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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구의 <백범일지>/ⓒ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 포털

<백범일지>는 백범 긴구가 직접 쓴 자서전으로, 상 하 2권으로 되어 있다. 김구가 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치면서 틈틈이 써놓은 친필원고라는 점에서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임시정부의 역할 등 독립운동사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일 뿐만 아니라, 조선 말기의 상황을 파악하는 데에도 유용한 사료이다. 1947년 12월15일 국사원에서 처음 김구의 아들 김신에 의해 초간발행을 필두로 오늘날까지 국내외에서 10여본이 출판사를 통해 중간되었다.

 

조선시대에 크게 성행했던 서당의 모습을 그 말기에, 그것도 '상놈'이 쓴 기록을 통해 생생하게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역설적이다. 일반적으로 서당은 양반의 자제들이 향교나 서원에 가기 전에 학습했던 사설 교육기구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상놈이 쓴 기록이란 바로 김구(金九, 1876~1949)의 <백범일지>를 가리킨다. 김구는 평민 출신의 어느 한 노인이 양반들이 쓰던 말총갓을 쓰고 출타하였다가 양반에게 들켜 갓을 찢기는 봉변을 당했다는 소문을 듣고서 양반과 평민의 차이가 무엇인지를 어른들에게 물었다. 어른들은 글공부를 해서 과거에 합격하면 양반이 된다고 대답하였다. 물론 이 말은 사실이 아니지만 어른들은 어린 김구에게 그렇게 대답하였던 것이다. 이 말을 들은 김구는 어떻게든 공부를 해서 과거에 합격하고 싶었다.

이 말을 들은 뒤로 글공부할 마음이 간절했다. 아버지께 서당에 보내 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아버님은 주저하셨다. 우리 동네에는 서당이 없어서 다른 동네 서당에 다녀야만 하는데, 양반의 서당에서는 나 같은 상놈은 잘 받아 주지도 않거니와, 설혹 받아 준다고 해도 양반의 자식들이 업신여길 터이니 그 꼴은 차마 못 보겠다는 것이다. 아버님은 집안아이들과 이웃동네 상놈친구의 아이들 몇 명을 모아 새로 서당을 하나 여셨다. 수강료는 가을에 쌀과 보리를 모아 주기도 하고, 청수리 이 생원이라는 분을 선생으로 모셔 왔다. 이 생원은 신분은 양반이지만 글공부가 모자라 양반 서당에서는 써 주는 데가 없어서 우리 선생으로 오신 것이다.

이러한 김구의 증언을 통해 우리는 서당에 대한 중요한 사실 몇 가지를 알 수 있다.

 

첫째, 서당에 출입하는 학동들의 신분에 따라 양반 서당과 상놈 서당으로 나뉘었다는 사실이다. 서당이 이와 같이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양반 서당에 상놈 학동이 다닐 수 없었고 평민 서당에 양반 학동이 드나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는 조선 후기 향교의 상황과 유사하였다. 향교의 동재(東齋)에는 양반 출신의 유생만 출입하고 서재(西齋)에는 평민 출신의 교생만 드나들었으며, 설령 결원이 생겨도 상대의 재(齋)에 드나들려 하지 않았다. 서당이나 향교 모두 신분을 철저히 따져 출입했음을 알 수 있다.

 

