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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오복은 수(壽), 부(富), 강녕(康),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한다. 수는 장수(長壽), 즉 오래 사는 것을 말하며, 부는 부유, 곧 남으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고 자신이 뜻하는 것을 이룰 수 있는 재력을 의미한다. 강녕은 몸과 마음이 모두 건강한 것을 말하며, 유호덕은 덕을 좋아하여 남에게 베풀고 사는 것을 의미한다. 고종명은 일생을 깨끗하고 건강하게, 그리고 덕을 좋아하며 살다가 제명대로 생을 마치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고종명에는 앞에서 말한 네 가지가 모두 포함되어 있는데, 조선시대 사람들은 누구나 고종명하기를 희망했다.

 

고종명을 말할 때 으레 거론되는 것이 회갑(回甲)과 회훤(回婚) 및 회방(回榜)이다. 회갑은 태어난 지 60년이 된 것을 말하고, 회혼은 결혼한 지 60년이 된 것을 지칭하며, 회방은 과거에 합격한 지 60년이 된 것을 뜻하였다. 조선시대에는 먹는 것이 부족하고 질병도 자주 나돌았으며 의료수준 또한 높지 않아서 60세가 될 때까지 살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60세가 되면 회갑연을 성대하게 베풀고 더욱 장수하기를 축원하였다.

 

회혼은 회근(回卺)이라고도 하였는데, 혼인한 지 60년이 되는 해애ㅔ 행했기 때문에 이를 맞이하는 사람이 더욱 드물었다. 15세에서 20세 사이에 혼인한다고 가정하면 75세에서 80세가 되어야 회혼이 가능했는데, 부부가 모두 살아 있어야 예식을 치를 수 있었기 때문에 여간해서는 회혼례(回婚禮)를 볼 수 없었다. 회혼례는 노부부가 다시 신랑신부가 되어 혼인식을 치르는 것인데, 아들과 사위가 혼인식을 거행하는 집사(執事)와 신랑을 인도하는 기러기아범이 되고, 딸과 며느리가 신부의 수발을 드는 수모(手母)가 되었으며, 손자와 손녀가 구경꾼이 되어 한바탕 잔치를 벌였다.

전 김홍도필 담와 홍계희 평생도 중 '회혼례' 일부/ⓒ국립중앙박물관 

회방은 과거에 합격한 지 60년이 지나야 가능했기 때문에 회방연(回榜宴)을 구경하기가 회혼례보다 더욱 어려웠다. 문과 급제 평균 나이가 30세를 훌쩍 상회했으니, 90세가 넘어야 회방연을 실시할 수 있었다. 생원진사시 합격 평균연령은 이보다 어렸기 때문에 이는 종종 볼 수 있었다. '만력기유사마방회도첩(萬曆己酉司馬榜會圖帖)'이라는 회방연 관련 그림이 현존하는데, 제목을 통하여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문과 회방연이 아니라 생원진사시 회방연이다. 이 도첩은 만력 기유년, 즉 1609년의 생원진사시 합격자들이 60년이 지난 1669년에 장원으로 합격했던 이민구(李敏求)의 집에 모여 잔치를 벌이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그린 것이다.

 

장혼(張混, 1759~1828)의 문집인 <이이엄집(而已广集)>에는 회갑과 회후너 및 회방을 맞이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다음과 같이 잘 표현하고 있다. 다만 장혼은 회갑보다는 회방이 드물고, 회방보다는 회혼이 드물었다고 말하고 있다. 순서는 다르지만 회갑과 회방 및 회혼을 맞이하기가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세상에서 희귀한 일이라고 칭하며 사람들이 경하(慶賀)하는 것이 세 가지 있다. 생년(生年)의 회갑, 등과(登科)의 회방, 초례(醮禮)의 회근이 그것이다. 이것은 황왕(皇王)과 제백(帝伯)의 권세로도 취할 수 없고, 진나라나 초나라 도주공(陶朱公)이나 의돈(猗頓)의 부(富)로도 구할 수 없으며, 현인군자의 덕이라도 반드시 얻을 수는 없을 것이다. 오직 장수(長壽)한 후에야 가질 수 있다. 그러나 회갑을 맞이하는 것은 열에 대여섯이고, 회방을 맞이하는 것은 백에 서넛이며, 회혼은 천에 한둘이다.

