아 시간을 알아냈다. 사람들은 하루 시간의 흐름에 그다지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렇게 하고도 큰 불편 없이 살 수 있었다. 당시 사회가 짧은 시간의 변동을 측정하는 것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농업이 산업의 거의 전부였고, 농업은 세밀한 시간의 흐름에 좌우되지 않았다. 또 노동이 강도도 그다지 세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시간에 쫓기지 않았으며, 지금에 비교하면 매우 느긋한 삶을 누리고 있었고, 사회발전 속도도 더뎠다. 그러다가 한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산업화가 진행되고 사람들은 점차 바쁘고 고된 삶에 빠져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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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통적인 대부분의 집안에서는 10월이 되면 날을 정해 팥시루떡을 쪄서 가주(家主) 주관으로 가을고사를 지냈다. 대청 성주와 안방 제석, 그리고 터주에는 술과 함께 떡을 시루째 갖다 놓고 장독대, 대문간, 헛간, 측간, 외양간, 우물 등에는 떡을 떼어 놓는다. 전 해에 넣었던 터줏가리 안 항아리의 묵은 벼를 햇벼로 갈아 넣는다. 시루떡은 두어 말 정도 해서 동네 주민들과 나누어 먹는다. 단골무당을 불러 고사를 지내는 집도 있다. 산간 지방에서는 마을 전체가 산치성을 지내고 나서 각자 집고사를 지내는 곳이 많았는데 대부분 10월 상달에 고사를 지내지만 정월이나 2월에 지내기도 한다.


삼신바가지, 경북 안동시 임하면 금소동,황헌만/국립민속박물관



 정월 대보름 안으로 단골무당집에 1년 신수점을 보러 가는 집도 있고, 7월칠석 때에 단골집에 가서 가정이 무고하게 해 달라고 비는 집도 있는데, 이를 두고 '마지' 또는 '정성을 드리러 간다'고 한다. 3월에 못자리 고사를 지내는 집은 팥시루떡을 해서 가을고사 때와 마찬가지로 늘 놓는 자리에 제물을 놓고 지낸다.


터주고사,경기 양평군 개군면 상자포리, 황헌만/국립민속박물관


 경기도 화성시 동탄면 장지리, 밀양박씨들의 집성촌 주민들은 다락에 '선대신 항아리' 라고 부르는 쌀을 담은 항아리를 모시는데, 집안 조상을 위하는 것이라고 한다. 안방 안쪽 천장 가까운 벽에는 지석주머니, 삼신주머니를 걸어 놓는다. 지석(또는 제석) 주머니는 집안의 무고(無故)를 위해, 삼신주머니는 자식이 잘 되게 하기 위해 걸어 놓는 것이라고 한다. 제물로는 주로 햅쌀로 찐 시루떡 외에 통북어, 술, 적, 무나물 등을 올린다. 먼저 시루떡을 상 위에 받쳐 놓고, 통북어는 시루떡 오른ㅉ고에 끼워 놓으며, 시루떡 위에는 청수 한 그릇을 부어 올린다. 시루떡 앞에는 돼지고기적이나 쇠고기적을 놓고, 시루떡 옆에는 무나물과 막걹리 한 그릇을 올린다.


동지고사, 충남 연기군 금남면 석교리/국립민속박물관


 뱃고사 또는 배걸이는 강이나 나루와 관련하여 행해지던 강마을의 민속신앙이다. 뱃사공 또는 배를 소유한 집에서는 1년에 두 번, 즉 이른 봄과 10월 상달 고사 때 뱃고사를 지내거나 만신을 불러 뱃굿을 했다. 만신이나 절의 보살을 불러 배에 시루떡, 삼색과일, 술 등을 차려 놓고 징치기, 굿치기를 하는 곳도 있다.

 어부심은 한자로 어보시(魚報施) 또는 어부시(魚鳧施)라고 쓰며, 강에 사는 물고기나 오리(鳧)에게 보시, 즉 베푼다는 뜻이다. 강에서 고기도 잡고 멱을 감는 일도 많았던 시절의 풍속으로, 강 주인인 물짐승들에게 1년 내내 사고 없이 잘 지내게 해 달라고 비는 신앙행위이다.

 경기도 일원의 강마을 주민이면 누구나 정월대보름밤에 어부심고사를 지냈다고 한다. 보름 전날 햅쌀로 먼저 공양(供養), 즉 밥을 지어 놓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다음, 새벽에 밥을 들고 강가로 나가 제상을 차리고 사해용왕님을 찾으면서 동해 남해 서해 북해 순서로 돌아가며 1배씩 4배 하며 물로 인한 사고가 없도록 기원한 다음 강으로 나가 바가지에 담은 밥을 강물에 푼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송찬섭 전경목 정연식 정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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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도 풍속화/국립중앙박물관 소장]


