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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도담삼봉에 있는 정도전 동상/출처: Steve46814 at ko.wikipedia.com]


 정도전(1342~1398)의 호는 삼봉(三峯). 자는 종지(宗之), 본관은 봉화로서 아버지는 정운경(鄭云敬)이고 어머니는 우연(禹淵)의 서녀(庶女)이다. 당시 유학자로서 명망이 높았던 이색(李穡)의 문하에서 공부하였다. 1362(공민왕 11)년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375(우왕 1)년 북원(北元) 사신을 맞이하는 관리로 임명된 것에 반발하였다가 나주로 귀양갔다. 1388년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 회군을 단행하여 권력을 잡자 그의 천거로 요직에 등용되었다. 이듬해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여 공신에 책봉되었다. 1391(공양왕 3)년 과전법(科田法)을 시행하는 과정에서 반대파의 탄핵으로 봉화로 유배되었다가 이방원(李芳遠)이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한 뒤 중앙으로 복귀하였다. 이 해에 조준(趙浚), 남은(南誾) 등과 함께 이성계를 왕으로 옹립하여 실권을 장악하고 반대파를 숙청하였다. 개국 후 태조의 두 번째 부인인 강씨의 둘째 아들 방석(芳碩)을 세자로 책봉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군사와 재정의 실권을 장악하고 조선의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다. 1396년 명나라에서 외교 문서의 내용을 문제삼아 정도전에게 명나라로 입조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병을 핑계로 거부하였다. 1397년 요동 정벌을 주도하였으나 이듬해 이방원에 의해 피살되었다.



정도전의 삼봉집(三峯集)

위로는 음양을 조화롭게 하고 아래로는 서민을 편안하게 하며, 안으로는 백성을 밝게 다스리고 밖으로는 오랑캐를 진정하고 무마하는 것이니 국가의 포상과 형벌이 여기에 관련되며 천하의 정치와 명령이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사진 삼봉집/한국학중앙연구원]


'삼봉집'은 정도전의 사상과 정치적 지향을 담고 있는 책이다. 우왕 말년에 작성된 권근(權近)의 서문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처음 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1397(태조 6)년에 아들 정진(鄭津)에 의해 증보 간행되었는데, 이 때까지는 서문이 중심이었다. '삼봉집'은 이후 세 차례에 걸쳐 중간되었다. 1465(세조 11)년에 손자 정문형(鄭文炯)이 '경제문감(經濟文鑑)',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불씨잡변(佛氏雜辨)', '심기리편(心氣理篇)', '심문천답(心問天答)' 등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이어 1481(성종 18)년에는 정문형이 시부(詩賦) 100여 수와 '경제문감별집(經濟文鑑別集)'을 추가하여 간행하였다. 그리고 1791(정조 15)년에 왕명에 따라 성종대의 판본을 정리하여 다시 간행하였는데, 현재 전해지는 판본의 대부분은 정조 때 간행된 것이다.

 '삼봉집'은 모두 14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권 1에서 권 4까지는 각종 시문과 악장(樂章)이며, 권 5는 '불씨잡변', 권 6은 '심기리편'과 '심문천답', 권 7은 진법(陣法)과 습유(拾遺), 권 8은 부록, 권 9와 권 10은 '경제문감', 권 11과 12는 '경제문감별집', 권 13과 권 14는 '조선경국전'이다.

 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대체로 시문(詩文), 경세서(經世書), 사상서(思想書), 병서(兵書), 악장(樂章) 등 다섯부분으로 나누어 이해할 수 있다.


 '삼봉집'은 고려를 대신한 조선 국가의 사상적, 법제적 기초를 닦은 책이라 할 수 있다.

우선 사상적 관점에서 보면, 불교를 대신하는 성리학의 이념적 위치를 확립하였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불씨잡변'은 고려 말에 활발히 제기된 배불론을 집대성한 것이면서 종래의 단선적 비판을 넘어 체계적 비판을 시도한 것이다. 물론 불교에 대한 깊이 있는 철학적 이해를 바탕으로 제시된 비판이 아니라 불교에 대한 성리학의 우위를 제시한다는 정치적 목적성이 강하게 반영되어 논리가 일방적 성향을 띠고 있다. 하지만 불교에 대한 체계적 비판은 성리학의 정착을 위한 기초작업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며, 이후 기존 이념에 대한 비판의 수준을 넘어 당대의 이념으로서 그 내용을 심화시킬 수 있었다.

