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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당은 조선시대에 성행한 초급 교육기관 중의 하나였다. 서당의 기원을 무엇으로 보아야 할 것인지는 학자들 사이에 견해가 일치하지 않지만, 고구려시대의 경당(扃堂)으로까지 소급하는 학설도 있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에 "고구려인들은 책을 좋아하여 -중략- 저잣거리에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혼인하기 전의 자제들이 여기에서 밤낮으로 책을 읽고 활쏘기를 익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경당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문무교육을 겸비한 사설 교육기관이기에 이를 서당의 기원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서긍(徐兢, 1123년(인종 1) 고려 중기 송나라에서 고려로 파견돼 왔던 사절의 한 사람)이 지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여염집들이 있는 거리에 경관(經館)과 서사(書社) 두서너 채가 마주 보고 있는데, 백성의 자제들이 이곳에 모여 스승에게서 경서를 배운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고려시대에는 경관과 서사가 서당의 역할을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고구려의 경당과 고려의 경관과 서사가 서당의 모태였을 가능성이 크다.


김홍도 <단원 풍속도첩> 서당/ⓒ국립중앙박물관


조선시대에 서당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게 된 것은 16세기로, 사림파가 정계에 등장하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안동에 거주하던 김진(金璡, 1510~1560)은 1525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성균관에서 김인후(金麟厚, 1510~1560) 등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공부를 단념하고 임하현(臨河縣)으로 이거한 후 부암(傅巖) 근처에 서당을 설립하였다. 당시의 상황을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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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암의 곁에 서당 한 채를 짓고 자제와 고을의 어린이를 불러 모아 학령(學令, 학교에서 학생들의 활동과 수업내용, 처벌 규정을 정한 학칙)을 세우고 수업과정을 엄히 하였다. 가르치는 데 열성적일 뿐만 아니라 가르치는 일을 싫어하지 않았다. 이와 같이 하기를 그치지 않고 수십 년 하였더니 학도(學徒)의 기상이 크게 일어났고 경전을 외우는 소리가 온 마을에 가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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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짧은 기록이지만 초기의 서당에 관한 매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김진은 먼저 집 근처에 서당을 세우고 자기 가=문의 자제와 마을의 어린이들을 가르쳤다. 그가 과거 응시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 가문의 자제들을 교육한 것은 유학의 가르침, 즉 '수신제가 (修身齊家)'를 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가르치는 일에 더욱 열성적이었고 교육하는 일에 싫증을 느끼지 않았다. 그렇게 하기를 수십 년 동안 했더니 마침내 학도의 기상이 크게 진작되고 마을에 경전 읽는 소리가 가득했다는 것이다. 이것이 16세기 서당의 모습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은 조선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양란을 겪고 난 후 정부는 재정적인 이유를 들어 관학(官學)인 향교에 교관(敎官)을 파견하지 않았다. 전쟁으로 인한 피해 때문에 서원의 활동도 여의치 않았다. 그렇다 보니 자연히 서당에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이러한 사정은 다음 글에 잘 나타나 있다.


고을에는 비록 향교와 서원이 있지만 한갓 문구(文具)로만 설립되어 있을 뿐 교육방도가 크게 무너지고 시설은 형편없이 낡아 유학할 수 없었다. 따라서 공부하고자 하는 선비들은 서당이 아니면 갈 곳이 없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향촌의 사족들은 서당 설립에 열성적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도 양란 이후 무너진 향촌질서를 빨리 회복시키기 위해 사족들의 활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향촌사족들의 활동이 활발하지 않은 곳에서는 수령이 직접 주도하여 서당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17세기에는 향촌 사족과 수령이 적극적으로 도와 서당을 설립하고 이를 통해 양란 이후 무너진 향촌질서를 조속한 시일 내에 회복하려 하였다.


18세기가 되면 서당은 또 한 차례 변모한다.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18세기에 들어와 향촌 곳곳에 동성(同姓)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한 성씨가 특정한 마을에 터를 잡아 대대로 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그 이후에는 서당의 설립도 자연히 문중(門中) 또는 마을 중심으로 변화하였다. 문중과 마을의 자제를 교육시키기 위해 서당계(書堂契)나 학계(學契)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계(契)를 통해 기금을 조성하고, 이를 고리대로 놓아 이자를 불리든지 혹은 학전(學田)을 구입하여 거기에서 얻어지는 소출로 서당의 학채와 운영비를 조달했다. 이와 같이 18세기에는 문중 또는 마을 중심의 서당이 크게 성행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부터는 서당을 통한 교육의 수요가 양반은 말할 것도 없고 중인과 평민, 천민층에까지 확대되었다. 평민과 천민들까지도 문자를 터득하여 자신의 의사와 소망을 글로 표현하려는 강렬한 의지를 가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수요에 발맞추어 등장한 것이 '지식을 팔아 먹고사는' 새로운 계층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몰락한 양반이거나 신흥지식층이라고 할 수 있는 평민 또는 천민 출신의 유랑지식인이었는데, 이들이 설립한 서당이 바로 '훈장 자영 서당'이었다. 훈장의 지적 수준이나 성향이 다양했기 때문에 이들이 설립한 서당의 교육수준도 각기 달랐다. 그러나 이러한 서당이 번성하여 한 마을에만 서너 개나 되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학동들은 자신의 능력에 따라 서당을 선택할 수 있었다. 아무튼 19세기에는 서당이 크게 성행하였으며, '훈장 자영 서당'이 새롭게 등장하여 중인이나 평민, 천민까지도 교육받을 수 있는 기회가 크게 확대되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함께보기: 조선 말기(후기) 서당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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