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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의 주요내용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으로 인해 약화된 한국불교의 부흥을 위해 한국불교 개혁과 민중불교를 주창한 한용운의 저서, 1913년 백담사에서 집필, 발행


[사진 만해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한국민족문화 대백과/한국학중앙연구원]


1) 교육을 통한 유신 주체의 확립:

만해는 승가 개혁을 통하여 앞으로 불교의 유신을 이끌어 나아갈 주체상을 확립한다. 만해는 주로 교과 과정에 대한 개혁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당시의 승가 교육에 일반 상식적 지식이 전무함으로 해서 승려들이 지나치게 무지하다고 본다. 만해가 주장하는 교육 개혁은 사회로부터 소외되고 격리된 승가에게 사회성을 부여하는 데 있었다. 그래서 우선 승려들이 역사적 상황에 적극 대처할 능력을 갖추게 하기 위해서 일반상식적 학문인 보통학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한다.


2) 생산을 통한 승려의 인권 회복:

만해는 한말 승려가 성직자로서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천시받는 것은 승려가 생산을 하지 않고 무위도식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적극적으로 경제 활동을 하고 보살행도보다 적극적인 방면으로 실천할 것을 주장한다. 가만히 앉아서 얻어먹을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생산 활동을 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하여 복지 사업과 같은 행동을 통해 회향할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3) 승려의 결혼:

만해는 승려의 결혼 문제도 언급하였다. 당시 승려들은 계율을 엄격히 지키지도 않으며 또 주지를 비롯한 부유한 승려들을 중심으로 축첩이 알게 모르게 횡행하고 있었다. 만해의 의도는 이것을 비공식적으로 숨어서 할 것이 아니라 공식적으로 합법화하여 떳떳하게 행동한다면 오히려 포교에도 좋고, 독신이 싫어서 절을 떠나는 승려들의 환속 현상도 막을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 또한 인구 부족 문제를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4) 사원행정의 개혁과 교단의 조직화:

만해에게 있어 불교의 궁극적 목표점은 민중 불교이다. 그러기 위해서 억불 시대에 산으로 쫓겨갔던 사찰을 다시 도심으로 환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찰이 도심으로 내려와야 하는 이유가 민중과 함께 호흡하기 위해서이지만 산이라는 곳이 지정학적으로 불리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즉 진보의 사상이 없어지는 것, 모험적인 사상이 없는 것, 구세의 사상이 없는 것, 경쟁하는 사상이 없는 것이다.


5) 선거를 통한 주지의 선출과 경쟁적 동기 부여:

만해는 사찰 행정의 총수인 주지에 큰 책임과 임무를 부여하고 있다. 한 사찰의 운명이 주지의 손에 달렸으므로 대중적 풍모와 지도력을 갖춘 스님을 주지로 선출하기 위해서는 그 결정권을 대중에게 부여하여 대중의 선택에 맡기고자 하는 것이 만해의 주장이다. 그래서 한 사찰의 성쇠를 좌우하는 주지 선출을 대중의 손에 의해 뽑는 선거 제도를 도입할 것을 주장한다.


6) 신앙의 통일과 미신의 배격:

만해는 절에서 신봉하는 각종 소회의 철폐를 주장했다. 불교 신앙에 있어서 미신적 요소와 신앙에 혼선을 초래하는 상황을 일소하고 불교를 보다 부처님의 근본적 가르침으로 돌아가게 하기 위해서 각종 미신적 소회를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7) 염불당의 폐지와 참 염불의 실천:

만해는 입으로 하는 염불로 극락에 왕생한다는 것은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염불당(念佛堂)의 폐지에 대한 이론적 근거의 마련을 위해 두 가지 측면에서 정토론(淨土論)을 반박한다. 즉, 하나는 화엄사상에 의한 교리적 비판이고, 둘째는 부처님의 가르침인 연기법(緣起法)에 의한 비판이 그것이다.