 한편 법제적 관점에서 보면, 15세기 조선 국가 체제 정비의 초석을 놓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조선은 태조대에 '경제육전'의 편찬을 시작으로 육전 체제에 입각한 법전의 정비를 모색하였고, 이것은 영구히 지켜 나갈 법전으로서 '경국대전'을 반포하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조선경국전'은 바로 법전에 입각한 국가 운영이라는 정책 지향의 출발이 되는 것이다. 이는 육전의 내용 중에서도 '헌전'을 특히 강조하며 후서(後序)를 덧붙인 데서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삼봉집'은 조선 국가의 중심 이념이라 할 수 있는 성리학과 법전 체제의 바탕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 조선 당대에 지성사적으로 높이 평가받지는 못하였다. 그것은 정도전이 태종과의 권력 투쟁 과정에서 제거되었던 사정에 기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후대의 학인들은 정치적 측면에서 정도전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경향이 있었고, 이에 따라 '삼봉집'도 주목받지 못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까지 '삼봉집'에서 제시한 조선 국가 체제의 이념적 원리가 부정된 것은 아니었다. 1791(정조 15)년에 왕명으로 '삼봉집'이 다시 간행된 것은 주목되는 부분이다. 정조는 1785(정조 9)년에 '대전통편(大典通編)'을 편찬하여 법전 체제의 재정비를 도모한 바 있다. '삼봉집'의 재간행도 그러한 관심의 한 반영이라 할 수 있는데, 이 점에서 '삼봉집'은 조선 일대에 걸쳐 국가 체제의 토대가 된 저작임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동서양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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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를 멸망시키고 새로 들어선 조선왕조는 건국과 함께 주자학을 통치이념으로 내세워 고려 때까지의 지배적인 이념이었던 불교를 비판하는 한편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 유교경전에 근거하여 기본법제를 정비하는 등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건설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정도전과 권근 등을 비롯한 관학파 유학자들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정도전은 왕조의 성립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학자로 조선을 기본적으로 유교적 윤리규범에 의해 통제되는 나라로 만들겠다는 이상을 품고 '조선경국전'을 편찬하여 제도 정비에 기여하는 한편 '불씨잡변' 등의 저술을 통해 불교를 이론적으로 비판하였다. 또 권근은 중앙집권적 관료제 국가를 지향하는 조선왕조의 성립 후 당시까지의 주자학을 가장 체계적으로 이해한 대표적인 학자로 '입학도설'이나 '오경천견록' 등의 저술로 조선 초기 주자학을 선도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권근의 글씨, 〈 해동명적〉에서, 규장각 소장, 백과사전/한국브리태니커]

 

 이들 관학파 유학자들은 조선조가 성립하는 데는 크게 공헌했지만 그런 공헌을 발판으로 중앙권력을 독점하면서 경제적으로는 대토지 소유자로서 기득권층을 형성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도덕적인 타락과 함께 권력의 남용 등 여러 가지 문제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특히 15세기 무렵에 이르면서 이들 대토지 소유자들은 무차별적으로 토지를 겸병함으로써 중소 지주들과의 갈등과 마찰이 극에 달했다. 이름은 물론이고 왕권을 위협할 정도로 그 세력이 비대해졌다. 결국 당시 군주였던 성종은 왕권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이들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껴 김종직을 비롯한 중소 지주 출신 신진 유학자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로 인해 김종직을 비롯한 지방 출신 주자학자들이 중앙의 요직을 차지하고 기존의 세력과 대립하는 국면이 조성되었고 그로 인해 정치세력 또한 둘로 나뉘게 되었는데, 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훈구파이고 후자의 이익을 대변하는 세력이 사림파이다.