<계서야담(溪西野談)>을 살펴보면, 회갑과 회혼 및 회방을 모두 치른 인물로 심액(沈詻, 1571~1654)이 거론된다. 그는 1571년에 태어나 20세인 158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고 26세인 1596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혼인을 언제 했는지는 알 수 없느나 그가 회갑을 맞이한 해는 1631년이며, 생원시의 회방이 된 해는 1649년이었다. 그러나 그는 문과 회방연도가 되는 1656년보다 2년 전에 사망하고 말았다. 따라서 <계서야담>에서 말하는 회방은 생원진사시 회방임을 알 수 있는데, 그와 같이 회갑과 회혼 및 회방을 모두 치른 인물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몇명 되지 않았다.

 

회갑, 회혼, 회방을 다 맞이하고, 여기에 더하여 기로연(耆老宴)과 구순연(九旬宴)까지 치른 인물로는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있다. 그는 1783년에 태어나 15세인 1797년에 강릉김씨(江陵金氏) 김계락(金啓洛)의 딸과 혼인하고 20세인 1802년에 문과에 급제하였다. 회갑을 맞이하던 1843년 그는 좌의정을 거쳐 판중추부사로 재임하였다. 김씨와 혼인한 지 60년이 되던 1857년에 국왕은 장악원(掌樂院)에 명하여 그의 회혼연(回婚宴)에서 음악을 연주하도록 하고, 탁지부(度支部)에 지시하여 잔치비용을 지급하도록 했으며, 관원을 보내어 안부를 물었다. 문과에 급제한 지 60년이 지난 1862년에 국왕은 그에게 궤장(几杖, 의자와 지팡이)을 하사하고 회방홍패(回榜紅牌, 홍패는 붉은 종이에 쓴 증서라는 뜻으로 문무과거 합격자에게 발급하던 일종의 합격증이다.)를 발급하였는데, 이 홍패가 현재 그의 후손가에 소장되어 있다. 홍패를 발급한 것은 이원익(李元翼) 이후 처름 있었던 일로 알려져 있다.

현종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이경석(李景奭 1595~1671)에게 내린 하사품 궤장/ⓒ경기도박물관

그런데 이보다 10년 전인 1852년에 정원용은 나이가 70세가 되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기로연을 베풀었다. 그는 관례에 다라 사직상소를 올렸으나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리고 이로부터 다시 20년 후인 1872년에 90세가 되자 그는 구순연을 크게 열었다. 고종은 "영부사가 올해 90세가 되었다. 대관(大官)으로 이 나이에 이른 인물은 국조 이래 불과 서너 명밖에 되지 않으니, 이것이 어찌 한 집안만의 경사이겠는가? 또한 태평한 시절의 상서로운 징조이다"라고 말했다.

 

비록 지금에 와서는 회갑을 맞이하는 일은 어찌보면 거의 당연시 되는 시대가 되었다고는 하지만 일생에서 고종명을 누린다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회갑을 맞이하기도 어렵던 시절에 심액과 정원용은 이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복록을 모두 누린 행운의 인물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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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양반들은 관직에서 물러나거나 은퇴한 후에는 대부분 지방으로 낙향하였다. 그런데 이들은 낙향한 후에도 양반가문으로서의 지체와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했다. 그들의 자손은 유명한 학자의 문하에서 교육을 받고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로 진출해야 했다. 또 향교나 서원에 출입하며 그 지방의 양반들과 깊은 유대관계를 맺어야 했다. 친구들을 집으로 자주 초대하고, 방문한 친구들에게는 언제나 소흘함이 없도록 융숭히 대접해야 했다. 아울러 좋은 집안과 대대로 혼인을 맺어 혼맥(婚脈)도 형성해야 했다.

