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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농촌의 초가지붕은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지붕형태였다. 그리고 산간지방에는 나무를 기왓조각 모양으로 잘라 지붕에 얹은 너와집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럽 산간지방에도 있었고 지붕 위의 너와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돌을 얹어 놓는 방식도 똑같았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학기술과 산업의 성장이 미약했던 전근대사회에서는 집을 짓는 재료를 채취하고 가공하여 운송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으므로 집짓는 재료는 언제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집짓는 주재료가 흙, 나무, 짚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흙은 어느 곳에나 있었고, 산이 많은 지형으로 인해 나무가 풍부했으며, 벼농사를 지어 먹고 살기 때문에 가을걷이 후에 부산물로 나오는 볏짚은 지붕으로 이는 데 쓰였다. 그 밖에 돌, 벽돌이나 기와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돌은 운반과 가공에 상당한 노동력이 들어가고, 벽돌이나 기와는 제조에 여러 공정이 필요한값비싼 건축자재였으므로 제한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초가지붕/경주 양동마을


기와지붕은 장식성이 높고 내구성이 좋아 위엄을 갖출 필요가 있는 관아나 절, 부자들이 집을 화려하게 지을 때 쓰였다. 게다가 기와지붕은 불이 나도 곧바로 큰불로 번지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당시의 기와는 불에 구운 기와도 있었지만 진흙을 기포가 생기지 않게 단단하게 반죽하여 그늘에 말린 것이 많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더라도 기와를 만드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과 노동력이 들었다. 더구나 보온성이 좋지 않고, 여름에 비가 내리면 습기를 머금었다가 해가 비치면 습기를 내뿜어 방 안을 덥게 하므로 온습도 조절 기능은 오히려 초가집보다 떨어졌다.


조선시대 집의 지붕은 도시에서도 초가지붕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볏짚은 벼농사를 짓고 나면 손쉽게 얻을 수 있어 가장 값싼 재료였기 때문이다. 고려 때의 개경은 물론이고, 조선 전기의 한양에도 기와집보다 초가집이 훨씬 많았다. 세종 때 도성 안 가호의 1/6에 해당하는 2,400호가 불타 버린 대화재가 일어나 이를 계기로 지금의 소방서와 같은 금화도감(禁火都監)이 창설되었는데, 이때 화재가 쉽게 번졌던 것도 도성 안에 있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느넫다가 대부분이 짚으로 지붕을 얹었기 때문이다.


초가집은 화재에 약하기는 하짐난 장점이 많았다.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훌륭한 보온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 볏짚은 겉이 왁스 성분의 큐티쿨라(cuticula)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빗물이 떨어져도 미끄러져 흘러내리게 하여 두께 한 자 정도만 덮어도 지붕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짚은 속이 빈 대롱 구조로 되어 있어 뛰어난 보온성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지붕재료였다. 때로는 호박이나 박의 덩굴을 지붕에 올려 재배하기도 하여 마치 텃밭처럼 쓰이기도 하였으며, 두툼하고 둥굴게 덮인 초가지붕은 따스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집의 골격을 이루는 기둥, 창방, 보, 서까래, 도리에는 물론 나무를 썼다. 나무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재료는 소나무였다. 소나무는 대개 일정한 높이까지 곧게 자라고 대패가 잘 먹어 가공이 쉬우므로 최고의 건축재료였다. 그래서 모든 나무를 소나무와 잡목(雜木) 두 가지로 구분하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소나무가 배를 만들고 관청 건물을 짓는 데 요긴하게 쓰였으므로 함부로 베지 못하게 금송(禁松)정책을 펴서 특별히 관리했다. 안면도 등 몇 군데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소나무숲을 특별히 두어 재목을 조달하기도 했다.


초가집/경주 양동마을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나무가 쓰엿다. 벽은 대개 죄우의 기둥과 위아래 인방 사이에 나무막대로 세로로 중깃을 세우고 중깃 사이에 가로로 가시새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중깃과 가시새 사이에는 쪼갠 대나무나 수수깡, 또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가로세로로 얽어 골조를 만들었다. 여기에 륵에 물을 붓고 짚을 썰어 넣어 이긴 진흙반죽을 붙여서 만들었다.

