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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 토지 등의 재산을 둘러싼 소유권 싸움 못지않게 많이 나타나는 사건은 채무관계이다. 여기에는 채무 이행 요구, 물건의 매매대금 지급 관련 등이 있다. '빌린 돈(債錢)'을 갚으라는 요구에도 다양한 채무관계가 있겠지만, 민간에서 행해지던 고리대에 관한 것도 적지 않았다. 빈농들은 농사를 짓거나 생활을 위해 어쩔 수 없이 고리대를 쓸 수밖에 없었다. 이처럼 채무는 직접적인 채무가 대부분이기는 하지만 먼 길을 함께 다녀온 족인(族人)이 경비를 갚지 않았다거나 때로는 약을 먹고 약값을 내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반면에 빌린 돈을 갚고 난 뒤에는 다시 추급요구를 할까 걱정하여 관에 입지성급(立旨成給, 관에서 공증하는 문서)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입지(立旨) 문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 밖에 물건의 매매대금에 대한 내용도 적지 않으며, 목화, 약재, 목재, 포, 생견, 철물, 당물과 등의 물품값을 둘러싼 송사가 일어났으며, 더불어 이 시기의 다양한 상품의 매매 실태도 함께 알 수 있다.

또, 옥사(獄事, 크고 중대한 범죄를 다스리는 일 또는 그 사건)에 따른 비용을 물리는 것도 채무관계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데, 옥사(에 따른 비용은 사건을 일으킨 당사자 또는 가족이 부담하게 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특히 살옥(殺獄, 살인 사건에 대한 옥사)에 대해 초복검(시신의 첫 검안과 재검안)에 사용한 부비(浮費, 일하는 데 써 없어지는 비용)를 가족, 친지에게 물려서 결국 집안 물품과 전답까지 사용한 예까지 있다. 그래서 정약용은 살인이 일어나도 검안에 따른 비용 때문에 관에 알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고 하였다.

 

또, 대가를 받고 소를 먹이다가 소가 죽은 경우도 있었는데, 소를 먹이는 과정에서 소가 죽으면 당연히 배상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런 경우 소 주인도 손해를 보지만, 먹여 기르는 사람도 그간 들였던 노동력에 대한 대가는 받을 길이 없어지게 된다. 이런 경우 관에서는 서로 이야기를 나누어 액수를 정하라고 하고, 관에다가 묻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답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채무관계 외에 농민적 권리와 관련된 갈등도 많은데 여기에는 소작권, 초지, 수리 이용권 등이 있다.

이 시기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작인의 경작권이 인정되었는데 주주의 갑작스러운 이작, 탈경에 대해 작인이 호소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 점은 '목민서'에서도 매우 중요시하였는데, 특히 파종 이후에는 경작권을 빼앗지 못하게 되어 있는데 지주가 소유권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때로는 파종 이후까지 자의에 의해 작인의 경작권을 빼앗는 일이 발생하여 갈등이 심화되고 있었다. 또 이 과정에서 새로이 경작권을 얻게 된 농민이 구 작인의 항해와 저항 때문에 경작을 할 수 없게 되었다고 호소하기도 하였다.

 

경작권 이외에도 농업과 관련 있는 초지, 수리 등의 이용권을 둘러싼 갈등도 보인다. 특히 수리의 확보를 둘러싸고 면리 간의 갈등이 야기되어 집단적인 등소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때로는 공동수리시설이 개인의 토지에 피해를 입힘으로써 촌리민과 개인이 대립하기도 하였다. 보를 축조함으로써 개인의 토지에 피해를 가져오게 되는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참고 : 조선시대 민장의 내용으로 보는 갈등들-① 부세 운영에 대한 호소]

[참고 : 조선시대 민장의 내용으로 보는 갈등들-② 민간의 갈등]

 

[참고 : 조선시대 민소(재판)의 절차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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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의 갈등으로는 지금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고도 볼 수 있는데, 주로 노비, 토지 등의 재산을 둘러싼 소유권 싸움이었으며, 그 외에 도난, 서로간의 시비를 비롯한 소소한 싸움이 있었다.
 