19세기 화가 '성협'의 '고기굽기'/ⓒ국립중앙박물관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중앙과 연결되는 두 가지 조건을 더 갖추어야 했다. 하나는 이른바 경화세족(京華世族, 서울의 양반으로 권력을 장악한 귀족화한 양반을 뜻함) 또는 명문세족(名門世族, 이름을 떨치고 세력이 있는 양반 집안)과의 교유가 있어야 했으며, 나머지 하나는 중앙부서에 근무하고 있는 서리(書吏, 중앙과 지방의 관청에 딸려 있던 하급 관리)들과 연망이 있어야 했다.

 

우선 지방 양반과 경화세족과의 교유의 예로 전라도 부안현에 세거하는 부안김씨의 예를 보면 이들은 조선시대에 무노가 급제자를 가장 많이 배출한 가문 중의 하나인 반남박씨(潘南朴氏)와 교유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반남박씨와 부안김씨가 언제부터 교유를 시작하였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지만 박동량(朴東亮, 1569~1635)과 김홍원(金弘遠, 1571~1645)이 그 시초가 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박동량은 한때 부안현으로 유배당한 적이 있는데, 이때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김홍원이 귀양살이하는 그를 위로하면서 가까워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 후 두 집안은 대대로 교유하였다. 박동량의 종손(從孫)인 박세모(朴世模), 박세견(朴世堅), 박세해(朴世諧) 등은 김홍원의 아들인 김명열과 절친하게 지냈다. 또 박세표의 아들인 박태관(朴泰觀)과 조카인 박태겸(朴泰謙) 등은 김번의 아들인 김수종(金守宗)과 매우 친근하게 지냈다.

 

서울에 사는 반남박씨와 부안에 거주하는 부안김씨는 서로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자주 왕래하지는 못했지만 서신 교환 등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전달하고 또 선물 등을 주고받았다. 이들이 교환한 선물의 내용을 모두 파악할 수는 없지만, 김수종과 박태관 등이 주고받은 선물의 내용을 간찰에 기록된 것만을 근거로 조금이나마 엿볼 수 있는데, 실제로는 기록된 것 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김수종이 박태겸, 박태관과 주고받음 물품들

번호 일시 김수종이 보낸 물품 김수종이 받은 물품
01 1699/01 대복, 괴판, 담배 달력
02 1701/05
03 1703/07 복, 종이  
04 1703/12 물고기  
05 1704/11   달력, 먹
06 1705/01 괴판
07 1706/01 차양죽 해묵, 주재
08 1706/05 나락, 물고기, 푸른 대
09 1706/12   달력
10 1706/12 차양죽 달력
11 1708/08  
12 1708/08   붓, 먹
13 1709/03 망건  
14 1710/01 푸른대나무 달력
15 1710/12   달력, 붓
16 1711/12   달력
17 1712/08 물고기, 돈  
18 1713/04   붓, 먹
19 1713/11   달력
20 1714/01  
21 1714/02  
22 1714/02  
23 1715/03 벼, 대하
24 1715/08  
25 1716/01 돈, 대하 달력, 먹
26 1716/05 벼, 돈, 대하 아이 약, 붓
27 1716/10 나락, 물고기  
28 1716/11 달력
29 1717/05 망건, 천초, 참빗 부채, 먹, 붓
30 1718/01   아이 약
31 1718/11 생강  
32 1721/12 보리, 괴판  
33 1733/12   달력
34 미상   납제
35 미상 달력, 붓
36 미상   종이
37 미상 쌀, 콩, 말죽  

 

김수종이 박태겸이나 박태관에게 보낸 선물은 주로 대하와 전복 같은 어물, 망건과 참빗 등의 생활용품, 담배와 생강같은 기호품, 그리고 식량과 돈이었다. 이에 비해 박태겸이나 박태관이 김수종에게 보낸 물품은 붓이나 먹과 같은 문방구와 책력 등이었다.

