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x90
반응형


[사진 이황의 성학십도/태극도 1568(선조 1)년 12월 왕에게 올린 상소문/출처:네이버/한국한중앙연구원)


 진차(進箚)

 성학(聖學)에는 큰 실마리가 있고 심법(心法)에는 지극한 요령이 있습니다. 이를 드러내어 그림을 만들고 이를 지적하여 해설을 만들어, 사람들에게 '도에 들어가는 문(入道之門)'과 '덕을 싸흔 기초(積德之其)'를 보여 주려 하는데, 이는 제가 부득이하여 만들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임금의 마음은 온갖 정무가 나오고 온갖 책임이 모이는 곳이며, 많은 욕심이 서로 공격하고 많은 사악함이 번갈아 침범하는 곳입니다. 그 마음이 조금이라도 태만해지고 방종함이 계속된다면 마치 산이 무너지고 바다가 들끓는 것 같아서 누가 이를 막아낼 수 있겠습니까? (중략) 이 도를 만들고 이 설을 지은 것이 겨우 열 폭의 종이에 늘어놓은 것에 불과하며, 이를 생각하고 익히는 것이 단지 평소 한가한 틈을 타서 하는 공부에 불과하지만, 도를 깨달아 성인이 되는 요체와 근본을 바로잡아 정치를 베푸는 근원이 모두 여기에 갖추어져 있습니다.


 대학도(大學圖)

 경(敬)이란 마음을 주재하는 것이며 만사의 근본이다. 그 힘쓰는 방법을 알면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시작될 수 없음을 알게 되고, '소학'이 이것에 의지하고서야 시작될 수 있음을 알게 되면, '대학'도 이것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끝을 맺을 수 없게 됨을 일관하여 의심치 않게 된다. 마음을 일단 세운 뒤 이 경에 의해 사물을 밝히고(格物), 앎을 투철히 하여(致知), 사물의 이치를 모두 궁리하게 되면 이른바 "덕성을 높이고 학문을 하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尊德性而道問學). 이 경으로써 뜻을 성실히 하고(誠意), 마음을 바르게 하여(正心), 자신의 몸을 수양하면 이른바 "먼저 그 큰 것을 세우면 작은 것도 빼앗기지 않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 경으로써 집안을 바로잡고 나라를 다스려서 천하에까지 미치면 이른바 "자기 자신을 수양해서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공손한 태도를 독실히 하여 천하가 태평해지는 경지"에 이를 수 있다. 이상의 모든 것이 하루라도 경을 떠나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 경이라는 한 글자가 성학의 시작과 끝을 관통하는 요체가 아니겠는가? (이상은 '대학혹문'에 나오는 주자의 말)

 경이라는 것은 위로나 아래로나 모두 통하고 공부를 착수하는 데 있어서나 그 효과를 거두는 데 있어서나 항상 힘써서 잃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자(朱子)의 말이 위와 같았으니, 이제 이 열 개의 그림도 모두 경을 위주로 하였습니다.


 심통성정도(心統性情圖)

 요컨데 이(理)와 기(氣)를 겸하고 성(性)과 정(情)을 포함한 것이 마음입니다. 그리고 성이 발현해서  정이 될 때가 곧 마음의 기미(幾微)인데, 이는 온갖 변화의 중심이며 선악의 분기점이 되는 때입니다. 공부하는 사람들은 진실로 경의 태도를 유지하는 데 전념하여 천리(天理)와 인욕(人欲)의 구분을 분명히 하고 더욱 이것들을 몸소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마음이 발동하지 않았을 때에는 잘 보존하는 존양(存養)의 공부를 깊이 하고, 마음이 발동한 뒤에는 잘 살피는 성찰(省察)의 습관이 익숙해져서, 진실됨을 축적하고 오래 힘써서 중간에 그만두지 않는다면, 이른바 정일(精一)의 방법으로 중(中)을 포착한다는 성학(精一執中之聖學)과 본체를 온전히 보존함으로써 모든 일에 올바로 대처한다는 심법(存體應用之心學)이 다른 곳에서 구하기 전에 여기에서 얻어질 것입니다.

[이황 '성학십도'/원본 '퇴계집' 권7/'한국문집총간' 29 (민족문화추진회, 1989)/동서양 고전]

728x90
반응형
728x90
반응형

 어떤 사람들은 철학 사상을 이해할 때 그 사상가의 마음속으로 들어가 그의 입장과 일치될수록 깊이 잇는 이해가 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그 이론의 논리적 구조를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배해 다른 사람들은 그 사상을 배태한 지리적,역사적 배경을 객관적으로 먼저 파악해야 그 사상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환경이나 현실과 독립되어 성립하는 사상은 없다는 것이다. 앞의 경우가 '안으로 부터의 접근'이라면 뒤의 경우는 '밖으로 부터의 접근'이라고 할 수 있겠다. 사실 우리는 이 두가지의 어느 측면도 무시해서는 안될 것이다.

 

[사진 공자/네이버 지식백과]

 

 예를 들면, 우리는 불교를 이해할 때 근본불교의 교리로서 사성제나 삼법인 등 석가의 사상을 배우게 된다. 그러나 불교를 낳은 인도의 자연과 사회를 파악하는 것은 불교를 이해하는 데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가령 인도의 무더운 기후는 인도에서 발생한 거의 모든 종교와 철학들이 명상을 중시하는 이유를 이해하게 해 준다. 고대로부터 사제들을 비롯한 지배층은 시원한 나무 그늘이나 석굴 속에서 명상을 하는 것이 생활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또 인도의 카스트 제도를 이해하는 것은 인도에서 발생한 종교와 철학들을 고찰하기 위해서 꼭 필요하다.

 

[사진 석가모니/네이버 지식백과]

 

 따라서 어떤 철학 사상에 접근할 때, "한 발은 안에, 한 발은 밖에 두고 보라"라고 말한다. 만일 우리가 안에서만 본다면 우리는 주관적, 관념적으로 흘러서 그 사상을 객관적으로 파악하지 못할 것이다. 또 만일 두 발을 모두 밖에 두고 본다면 우리는 그 사상의 배경만 이해할 뿐 심오한 내용까지는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김교빈 외 13인, '동양철학은 물질문명의 대안인가', 웅진출판 1998]

728x90
반응형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