 

 사림파의 진출로 궁지에 몰린 훈구파는 연산군이 즉위하고 나자 김종직이 생전에 세조의 왕위찬탈을 빗대어 비판한 '조의제문'을 썻다는 사실을 빌미로 삼아 1498년 김일손 등을 죽이고 김종직을 부관참시하는 등 비이성적인 대응으로 사림파를 탄압하였는데, 이 사건이 바로 무오사화이다.

 

[조광조의 글씨, 〈근묵〉에서, 성균관대학교 도서관 소장, 백과사전/한국브리태니커]

 

 이 같은 탄압에도 불구하고 사림파 유학자들은 지방 향촌 사회를 기반으로 꾸준히 성장하였으며, 이후 연산군이 폐위되고 중종이 즉위하자 이들은 다시 중앙의 정계로 진출하여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대표가 정암 조광조를 비롯한 일군의 사림파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주로 사헌부, 사간원 등 언론 관직을 통해 정계로 진출하여 기존의 공신들을 비판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하였는데 일종의 추천제인 현량과를 통해 자기 세력을 중아으로 진출시키고, 지방 향촌 사회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주자가 손질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군현마다 시행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강화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급진적인 개혁은 또 다시 기득권 세력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고 급기야 역모를 뒤집어씌워 조광조를 비롯한 다수의 사림파 유학자들을 희생시켰다. 이 사건이 기묘사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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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금 KBS 드라마 '정도전'이 인기리에 방영이 되고 있습니다.

'정도전'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너무나 유명한 인물들이 많이 등장합니다.

황금을 보기를 돌같이 하라던 최영 장군, 조선의 태조가 되는 이성계 장군,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 삼봉 정도전 등..

이런 인물들 중에 단연 포은 정몽주 선생의 고려를 향한 충심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귀감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한 포은선생의 충심은 조선의 3대 국왕이 되는 태종 이방원의 '하여가'에 대한 답으로 지었다는 '단심가'로 대표되며,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되어..라고 시작하는 시구는 우리들의 뇌리 속에 아주 강하게 남아 있어 이번 '정도전' 이라는 드라마에서 포은 선생의 고려를 향한 충심은 어떻게 그려질지 사뭇 궁금하게 만듭니다.

 

아래는 영천시에 위치하고 있는 포은 정몽주 선생을 추모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임고서원 입니다.

임고 서원에 가면 포은정몽주 선생과 관련된 유품 유물들도 함께 만나볼 수 있고, 옛서원의 모습과 새로 지어진 서원의 모습이 조화롭게 배치 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상세정보(영천시 문화관광)

포은 정몽주 임고서원은 고려말의 충신은 포은 정몽주(鄭夢周)선생을 추모하기 위하여 조선 명종8년(1553) 부래산(浮來山)에 창건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소실되어 선조36(1603)에 중건되었다.
인조 21년(1643) 여헌 장현광(張顯光)선생을 배향하고 정조11년(1787)에는 지봉 황보 인 선생을 추향하였으나 고종 8년(1871)서원 철폐령으로 췌철되었다. 1965년 복원하여 포은 선생만 봉향하고 있으며 1980년 보수·정화되었다. 또한 1990년부터 성역화 사업을 추진하여 기존의 서원 옆에 새로이 서원을 세워 웅장한 규모를 갖추고 있다.
현재는 옛서원과 새로 지은 서원이 공존하고 있다. 포은 정몽주선생은 고려충숙왕 복위6년1337)현 임고면 우항리에서 일성부원군 운관의 아들로 태어나 공민왕 9년(1360)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 등을 거쳐 성균대사성, 전법, 판도판서 등을 역임하였고, 조전원수(助戰元帥)가 되어 왜구토벌에 공을 세웠으며 대명국교(對明國交)에도 큰공을 세웠다.

고려 삼은의 한사람으로 기울어져 가는 고려의 국은을 바로 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공양4년(1392)이방원의 문객 조영규등에게 선죽교에서 피살되었다. 이후 조선태종 원년(1401)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익양부원군(益陽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으며, 시호는 문충(文忠)이다.

**주변볼거리

경주김씨지사공종택, 선원동철불좌상, 환구세덕사

 

 

 

 

[사진출처:브로드몰 커뮤니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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