 

주고받은 선물의 종류나 양만을 놓고 따져 보면 김수종이 박태겸이나 박태관에게 보낸 선물이 그들로부터 받은 것보다 훨씬 많았다. 따라서 이들의 관계에서 김수종은 커다란 손해를 보았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박태겸과 박태관은 과거의 실시시기, 국왕의 병세, 각종 사건과 고변 등을 비롯하여 국내외의 정세와 관련된 정보를 김수종에게 상세히 전달해 주었다. 그 결과 김수종은 비록 궁벽한 해안가에 살고 있어도 서울 소식을 손바닥 들여다보듯 알고 있었다. 그들은 김수종이 억울한 일을 당하였을 때에는 이를 원만하게 해결할 수 있도록 고관의 청탁편지를 받아주거나, 감사나 현감이 그들의 지인일 경우에는 이들에게 직접 부탁하기도 했다. 비록 성사되지는 못했지만 김수종이 참봉으로 천거되었을 때에도 임명될 수 있도록 온갖 노력을 기울였다. 이러한 것들이 배경이 되어 김수종은 부안지역에서 정보력 있고 권세 있는 양반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다음으로, 지방 양반과 서리와의 연망관계인 예로 현재는 경상도 봉화군 봉화읍에 있는 유곡마을은 예전에는 안동에 속하였던 곳이다. 그곳에는 세상에 '닥실권씨'로 널리 알려진 안동권씨들이 세거하고 있는데, 이들은 권벌(權橃, 1478~1548)의 후손들이다. 이 안동권씨는 조선 말기에 이조(吏曹)의 서리인 오상린(吳相麟)과 밀접한 연망을 형성하고 있었는데, 이와 같이 양반들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서리를 '단골리(丹骨吏)'라고 불렀다. 권벌의 후손 중에 권호연(權好淵, 1824~ ?)이란 인물이 있는데, 그는 1859년 문과에 급제한 후 관례에 따라 삼관(三館, 조선시대 학술 문필 기관인 성균관-승문원-교서관의 통칭) 중의 하나인 승문원에 부정자로 배속되었다. 그 후 그는 인사철이 다가오자 정주(政注), 즉 승정원 주서(注書)로 임명될 수 있는 방법이 있는지 궁금해서 단골리였던 오상리에게 이를 알아보도록 지시하였다. 오상린이 이에 대해 수소문해 보니 이미 다른 사람이 내정되어 있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고목(告目)을 권호연에게 보내어 그간의 사정을 간략히 보고하고 있다.

 

삼가 엎드려 아룁니다. 보내 주신 편지를 일거 보니 위로 됨이 큽니다. 지시하신 것은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정주(政注)에는 윤영신(尹榮信), 조병직(趙秉稷)이 확정되었으니 양해하시는 것이 어떠한지요. 평사(評事)에는 박해철(朴海哲)로 정해졌으니 헤아리시라는 뜻으로 알립니다.

 

중앙의 서리들은 이와 같이 지방 양반에게 인사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임명장을 작성해 주고 근무일수 계산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등 업무와 관련된 자문에 응했으며 서울에 있는 집과 노비 및 녹봉 등을 관리해 주기도 했다. 이에 반해 양반들은 서리에게 대가로 선물이나 돈을 주었다. 지방 양반과 중앙 서리의 끈끈한 관계를 매우 잘 드러내 주는 풍속이 있었는데, 그것은 '하선동력(夏扇冬曆)'이다. 여름에 지방 양반들이 서리들의 노고에 보답하려 부채를 만들어 보내고, 겨울에는 그 반대로 중앙 서리들이 책력을 구해서 지방 양반들에게 보내 주었다.

 

앞서 두 가지의 예와 같이 지방 양반과 중앙 사이에는 두 가지 연망이 있었다. 하나는 경화사족과의 연망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중앙 서리와의 연망이었다. 지방 양반들은 이와 같이 두 개의 연망을 형성하고 유지해야만 토반(土班)으로 몰락하지 않고 양반으로서의 지체와 명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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