먼저 토지의 경우가 가장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는데, 사회보장제도가 없는 당시로서는 큰 돈이 필요하면 우선 토지를 활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환퇴(環退)라는 제도가 있었다. 환퇴는 일종의 조건부 매매로서, 소유권 이전을 한시적인 것으로 보아 일정한 시기 이내에 소유권 봔환을 요구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소유권 이전과는 다른 전근대적인 매매형태라고 하겠다. 그런데 원주인이 환퇴를 요구하였지만 현 소유자가 응하지 않으면 관에 민소를 할 수밖에 없었다. 토지뿐 아니라 시장(柴場, 관청의 땔감 채취를 위해 특별히 지정한 지역 ), 심지어 가옥도 환퇴의 대상이 되었다.  반면 환퇴제도를 악용한 사례도 있어 환퇴조건이 없이 매입하였거나 매입한 지 오래된 토지에 대해 환퇴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광무5년 전답환퇴명문(光武五年田畓還退明文)/ⓒ국립중앙박물관

다음으로 소유권을 강제로 빼앗는 일들도 더러 있었다. 주로 권세가들이 저지르게 마련이었는데, 물론 멀쩡한 토지보다는 개간지를 대상으로 하기가 쉬웠다. 새로이 개간하거나 이용한 지 오래되었는데 갑자기 소유권을 주장하여 빼앗거나, 분명히 민결인데도 궁방전에 들어 있었다고 주장하여 소유권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심지어 오래전에 빈 땅에 가옥을 지은 것을 뒤늦게 빼앗으려 한 사건도 있었고, 문권을 위조하여 전답이나 시장(柴場)을 빼앗으려 한 사건도 있었다.
 
매매과정에서 문제가 있는 투매, 암매, 이중 매매 또는 매매 방해 등의 사례도 있었다. 이를테면 원소유자의 동의 없이 몰래 팔아 버림으로써 나타나는 문제를 들 수 있다. 예를 들어 문중의 위로 담이나 산지 등을 족인 등 특정인이 팔아 버렸는데 문중이 이를 뒤늦게 알고 문제 삼음으로써 갈등이 빚어졌다. 전당잡힌 전답을 방매하거나 고의로 이중 매매를 행하는 경우도 있다. 주인이 전답을 매매하려 할 때 이를 경작하는 작인이 매매를 방해하기도 하였다. 주인이 바뀜으로써 경작권을 빼앗길까 두려워한 것이다.
 
노비를 둘러싼 분쟁도 적지 않았다. 소유노비의 매매과정이나 노비신분의 확인에 따른 문제가 복잡하기 때문이다.
 
산송은 산지를 둘러싼 소송이지만 실제로는 소유권만의 문제는 아니었다. 조선 후기 유교적 윤리에서 부계 중심의 종족질서가 형성되어 가면서 부계친족의 분묘를 모시는 족산(族山)이 형성되어 갔다. 이처럼 족산을 갖추고 지켜 나가려면 인근에 분묘를 가진 측과 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시대가 내려감에 따라 문중조직이 분화하면서 친족 내에서도 산송이 일어나게 되었다. 후손 간에 산지를 나누어 사용하게 되겠지만, 그 과정에서 경계가 불분명할 수도 있고 또 경계를 넘는 경우도 생기기 때문이다.

윤상정 산송소장(尹相定山訟訴狀)/ⓒ국립중앙박물관

한편으로 유교적 상·장례와 종족의식이 시대가 내려오면서 중인과 양인층에게 확산되면서 이들도 분묘를 위한 산지를 확보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특히 여건이 좋지 않은 양인층으로서는 이를 확보하기 어려우므로, 암장을 하고 발각이 되면 도피하는 일도 벌어졌다. 따라서 관에서도 투장한 자가 도망하면 집안의 문장(門長)을 잡아 오라고 명령하기도 하였다.
 
