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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퐁논쟁

(Querelle des Bouffons) 1750년대 초 프랑스 파리를 무대로 펼쳐진 음악논쟁.

[부퐁논쟁 이후, 오페라 개혁에 대해 읽기]




 바로크시대 오페라는 자국의 음악양식을 대표하는 민족음악적인 성격을 보였다. 특히 가톨릭 국가인 프랑스는, 교황의 내정간섭을 거부하고 왕을 중심으로 하는 근대국가를 확립하기 위해, 자신들 고유의 오페라 전통과 어법을 만들고자 많은 공을 들였다. 이런 이유로 이탈리라 오페라가 프랑스에 소개된 초기를 제외하고 프랑스에서는 왕실의 비호하에 프랑스식 오페라, 서정적 비극이 유행하였고 이탈리아 오페라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다.

 그러나 1752년 이탈리아 오페라단이 페르골리시의 <마님이 된 하녀>를 공연한 후 이탈리아 오페라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태도가 돌변한다. 백과전서학파로 불리는 계몽주의 철학자들이 이탈리아 부파의 '보편적인' 성격의 인물, 서정적이면서 꾸밈이 없는 아리아, '자연스러운' 억양의 레치타티보를 찬양하면서 오페라를 둘러싼 이탈리아와 프랑스 지지자들 사이에 격한 논쟁이 시작된다. '부퐁논쟁'으로 불리는 오페라 전쟁은 이탈리아 부파를 지지하는 백과전서학파와 륄리가 확립한 서정적 비극, 왕실 오페라의 전통을 지지하는 왕당파로 나뉘어져 이후 20년 동안 4차례의 논쟁으로 이어진다. 다른 말로 '전단' 전쟁이라 불릴 만큼 이탈리아 부파를 지지하는 입장과 프랑스 오페라를 지지하는 두 파는 상대방을 비방하는 문구를 넣은 전단을 뿌려대면서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고자 애를 썼다.

 부퐁논쟁에서 백과전서학파가 프랑스 오페라를 비난한 배경에는 '자연성'을 추구하는 계몽주의 사고가 깔려있다. 운율과 강세가 분명한 이탈리아어는 태생적으로 음악적인 언어지만 프랑스어는 노래 부르기에 적합하지 않으므로, 비록 이탈리아어가 외국어라 뜻을 알아들을 수 없지만 오페라는 무조건 이탈리아어로 불러야 한다는 것이 루소를 비롯한 백과전서학파의 공통된 주장이었다. 이 오페라 전쟁에서는 백과전서학파가 승리를 거두고 프랑스는 한동안 이탈리아 오페라 부파에 푹 빠진다.

[음악의 이해와 감상/김종수 권도희 김성혜 이지선 유영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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