흙벽은 초가지붕처럼 보온성이 좋아 훌륭한 건축재료였다. 그러나 통풍이 중요한 창고 따위의 특별한 시설물에는 흙이 아니라 나무널을 이용하여 벽체를 만들었다.


흙은 이처럼 건물의 벽체를 이루는 중요한 재료였다. 그뿐 아니라 구들 위의 바닥을 바르는 데도 쓰이고, 기와지붕을 일 때에 지붕을 이루는 널과 기와 사이를 메우는 재료로도 썼다.


담장은 싸리, 수수깡, 대 따위를 세운 바자울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추어진 집에서는 담을 쌓는 데 흙을 이용하여 토담을 만들었다. 중요한 건축물이나 부잣집의 경우에는 바닥에 장판을 하고 벽에 벽지를 발랐으나, 서민들의 집은 대개 바닥을 흙바닥 그대로 마감하고 자리를 깔고 살았다. 물론 벽은 벽지를 바르지 않은 흙벽 그대로였다.


집을 짓는 데 특징적인 것은 부재에 인위적인 가공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까래는 물론이고 가둥도 반드시 곧은 것만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기둥을 세우 ㄹ대에도 주춧돌을 매끈하게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그 위에 세울 기둥을 주춧돌의 울룩불룩한 면에 따라 깎아서 세우는 그렝이기법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정원을 꾸미는 데도 인위적인 가공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굳이 있다면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는 정도였다. 담장도 자연경관과 충돌하지 않게 나지막하게 쌓는 것이 원칙이었다. 동양 삼국의 미의식은 각자 개성이 있어서, 중국은 정교하고 화려하며 장대한 것을 즐기고, 일본은 작은 규모로 절제되고 적막한 긴장감의 미학을 즐기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인위적인 것이 지나치게 가미되지 않은 자연스럽고 개방적이며 투박하고 활달한 것을 좋아했다. 그것이 집의 건축양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찹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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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한옥


 전통적으로 집의 크기는 칸(間)을 단위로 재었다. 기록으로만 남겨진 집의 크기가 종종 혼동이 되는 것은, 칸이 때로는 건물이 들어선 땅 전체의 넓이, 즉 대지 규모를 말하는 경우도 있고, 때로는 대지에 들어선 건물의 규모, 즉 건평을 말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이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건평의 규모에 사용되는 칸이란 본래 네 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네모꼴의 공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면적은 일정하지 않았는데, 공간을 이루는 부재의 길이에 따라 길이가 달라서, 한 변의 길이가 작게는 6척부터 크게는 10척까지 들쭉날쭉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한 변의 길이가 7.8척 정도를 이루는 공간을 의미했다. 여기서 쓰는 척은 영조척(營造尺)으로서, 한 자의 길이는 시기에 따라 달랐으나 조선 후기에는 대략 31cm 정도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조선시대 한옥


 신라시대에도 그러했지만 조선시대에도 신분에 다라, 또는 관직의 고하에 따라 정해진 규모 이상의 집을 짓지 못하게 규제했다. 예컨대 세종 때에는 대군은 60칸, 2품 이상은 40칸, 3품 이하는 30칸, 일반서인은 10칸을 넘지 못하게 규제를 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제는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는데, 민간에 또도는 말로는 양반집은 최대 99칸까지 지을 수 있다고 하여 구례 운조류(雲鳥樓)가 99칸 규모였다는 말도 전해진다. 그렇지만 양반가 99칸은 뚜렷한 근거 없이 떠도는 말이었으며, 실제로 100칸이 넘는 집들도 있었다. 연산군 때 성희안의 집이 40칸 규제를 넘었고, 대군, 공주도 60칸을 넘을 수 없었다지만 인조 때 정명공주(貞明公主)의 집이 170칸이었고, 숙종 때 왕자 연령군(延齡君)의 혼례를 앞두고 신혼집을 미리 지어 마련했는데, 집터 2,260칸, 기와집 177칸이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부자양반의 집을 살펴보면, 주인남자가 기거하는 사랑채와 주인여자가 기거하는 안채가 따로 있고, 종과 하인이 사는 행랑채가 따로 있었다. 여기에 곡식을 보관해 두는 곳간, 농기구나 허드레 살림살이를 보관해 두는 헛간, 마소를 키우는 마구간, 외양간 등이 덧붙여졌다.