산지의 매매를 둘러싼 문제도 일반토지보다 복잡하였다. 산지 속의 분묘에 대한 이장이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매입 이후에도 끊임없이 산송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또 산지의 목재 이용권을 확보하려고 하면서 분쟁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산지를 소유한 쪽에서는 목재 등에 대해 배타적인 이용권을 확보하려 하였고, 생계를 위해 산림을 이용하려는 쪽에서는 몰래 작벌하면서 서로 충돌하게 되었다. 이런 경우는 토지 소유권과 산림에 대한 공동 이용권의 대립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공동 이용권을 주장하는 자들은 빈농층이 대부분이었으므로 여기에는 어느 정도 계급적·계층적 대립도 있을 것이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산지를 가진 집안은 족계를 형성하거나 집안끼리 연대하여 금송계(禁松契)를 결성하면서 산지를 수호하고 민인들의 산림 이용을 철저하게 통제하기도 하였다. 이들은 향촌공동체의 금송계와 연대하여 산지를 수호하면서 반대급부로서 시초 채취권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반면에 목재를 이용하려는 측은 무리를 지어 입산하여 나무를 작벌하였다. 특히 읍저의 초군(樵軍)들은 읍저의 세력을 믿고 저질렀을 것으로 보인다.
 
 
[참고 : 조선시대 민장의 내용으로 보는 갈등들-① 부세 운영에 대한 호소]
 
[참고 : 조선시대 민소(재판)의 절차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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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장에서는 무슨 내용을 주로 다루고 있을까? 여기에는 부세문제가 첫 번째로 꼽힌다. 이 경우 부세 운영에 대한 호소라고 할 수도 있고, 부세를 통해 관의 조치나 지배구조에 대하여 저항하였다고 볼 수도 있다.

 

먼저 부세 가운데 가장 기본이 되는 전정에 관련된 내용이다. 전세를 감면 또는 면제해 달라는 요구가 많았다. 전답이 진전(陳田)이 되었거나 재해를 입어서 경작할 수 없는 경우, 또는 비가 오지 않아서 제때에 모내기를 하지 못하는 등의 문제로 전세를 낼 수 없는 상황 때문이다. 한편으로는 자신의 경지면적 이상으로 세가 매겨지거나(加錄), 다른 사람들에게 부과되어야 할 수세결수가 책정되는 등 오류를 바로잡아 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이 경우 세를 매기는 과정에서 담당하는 서원, 감색 등이 농간을 부렸을 수도 있다.