8) 불교 의식의 통일과 간소화:

만해는 복잡한 의식을 통폐합하여 간소화함으로써 불교를 제사주의적 관행(祭祀主義的 慣行)으로 부터 구하려고 했다. 신앙적 측면에서 본다면 소회의 폐지와 염불당의 폐지, 그리고 의식의 통폐합은 결국 불교의 이지성을 회복하자고 하는 것과 같은 맥락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만해는 부처를 재공양의 대상으로 모시는 것을 반대한다. 만해는 불교를 제사주의적 관행으로부터 해방시키고 근본적 교리에 입각한 이성적 불교로 환원하고자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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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보조국사 지눌/한국민족문화대백과]

 

 지눌의 진심(眞心) 사상 '보저전서(普照全書)

 

 번뇌와 깨달음의 동일한 근본

 지금 말하는 바는 오로지 드러난 형상(相)은 이에 매여있는 일심의 망념(妄念)이 지어낸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것이 곧 삼계(三界)와 생사라는 병의 근본이다. 만약 우리가 무명(無明)은 생겨남이 없음을 알아차리고 형상에 집착하지 않으면, 과거의 업(業)은 다 없어지고 새로운 업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이 곧 병을 끊는 근본이다.

 그러므로 한 생각의 마음이 병의 근본이며 또한 동시의 도(道)의 근본임을 알아야 한다. 실제(實)에 집착하면 그르치게 되고, 공(空)임을 깨달으면 잘못이 없게 된다. 따라서 깨달음은 한마음의 한순간에 있으며, 거기에는 앞뒤가 없다. 이러하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깊이 헤아려서 분명하게 결정을 내리면 이치에 도달함이 매우 가깝게 되기 때문에 비록 말세의 중생일지라도 그 마음이 넓고 큰 자는 역시 마음을 비워 스스로 비추어볼 수 있고, 한 생각의 연기가 본래 생겨남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비록 아직 깨달음을 확인할 수는 없을지라도 도에 들어가는 기본이다.(152쪽)

 

 올바른 수행방법

 질문: 중생의 업과(業果)인 종자(種子)와 그 종자의 현행(現行)이 여러 겁 동안 훈습해 온 것이 마치 아교풀이나 옻칠과도 같이 단단히 덮여 있는데, 어떻게 단지 일심을 깨달은 것만으로 금방 그것을 끊어 버리고 부처가 될 수 있겠는가?

 

 대답: 만약 그대가 마음(心)과 대상 존재(境)가 실재한다고 집착하고 주관 존재(人)와 객관 존재(法)가 공(空)하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오랜 겁 동안 수행하더라도 결국 깨달음의 과보(果報)를 성취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그대가 무아(無我)를 금방 이해하고 사물의 무실체성을 깊이 통찰할 수 있다면 주관과 객관이 함께 사라져 버릴 것이니, 확증하지 못할 것이 어디 있겠는가? 센 바람이 날리는 먼지처럼, 급류에 떠내려가는 가벼운 배처럼 쉽게 금방 성취할 수 있다. 내가 염려하는 것은 그대들이 일심을 믿지 않고 스스로 어려움과 장애를 만드는 점이다.

 또 "어째서 번뇌를 끊을 필요가 없는가?"라고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다. 그대가 만약 살생이나 도둑질이나 음행이나 거짓말이 다 일심에 따라 일어나는 것임을 분명하게 알아차리면 처하는 곳마다 문득 고요하게 될 것이니, 다시 끊어야 할 것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일심을 이해하기만 하면 온갖 존재는 저절로 환영처럼 생겨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음이 이미 형태가 없으니, 법이 어찌 형상을 갖겠는가? 종밀의 '법집별행록'에 설명된 단혹(斷惑)의 뜻에 따르면, 본성(性)과 형상(相)이 함께 비추인다. 이것이 '끊음이 없는 끊음'이다. 끊어도 끊음이 없는 것이 진정한 끊음이다.(152~153쪽)

 

 진심(眞心)과 체용의 불이(不二)

 진심(眞心)의 묘한 본체는 본래 움직이지 않고, 편안하고 고요하며, 참되고 일정하다. 이 참된 본체 위에 묘한 작용이 나타나서 흐름을 따라 그 묘함을 얻는 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는다. 그러므로 조사는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말하였다.

 "마음은 온갖 경계를 따라 구르니, 구르는 곳마다 진실로 신비롭다. 흐름을 따르면서 그 본성을 알아차리면, 기쁨도 없고 근심도 없다."