조선시대 초가집


 하지만 일반백성들의 집은 그다지 크지 않았는데, 흔히 아주 소박한 집을 '초가삼간'이라고 하는데, 초가삼간이란 두 칸짜리 방 하나에 부엌이 딸린 구조이거나, 한 칸짜리 방 둘에 부엌 하나가 딸리 구조를 말한다. 때로는 여기에 마루 한 칸이 덧붙여지기도 했다. 그것이 대개 일반평민들의 살림집이었다.

 조건이 아주 나쁜 집으로는 토막집, 움집이라 부르는 집이 있었다. 최근의 발굴결과를 보면, 신석기시대에 만들어져 청동기시대를 거치면서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되는 움집이 조선시대에도 전국적으로 상당히 많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런 집들은 땅을 약간 파고 바닥을 다진 뒤, 그 위에 거적자리 같은 것을 깔아 냉기가 올라오는 것을 간신히 막고 나무, 솔가지, 집 따위로 지붕을 엮어 만든 집이다. 최소한의 살림도구로 살아가는 극빈층은 조선시대 말기까지도 이런 집에서 살고 있었으며, 이런 움막집은 일제 강점기의 사진에도 보인다. 18세기에 정조가 수원에 갔을 때 그곳 집들을 묘사하면서 달팽이 껍데기 같기도 하고 게딱지 같기도 하다고 하였는데, 그런 집들이 바로 이러한 움집이었을 것이다.

움집 형태/출처: (주)천재교육


 그런데 집의 전체적인 규모는 클 수도 있고 작을 수도 있지만, 어떤 경우라도 방 하나하나의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대개 방은 한 칸 또는 두 칸 규모였다. 한 칸짜리 방은 대략 사방 2미터 남짓의 방이므로 사람이 누우면 누운 방향으로는 남는 공간이 별로 없었다. 물론 높은 지위와 경제력을 갖춘 계층의 집은 일반서민의 집 방보다는 방 한 칸의 넓이가 더 넓었다. 그러나 두 칸짜리 방이라 해도 현대식 주거와 비교하면 방의 넓이는 그다지 넓지 않았다. 중세 서양의 가옥은 서민가옥도 이렇게 작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의 방은 대개 거주공간이 방 하나로 이루어져 모든 가족이 하나의 방 안에 살았고, 그 공간이 개방된 상태로 부엌, 거실, 침실의 구분 없이 쓰였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가옥은 서민가옥도 부엌과 방이 벽체로 나뉘어 별도의 공간을 구성했으며, 때로는 침실이 아닌 거실로 마루가 별도로 설비되어 있어서 한 채의 집은 여러 공간으로 구획되어 방 하나하나의 규모가 작았던 것이다. 방의 규모가 이렇게 작았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난방 때문이었다. 서양에서는 화로, 벽난로를 두어 방 안에서 불을 때어 복사열이나 공기의 대류에 의해 방안을 따뜻하게 했다. 일본의 경우에도 거실 한가운데를 부분적으로 파서 그곳에 화로 역할을 하는 이로리를 두어 난방을 하고 물을 끓이기도 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방 밖의 부엌에서 불을 때어 방의 구들을 뜨겁게 해 간접적으로 방 안을 따뜻하게 했다.


 온돌은 방바닥을 따뜻하게 하고 적은 연료로 오랫동안 방을 따뜻하게 하는 데는 세계 어떤 문명권과 비교하더라도 손색이 없는 효과적인 낭방법이었다. 예컨대 일본의 다다미방과 비교하더라도 한옥의 온돌은 월등히 우수한 난방방법이었다. 그러나 온돌에도 약점은 있었는데, 따뜻한 방바닥에는 벼록과 같은 벌레가 살기 좋은 환경이 조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방바닥이 아닌 실내 전체를 따뜻하게 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웃풍이란 온돌방식의 난방이 안고 있는 약점이었다. 한옥에서 창문은 아예 없거나 있어도 아주 작고, 방문도 허리를 구부리고 드나들 정도로 작았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리고 방바닥만이 아니라 방 안 전체를 따뜻하게 하려면 방의 면적을 작게 하고 지붕의 높이도 낮추어야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집의 방 크기가 작게 된 원인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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