서병훈 면세청원소장 일괄(徐秉勳免稅請願訴狀一括)/ⓒ국립중앙박물관

이러한 문제에 대해 다시 조사하여 이정하도록 하거나, 때로는 잘못 책정되었다면 담당자를 처벌하고 그에게 환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담당자에게 처리를 맡기면 잘 해결되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수세가 잘못 들어왔다면 그쪽으로 이록(移錄)해야 하는데, 관에서 이록받을 사람을 데려오라고 하여 민간에 책임을 넘기기도 하였다. 조선후기에는 양전 자체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관에서는 가급적 현상 유지, 또는 민간에서 알아서 수세액을 담당하도록 하고 있다. 따라서 소유자나 경작자가 몇 차례 바뀌어도 파악하지 못하고 처음 책정되었던 사람의 이름으로 납부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농민들은 힘들게 농사를 지으면서도 농사일뿐 아니라 제대로 전세가 매겨지는지, 전세를 책정하는 이서들이 농간을 부리지 않는지 살펴보아야 하였다. 더구나 지주들은 점차 전세를 작인들에게 넘기는 추세여서 농민들의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다음음 군정과 관련된 내용이다. 군정은 토지보다 변동이 심한 사람을 직접 다르기 때문에 문젯거리가 더 많이 발생할 수 있다. 여기에는 군역의 탈급에 대한 호소가 가장 일반적이었다. 한 사람에게 군정이 이중삼중으로 부과되거나(첩역),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아들에게 매겨지거나, 이미 죽은 사람에 대해 계속 부과하는 경우가 대표적이며, 때로는 양반인데 군역이 매겨졌다고 하여 탈급을 요구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조사를 한 뒤 처리해야겠지만 당연한 요구의 경우에도 해결이 쉽지만은 않았다. 군역은 고을-면-리 단위로 일정한 액수가 있었고, 다른 사람의 이름으로 계속 내려오기도 해서 파악하기 쉽지 않았다. 관에서는 이런 사정을 알기 때문에 책임을 회피하려고 하였다. 탈급하려는 사람에게 대신 군역을 맡을 사람을 구하라고 윽박질렀다. 죽은 사람의 탈급도 잘 들어주지 않는 형편이어서 나이가 많다거나 병을 호소하는 경우는 아예 논의조차 어려웠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보면, 1863년경 강원도 철원(북면 원지리)에 사는 평민 김복동의 집은 군역이 5명이다. 그와 아우, 그리고 세 아들이 모두 군역을 지고 있었는데 새로운 군역이 부과되었다. 셋째 아들에게는 다른 군역이 중첩하여 부과되었던 것이다. 이는 면임 윤도신이 농간을 부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같은 마을의 이응규라는 자가 벌을 받게 되면서 두 군역을 담당하는 것으로 벌을 대체하였는데, 면임은 이용규에게 뇌물을 받고 군역 하나를 빼 주었고 대신 김복동의 셋째 아들에게 중첩해서 배정하였다. 이에 김복동은 민장을 올렸는데, 관에서는 몇 차례 시간을 끌다가 1년 만에 그 역을 탈급하고 다른 사람에게 대신 정할 것을 명령하였다. 면임의 농간에다가 관에서 늑장을 부리다가 여러 차례 호소하자 뒤늦게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 그 당시 이런 일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처리되는지 짐작할 수 있다.

제한능 탈역청원소장(諸漢能頉役請願訴狀)/ⓒ국립중앙박물관

환곡의 경우 19세기에 들어서면서 가장 문제가 심각하였다. 양반의 경우 '가세가 빈궁'하다며 환곡 분급을 면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기도 하지만, 일반농민들은 도망이나 유리, 사망으로 인해 분급을 면제받고자 하였다. 환곡의 액수가 지나치게 많다는 호소도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유서필지>에 부세에 관한 민장은 군역과 환곡의 사례가 있는데, 군역은 양반가와 관련된 것인 반면 환곡은 가난한 집에서 분급을 받더라도 나중에 갚기 어렵다는 점을 들어서 면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무엇보다도 본래 환곡은 흉년 구제를 위해 만들어졌는데,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분급을 한다는 것이 문제였다. 1872년 철원 갈말면 동막리 도기점에 사는 김서경은 자식 하나 없이 맹인 아내와 둘이 살고 있는 등짐장수였다. 김서역에게도 환곡이 배정되자, 이를 갚기 어려웠기 때문에 분배 대상에서 제외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반면에 관에서는 환곡을 강제로 분급하기 때문에 탈급을 하려 하지 않았다. 김서경은 자신이 떠돌이생활을 한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였고, 결국 관에서는 이런 자에게 분급하면 회수하기가 어렵다고 보았는지 제외시켰다. 이처럼 한사코 환곡을 받지 않으려고 민장을 올리는 점에서 환곡의 문제점을 생생하게 볼 수 있다.

 

고을에서 부과하는 갖가지 잡세에 대한 요구도 적지 않았다. 잡세는 특별한 원칙 없이 지방관이 자의적으로 부과하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일반민들에게는 삼정보다 수탈적인 것으로 비추어졌을 수도 있다. 잡역 또한 대상자가 사망했거나 촌리의 실정이 너무 어렵거나, 또는 본래 역에서 제외된 제역촌(除役村)이라는 이유로 탈급을 요구하였다. 잡역은 대체로 동리 단위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동리에서 요청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동민들이 등장을 통해 잡역을 침범하지 말라고 호소했지만 관에서는 의례적으로 그냥 시행하도록 명하였다.