 그러므로 움직이고 걸을 때나, 밥을 먹고 옷을 입을 때나, 숟가락을 들고 젓가락을 놀릴 때나, 왼쪽을 돌아보다가 오른쪽을 엿볼 때나, 그 어느 때나 다 진심의 묘한 작용의 나타남이다. 범부들은 미혹되고 혼동되어서, 옷을 입을 때는 옷을 입는다고 생각만 하고, 밥을 먹을 때는 단지 밥을 먹는다는 생각만 하여, 무슨 일을 할 때나 항상 단지 드라난 모습만을 따라 전전한다. 그러므로 일상적으로 작용하는 속에 있는데도 깨닫지 못하고, 바로 눈앞에 나타나 있어도 알지 못한다. 만약 그 본성을 아는 사람이라면 그 작용하는 중에 있어서 결코 어둡거나 잊어버리지 않는다. [진심직설(眞心直說],52~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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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반가사유상/어린이문화재청 홈페이지]

 

 요즘 한국불교는 고즈넉한 산사에서 수련을 통해 심신을 치유하고 불교식 생활 등을 실제로 체험 할수 있는 이른바 '템플스테이'를 통해 내국인은 물론 외국인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습니다. 한국불교만의 독특한 사상 뿐만 아니라, 음식, 건축양식 등을 생생하게 체험할 수 있고 도시에서 지친 몸과 마음을 치유할 수도 있어 템플스테이를 체험한 사람들의 만족도는 매우 높다고 합니다. 이렇듯 한국불교는 우리나라를 세계에 알릴 수 있는 문화산업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전통문화재, 철학, 사상 등이 잘 전승되어 온 우리의 소중한 전통문화이자 대표적인 종교입니다. 이런 한국불교가 가지는 독특한 성격은 어떤 것이 있는지 한국불교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한국 불교는 불교의 연기관을 받아들인 한국인들이 발전시킨 특유의 성격을 가진 불교이다.

그런데 과연 인도 불교나 중국 불교와 변별되며 한국인의 특성이 그 속에 녹아들어 있는 한국 불교가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근대의 어떤 학자는 "인도와 서역의 불교는 서론적 불교이고, 중국의 불교는 각론적 불교이며, 조선의 불교가 최후의 결론적 불교이다." 라고 하였고, "인도의 원천적 불교, 중국의 분파적 불교에 대하여 한국은 원효, 보조에 의하여 최후의 회통 불교를 실현하였다."고 하는 주장도 있다.

 일반적으로 인도나 중국, 일본과 다른 한국 불교의 특성은 일승(一乘)과 일미(一味)의 인식틀로 전개된다는 점, 즉 독창성과 더불어 종합성을 강조하는 측면에 있다고 본다. 이를 '통불교(通佛敎)'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예컨데 다른 나라 불교인들의 인식틀을 보면 자기 종파의 교설에만 충실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불교 사상가들은 불교를 받아들인 이래 어느 종파와 어느 학파에 얽매이지 않았다. 어느 종파, 어느 학파에 얽매이지 않았던 근거는 이들의 저술 목록에 잘 나타난다. 이들은 유식 불교를 신봉하면서도 천태가나 선가를 겸업했고, 또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이러한 현상은 불설에 입각한 융통성 위에서 자신의 학문적 화두를 밀고 나갔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인도나 중국, 일본 사상가들은 자기 종파의 교설에만 충실하고 있다. 그러한 점은 그들의 교상판석의 틀에서 잘 나타난다. 가장 대표적인 교판으로 알려진 법상종의 3시교판에서는 요의교로서 '해심밀경'을, 천태종의 5시8교에서는 법화 열산시를, 화엄종의 5교 10종판에서는 대승원교로서 법화보다 화엄을 우위에 두고 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들 모두는 '가장 나중에 오는 장작이 제일 위에 오는' 것 처럼 교판을 통해 자기 종파의 우월성을 표현해 내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원효는 중국의 교판가들을 향해 "만일 한쪽에만 한결같이 그렇다고 집착하면 두 설을 다 잃을 것이요, 만일 상대를 인정해 주어 자기 설만 고집하지 않으면 두 설을 다 얻을 것이다."라고 갈파한 뒤, 5시 4종으로 판석하려는 견해를 '대롱으로 하늘을 쳐다보는 격'이라고 비판하고 회통의 자세를 취하였다.

 이에 대해 서양 학자들은 이러한 한국 불교의 특성인 통불교의 '통'이나 회통불교의 '회통'이 "당신들이 즐겨먹는 비빔밥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라고 물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불교의 특징은 다양한 개체들이 물리적으로 결합된 비빔밥이 아니라 화학적으로 삼투된 곰탕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곰탕은 돼지나 소의 뼈와 살과 양념들이 모여서 무수한 시간 동안 끓는 물속에서 화학적 고투를 거쳐 우러나온 것이다. 이러한 일승과 일미의 인식틀 위에서 정립된 종합성과 독창성이 바로 한국 불교의 특징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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