 먹는 일은 우리의 삶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우리 민족은 먹을 것을 유달리 중시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이라는 속담뿐 아니라 대표적인 예로 진달래꽃을 참꽃, 철쭉꽃을 개꽃이라고 부르는 것인데, 철쭉꽃이 진달래꽃보다 아름다워도 먹지 못하는 철쭉꽃은 '개꽃', 먹을 수 있는 진달래꽃은 '참꽃'이라고 불렀다. 꽃 자체의 아름다움의 기준이 아니라 먹을 수 있는가와 없는가가 중요했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 하루의 시각을 밥 먹을 때로 구분했는데, 그래서 저녁밥을 먹는다고 하지 않고 통상 '저녁'을 먹는다고 말한다. 또 인사말로 '밥 먹었느냐'는 말을 한다. 사람들은 우리가 예전에 너무 가난하고 굶주리고 살았기 때문에 이런 인사말이 생겼다고 오해 하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영어에서 '굿 모닝', '굿 이브닝'이라는 말을 우리는 "아침밥 먹었습니까?", "저녁밥 먹었습니까?"로 인사했던 것이다. 시간을 단순한 시간이 아니라 밥 먹는 때로 생각했던 관습이 매우 오래 된 것이라는 것은 '끼'라는 말에서도 그대로 보인다. '끼'와 '때'는 본래 같은 말이었다. 16세기 중종 때 편찬된 '훈몽자회(訓蒙字會)'에서는 '時'를 'ㅂㅅ기니 시'라 풀이했다. 요즘도 노인들은 '세 끼 밥'이라 하지 않고 '세 때 밥'이라는 표현을 쓴다. 어원으로 살펴보더라도 '끼'는 '때'와 함께 하나의 낱말에서 갈라져 나온 말이다. 또 우리는 뭐든지 먹는다고 표현했다. 여러가지 다양한 의미의 말들이 먹는다는 말 한마디로 표현된다. 영어에서는 물이나 술을 마시는 것을 'drink' 담배 피우는 것을 'smoke'로 표현하지만 우리말에서는 모두 먹는다고 표현할 수 있다. 마음도 먹고, 욕도 먹고, 나이도 먹고, 귀도 먹고, 겁도 먹고, 잊어먹고, 떼어먹고 등의 표현이 보여 주듯 우리의 오래된 언어생활에도 먹는 것을 중요시 했다는 것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또 우리는 예전부터 다른 민족에 비해 많이 먹었다. 성인 남자는 한 끼에 420cc의 곡물을 먹었는데, 이는 지금의 식사량에 비하면 3배에 이르는 것으로, 일본인은 물론 중국인에 비해서도 꽤 많은 양을 먹었다. 끼니는 예전에는 '조석(朝夕)끼니'라는 말 처럼 한 두 끼를 먹었으며, 해가 긴 여름철이나 힘든 일을 할 때에는 간단한 점심(點心)을 포함하여 세 끼를 먹기도 했다. 예전에는 어린이도 180cc를 먹어 지금의 어른 보다도 더 많이 먹었던 셈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많이 먹었을까? 그 원인은 아직도 알 수 없다. 그러나 가난해서 그랬다는 지적은 분명 사실이 아니다. 사람들은 흔히 예전에 너무나 어렵게 살아서 먹을 것이 생기면 정신없이 허겁지겁 많이 먹는 습성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그러나 예전의 가난이나 기근은 우리나라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농업생산력이 비약적인 발전을 하기 이전에는 중국, 일본, 서양 어디나 흉년, 기근이 들면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이 죽었고, 심지어는 영아 살해 등의 풍습이 횡행했다. 우리민족이 많이 먹었다는 것은 늘 많이 먹었다는 것이지 어쩌다가 한 번 먹을 것이 생겼을 때 닥치는 대로 많이 먹었다는 말이 아니다. 가난하면 늘 많이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의 주식은 쌀이었다. 조선시대에 쌀이 가장 많이 생산되었으므로 쌀을 주식으로 삼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다가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수출, 공출 등으로 쌀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며, 광복 이후 1960년대까지 남한 인구의 급격한 증가와 쌀의 완만한 증산, 보리의 급격한 증산이 식생활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쌀은 칼로리가 높고, 고른 영양소를 갖추고 있는 우수한 식품이다. 또, 벼는 파종량에 비해 수확량이 많고, 벼농사는 토지 이용도가 높아 많은 사람을 먹여 살릴 수 있는 훌륭한 곡식이었다.

 가장 중요한 부식인 김치는 무, 오이, 가지 등으로 만들었는데, 18세기부터 고춧가루가 양념으로 쓰여 지금처럼 빨간 김치가 생겨났으며, 19세기에는 배추가 주재료로 부상했다.

 식사도구로는 밥상과 수저를 들 수 있는데, 우리나라는 작은 소반을 써서 식사를 했고 성인은 각자 따로 상을 받아 먹었다. 집 구조가 조리를 하는 부엌과 밥을 먹는 방으로 분리되어 있고, 부엌에서 방에 이르는 동선이 복잡하여 소반을 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또, 중국이나 일본이 13, 14세기부터는 젓가락만으로 밥을 먹었던 것과 달리, 우리나라는 지금까지도 젓가락과 함께 숟가락을 써서 식사를 하고 있다. 이는 우리 상차림에는 항상 국이 있었는데, 그 국이 건더기가 많고 뜨거웠기 때문에 숟가락이 필요했던 것이다.

[전통사회와생활문화/이해준 송찬섭 전경목 정연식 정승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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