 

이상의 부세에 관해서는 이를 담당하는 국가와 관에 대한 민원의 성격을 띠고 있다. 여기서는 담세자인 일반민중이 살아가는 모습을 잘 보여 준다. 특히 전세는 토지를 가진 양반층이 민장을 많이 올린 반면에 군역, 환곡, 잡세 등은 일반민의 호소가 더 집중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토호가 아닌 대부분의 양반은 평민들과 크게 구분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조선 후기에 인구가 증가하고 토지의 분할 상속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면서 지주가 가진 토지규모도 줄어들었다. 이를 막기 위해 장자에게 토지를 집중하거나 많은 전답을 제위전(제사 비용을 충당하기 위한 토지)으로 할당하고 종손에게 관리하게 하여 종가형 지주가 출현하였다. 반면에 종손이 아닌 경우 토지규모는 더욱 영세해졌고, 또 한편 관료가 되지 못함으로써 신분적으로 낮아지게 되었다. 따라서 양반이라고 하더라도 일반민과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전체적으로 보더라도 18, 19세기에 개별 농민의 경작면적은 줄어들었다. 따라서 이들의 경제실태는 어려워질 수밖에 없는데 비해 부세의 종류와 액수는 늘어나고 있어 민의 호소, 저항이 확대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부세는 대체적으로 개인에게 납부 책임이 있고, 이에 따라 개인이 주로 감면 등을 호소하기도 하지만, 실제 부세의 부과와 징수에 있어서 촌리의  공동적인 책임이 없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특히 군정의 경우 이정법(里定法)이라고 하여 군액의 충원을 촌리에서 책임져야 했다. 잡세의 경우도 이를 해결하기 위해 면리에서 힘을 모아 토지를 마련하는 등 공동납 방식이 채택되고 있었다. 따라서 부세문제에 대해 때로는 개인적으로, 때로는 촌리단위로 대응이 필요하였다.

 

[참고 : 조선시대 민소(재판)의 절차와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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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조선시대에 재판을 담당하는 기관에는 삼법사(三法司), 사송아문(詞訟衙門), 직수아문(直囚衙門) 등이 있는데, 이중 삼법사는 중앙의 형조, 한성부, 사헌부를 가리킨다. 사송아문은 민사사건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지방의 군현, 감영, 서울의 한성부, 자예원, 형조, 사헌부를 가리킨다. 직수아문은 죄수를 직접 구금할 수 있는 기관들로, 가두어 놓고 심문할 정도의 중죄인을 다루는 기관이다. 여기에는 병조, 형조, 한성부, 사헌부, 승정원, 장예원, 종부시, 관찰사, 수령 등이 해당된다. 이처럼 조선왕조의 여러 기관은 재판과 형벌에 관한 권한을 가지고 행사였는데, 특히 지방의 경우 각 도의 관찰사와 군현의 수령은 사송아문, 직수아문에 속하여 중요 재판기관으로 설정하여 행정을 담당할 뿐 아니라 재판업무를 담당하기도 하였다. 그 가운데 관찰사는 사형 다음으로 중한 형벌인 유배형까지 판결하고 집행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령은 태(笞) 이하의 범죄에 대한 재판과 형벌권을 지니고 있었다. 그 이상의 범죄는 심리를 한 다음 관찰사에게 보고하여 지시를 받았다. 그리고 병영, 통영 등의 군문도 상당히 광범위한 재판권을 행사하였으며, 감영만큼은 아니지만 지방 군현보다 상급기관으로서 지휘권을 행사하였다.

조선시대 동헌/ⓒ오마이포토

 

수령의 재판권

수령의 임무 일곱 가지(수령칠사)에서도 가장 기본적인 임무가 조세 수취와 재판이라고 한다. 더구나 조세 수납은 자신의 형벌권의 뒷받침을 받아 완수하고 있었다. 수령은 조세 납부 기관을 정해 담당자를 독려하고, 정한 날짜를 지키지 않으면 담당자와 납부자들에게 형벌을 내리고 독납하였다.