둘째, 조선 말기에는 평민들도 마음대로 서당을 꾸리고 글공부를 하였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평민들이 서당에서 글공부를 하는 것이 말기에야 비로소 시작된 것은 아니다. 평민들이 서당에서 글공부를 한 것은 조선 중기 이후 어느 시점부터일 것으로 추정된다. 이와 같이 평민들도 서당에서 글공부를 했다는 것은 조선시대 평민들의 문자 인식률이 매우 높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중요한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위 인용문에는 나오지 않았지만, 김구가 이미 서당에 들어가기 전에 한글을 익혀서 소설책을 읽을 줄 알고 천자문도 동냥글로 다 떼었다는 사실이다. 평민들도 어린 나이에 한글을 익히고 어깨너머로 천자문을 배울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셋째, 훈장에 대한 예우가 열악했다는 점이다. 당시 조선사회가 농업사회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면이 있지만, 일 년의 학채(學債)를 쌀과 보리로 주었으며, 그것도 가을에 한 차례 모아서 지급했다는 사실을 통해 당시 훈장에 대한 예우가 어떠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만일 흉년이 들면 가을에 수확할 것이 없기 대문에 나중에 받기로 한 학채는 지급될 수 없었다. 더군다나 평민 서당의 학부모들은 대부분 가난하여 저축해 놓은 자금도 없었기 때문에 흉년이 들면 학채를 받아 낼 길이 없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할 사실은 이러한 평민 서당이 오래 존속될 수 없었다는 점이다. 학동들이 모여서 공부할 장소 마련도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재정적인 지원도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실은 이어지는 김구의 증언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우선 우리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우리 집에서 선생의 식사를 받들어 모시기로 했다. -중략- 우리집에서 석 달을 지내고 나서 산동(山洞) 신존위(申尊位)의 집 사랑으로 글방을 옮겼다. -중략- 그런데 불과 반년 만에 신존위와 선생 사이에 반목이 생겨서 결국 그 선생님을 내보내게 되었다.  선생님이 밥을 너무 많이 자신다는 것이 쫓아낸 이유였다. 그러나 사실은 (신존위가) 자기 자식은 머라가 나빠서 공부를 못하는데 내 공부가 일취월장하는 것을 시기한 것이었다. -중략- 참으로 이른바 상놈의 생동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서당은 처음에 김구의 집 사랑을 글방으로 정하고 선생의 식사를 그의 집에서 제공하기로 해서 시작된 것이었다. 그런데 겨우 석 달이 지나서 신존위의 집 사랑으로 옮겨지고 불과 반년 만에 신존위와 선생이 반목하여 서당 운영이 끝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된 까닭은 김구나 신존위 등을 비롯한 평민 집안의 경제적 여건이 제대로 된 강학(講學) 공간을 마련할 수 없었으며, 동시에 학채는 고사하고 훈장의 숙식조차 제공하기가 버거웠기 때문이다. 재력이 있어야만 강학공간을 마련하고 훈자으이 숙식을 제공하며 학채도 지급할 수 있는데, 평민들의 재력이 매우 부실했기 때문에 설령 한때 서당을 설립한다고 해도 장기간 운영되지 못하고 단기간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실정이 이와 같았기 때문에 상놈 출신이 공부를 부지런히 해서 과거에 급제한 후 관리가 되거나 학문에 종사하여 대학자가 되는 것은 현실적으로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대부분의 평민들은 중도에서 공부의 목표를 수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님은 이따금 내게 이렇게 충고하셨다. "-중략- 너도 큰 글 하려고 애쓰지 말고 실용문이나 배우거라" 그리하여 나는 땅문서 짓기, 소장(訴狀) 쓰기, 축문 쓰기, 혼서문 쓰기, 편지 쓰기 등을 짬짬이 익혀서 무식한 우리 집안에서느느 상당한 명성을 얻었다. 문중에서는 내가 장차 존위 한 자리는 하리라고 기대했다.

김홍도의 '서당'/ⓒ국립중앙박물관

비록 출발은 과거에 합격해서 양반이 되고 가문의 명성을 떨치려는 목표에서 시작했으나 어려운 교육환경 아래에서는 그것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유서필지(儒胥必知)>에 나오는 것과 같은 아전 글(吏文)이나 익혀서 토지매매 문서와 소장, 축문이나 혼서 등 실용문을 서 주고 '시골에서 이름난 문장'으로 행세하다가 존위, 즉 면장(面長)이라도 한 자리 차지하면 그것으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물론 현실적인 여건이 이와 같이 열악했지만 그래도 재능이 있으면 나름대로 성공할 수도 있었다. 다음은 <백범일지>에 나오는 그러한 사례이다.

집안이 가난하여 좋은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못되자 아버님이 무척 걱정을 하셨다. 그러던 중 마침 글공부할 길이 하나 열렸다. 우리 동네에서 동북쪽으로 십 리쯤 되는 학명동(鶴鳴洞)에 정문재(鄭文哉)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그는 우리 같은 상놈이지만 과거하는 글로는 지방에서 알아주는 선비였고, 더구나 큰어머니와는 6촌 남매간이었다. -중략- 그의 집에는 여러 곳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시와 부(賦)를 짓고, 한쪽에는 서당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다.

정문재는 재능을 기반으로 소기의 성공을 거두었으나 재능 있는 평민이 제아무리 뛰어 보았자 그와 같이 훈장질하는 것이 최상이었다. 평민들이 오를 수 있는 '성공의 사다리'는 거기까지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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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에는 평민들도 서당을 꾸리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엄격한 신분제 사회인 조선에서도 후기 조선사회로 접어들면서 서당 교육을 평민도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환경이 조금씩 바뀌게 되었다. 그러나 서당은 학동들의 신분에 따라 양반 서당과 상놈 서당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향교에서도 동재(東齋)에는 양반 출신 유생만 드나들 수 있었고, 서재(西齋)에는 평민 출신 교생만 드나들 수 있었다. 이처럼 신분에 따라 엄격히 구분되어지긴 했지만 어쨋든 조선 말기에는 평민들도 서당을 꾸리고 글 공부를 할 수 있었으며, 그에 따라 평민들의 문자 인식률 또한 높았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신분에 따른 한계는 여전히 높았다.

 하지만 서당의 교사인 훈장에 대한 예우가 매우 열악했고, 평민 서당은 공간문제나 평민들의 미약한 재정능력 등으로 인해 사실상 오래도록 존속되기는 힘들었다. 또한 평민 출신이 서당 공부를 계속 이어간다고 해도 과거급제를 통한 높은 벼슬이나 학문에 종사는 것은 현실적으로 여전히 어려웠기 때문에 공부의 목표가 대부분 실용문 작성 대행, 면장(面長) 정도로 축소되거나 훈장 노릇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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