**수령칠사 (守令七事, 조선시대 수령이 지방의 통치에 힘써야 할 일곱 가지 임무)
농상성(農桑盛 : 농상을 성하게 함)·호구증(戶口增 : 호구를 늘림)·학교흥(學校興 : 학교를 일으킴)·군정수(軍政修 : 군정을 닦음)·부역균(賦役均 : 역의 부과를 균등하게 함)·사송간(詞訟簡 : 소송을 간명하게 함)·간활식(奸猾息 : 교활하고 간사한 버릇을 그치게 함)의 일곱가지로서 ≪경국대전≫ 이전(吏典) 고과조(考課條)에 실려 있다.

이처럼 수려의 재판·형벌권은 한 고을을 다스리는 가장 큰 무기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민의 입장에서는 이런 형벌을 당하지 않으려고, 때로는 이러한 형벌의 힘을 이용하여 자기가 겪고 있는 문제를 해결하려고 민소를 하게 된다.
 
이렇듯 한 지방의 소송은 해당 지방관이 담당하였다. 다만 지방관이 자리를 비울 경우 이웃고을의 수령이 겸관으로서 민장을 받아 처리하였다. 양쪽 지방 사람이 재판에 관계될 때에는 원고는 피고가 있는 지방의 수령에게 민장을 내도록 되어 있었다. 피고에게 무언가를 강제하기 위해서는 피고를 다스리는 지방 수령의 힘을 빌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같은 재판의 과정은 먼저 원고가 민장을 내어 소송을 제기하는 것으로 시작하였다. 그 고을 백성이면 누구나 민장을 제출할 수 있었다. 양반이나 노비나 신분의 제한 없이 제출하는데, 노비의 경우 주인을 대신해서 내기도 하였다. 때로는 등장이라 하여 집단적으로 내기도 하였는데, 주로 면리공동체, 문중이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관임, 면·이임이 행정 보고로서 내기도 하였다. 제출자는 어느 면, 어느 동 누구라고 쓰고, 다른 고을 사람일 경우에는 어느 고을 누구라고 밝혔는데, 이 경우 소송 상대나 관련된 물건이 이 고을에 있는 경우에 한하였다.
 
소송의 성격은 다양하였다. 형사 고발, 민사소송 제기, 행정적 청원, 행정 소송, 행정 보고 등을 모두 포함하였다. 이렇게 다양한 이유는 재판 자체가 수령에 대한 일종의 청원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수령의 입장에서는 재판은 백성을 다스리고 백성의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수령의 일상적 업무의 한 부분인 한편 조세 수취 등 다른 임무도 재판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었다.
 
민장은 대개 제출자가 직접 관정에 가지고 와서 제출하였다. 수령의 집무 지침서에는 민장은 반드시 해당자가 직접 와서 바치도록 하고, 이를 문지기나 관속들이 밖에서 가로막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대면하여 호소하는 백성이 있으면 다른 일을 멈추고 전념하여 자세히 듣도록 권하기도 하였다.
 
[함께 보기 : 민장(民狀)이란?]
 
민장이 들어오면 수령이 곧바로 처리해야 한다. 수령은 민장을 물리치기도 한다. 이를테면 흔하고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고 판단될 때는 올리지 말도록 제사를 썼다. 당사자를 대질시켜야 할 경우에는 피고를 대동하고 오라는 명령을 내리고, 이에 따라 원고가 피고(피고는 '척隻'이라고 불렀는데, '척지지 말라'는 말은 여기서 나왔다)를 대동하여 재판정에 출두하면 심리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원고와 피고가 서로 화해하여 관에 나오지 않기도 하고, 피고가 수령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다. 피고가 응하지 않을 경우에 원고는 "피고가 관의 명령을 따르지 않으니 관에서 사람을 내어 붙잡아 와 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그러면 수령이 이를 받아들여 면주인이나 형리를 시켜 피고를 붙잡아 오게 되고, 피고는 관령 거역죄로 치죄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지만 소소한 다툼에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고 하여 원고가 피고를 고발하기가 어려웠고, 고발하였다고 하더라도 수령은 이졸이 촌리에 나가면 폐단이 생기므로 보내지 않고 원고로 하여금 붙잡아 오게 하였다. 때로는 피고를 데려오지 못해 송사가 성립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물론 피고가 관정에 나오지 않더라도 판결은 가능했지만, 수령의 집무 지침서들은 되도록 공정한 편결을 위해 그렇게 하지 말도록 하였다.

소장(訴狀)/ⓒ국립중앙박물관

이렇게 하여 대부분의 송사는 간단한 대질심문만으로 처리되었다. 그러나 큰 송사의 경우 더 복잡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처리의 내용은 민장 말미에 제사를 써서 당사자에게 내주었다. 관은 이러한 사건 처리문서를 보관하지 않고, 다만 그 내용을 최소한 보존할 목적으로 <민장치부책>을 작성하였다. 다라서 민장을 낸 사람이 이를 보관하며 필요할 때는 연결하여 민장을 내어서 심리의 시속성과 판경의 일관성을 유지하였다.
 
민장이 제기되었을 때 심리가 끝나면 판결을 내리는데, 이를 '제사(題辭)'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건의 확정 판결일 수도 있고 심리를 진행해 가는 과정의 명령이기도 하였다. 제사는 민장의 말미에 적어서 민장 제출자에게 돌려주었다. 때로는 문서를 따로 만들어 줄 것을 요구하면 대가를 받고 사건의 전말과 판결내용을 자세히 적은 판결문을 작성해 주었다. 민장 제출자는 제사가 적힌 민장을 증거문서로 삼거나 제사에 기재된 관령을 수행하도록 지시된 자에게 직접 제시하였다.
 

민장을 내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민장은 일반민이 제출하는 것으로 여겨지는데, 조금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개인이 제출하기도 하고 집단으로 제출하기도 한다.
 
대부분은 개인이 제출하였는데, 개인의 이해관계가 담긴 소소한 사건이 많기 때문이며, 사회적 신분에 따라 그 내용은 다양하였을 것으로 보이지만 대개의 경우 억울함을 해결할 방안이 없어 민장을 쓰기도 하고, 우월한 처지에서 관의 힘을 보태어 밀어붙이는 경우도 있었을 것으로 추측해볼 수 있다.

서병훈 채권추심 소장(徐秉勳債權推尋訴狀)/ⓒ국립중앙박물관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적인 제출도 적지 않았으며, 여기에는 촌을 단위로 하는 촌리민이 가장 보편적이다. 드물지만 문중이 주체가 되기도 하고, 지주들이 소작인과의 갈등 때문에 등장을 제출하는 사례도 있다. 그런데 양자는 같은 집단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같은 문중에 속하는 지주들이 도조 추급을 위해 함께 등장을 내기도 하였다. 다만 문중의 역할은 줄어드는 추세로 보인다. 반면에 같은 지주의 토지를 소작하고 있는 소작인들이 나서기도 한다. 때로는 면리의 보편적인 문제를 가지고 촌리민이 힘을 모아 등장을 제출하기도 한다. 정약용 같은 경우 , 등소에 앞장선 이들을 상당히 호의적으로 보았는데, 이들이 당시 면리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잘 알고 나섰을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면세청원소장(訴狀) 초고/ⓒ국립중앙박물관

또 하나 면·이임과 같은 말단 행정 담당자들이 민장을 내기도 한다. 이를 일반민의 경우처럼 민장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가 있을 수 있지만, 이들이 자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면리 전체의 문제를 대변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각종 부가세나 잡세, 군역의 이정, 감면을 요구하고, 때로는 공동부역이나 기강, 산송의 문제에 대해서도 소장을 제출하고 있다. 더구나 이들이 부세의 부과와 징수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그에 따르는 어려움과 부세 거납자들에 대한 처리를 하소연하기도 한다. 스스로 직임을 그만두게 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도 많았다. 이들이 올린 것은 민장이라기보다 행정적 보고의 형태를 띠고 있어서 외형적으로는 관에 대한 문제 제기나 저항적 성격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내용으로는 부세제도의 불합리성과 탐학성에 저항하는 일반민인들의 모습을 은근히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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