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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K매직 식기세척기/SK매직샵



1. SK매직 렌탈 식기세척기 12인용 빌트인 타입 설치 순서


①분리할 싱크장의 사이즈 확인

가로 600mm 세로 815~825mm


②싱크장 분리 후, 남은 공간 사이즈 확인

제품크기(mm): 가로 598 X 깊이 600 X 높이 815~825

설치공간(mm): 가로 598 X 깊이 600 X 높이 815~825

※상부 판넬(30mm) 분리


③싱크장 공간이 맞을 경우 사용중인 싱크장 분리

(싱크장 하단 걸레받이 일부 절단)

설치 비용 발생할 수 있음(대략 5만원)


④기존 싱크장에 들어가도록 빌트인(매립) 설치


※싱크장 사이즈가 안맞아 리폼 공사가 필요한 경우는

별도 추가 비용 발생

(싱크장에 따라 대략 15~35만원)



SK매직 렌탈 식기세척기 종류

자세히 보기/SK매직샵



2. SK매직 렌탈 식기세척기 프리스탠딩 타입 설치


1. 제품 설치 공간 확인

12인용 설치

제품크기(mm): 가로 598 X 깊이 600 X 높이 815~825


6인용 설치

제품크기(mm): 가로 536 X 깊이 412 X 높이 498

설치공간(mm): 가로 536 X 깊이 595 X 높이 555

(6인용의 경우 문 오픈 기준 깊이 595mm, 높이 555mm)


※ 프리스탠딩 타입 설치시 설치비 전액 면제



3. SK매직 렌탈 식기세척기 빌트인&프리스탠딩 설치비


싱크장 주변

스탠딩 타입 설치

(6인용, 12인용)

단순 설치(급수, 배수호스 연결, 싱크장 타공)

무료

배수호스 연장(기본 2m, 연장 4m)

무료

급수호스 연장(기본 3m, 연장 2m)

무료

싱크장 안 매립

빌트인 타입 설치

(싱크장 가로 60cm)

단순 설치(급수, 배수호스 연결, 싱크장 타공)

무료

걸레받이만 절단할 때

무료

싱크장 분리(상단바 절단, 싱크장 도어 분리/결합 포함)

5만원

배수호스 연장

무료

급수호스 연장

무료



SK매직 렌탈 식기세척기 종류

자세히 보기/SK매직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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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말에 주자학이 도입되고 16세기에 주자학이 조선사회에 정착되면서 그 영향력은 가옥구조에도 미쳤다. 16세기에 접어들어서는 성리학적 질서와 윤리가 더욱 강화되면서 집의 공간 배치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가장 큰 변화로 남녀 사이에 엄격한 내외법이 적용되고, 양반가옥에서는 여성의 유폐(幽閉)가 이루어졌다.


여자는 중문 밖을 나가면 안 된다는 생각이 굳어지면서 규모가 큰 양반집에는 여자들이 사는 안채와 남자들이 사는 사랑채의 분리가 이루어졌다. 안채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살고 사랑채에는 아버지와 혼인한 아들이 살았다. 뒷간도 여성 전용의 안뒷간과 남성 전용의 바깥뒷간을 다로 두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16세기부터 서서히 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


똬리집 평면도/ⓒ네이버


일부지역에서는 양반집의 경우 구조도 폐쇄적으로 바뀌어 'ㅁ'자 집이 늘어났다. 예전부터 서울의 중인, 양반 집에서 'ㅁ'자 집을 지었던 주된 이유는 도성 안에 집 지을 공간이 넉넉지 ㅇ낳아 좁은 공간을 최대한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방으로 확산된 'ㅁ'자 집은 그렇지 않았다. 지방의 집들은 대개 한일자 모양이나 'ㄱ'자 모양의 고패집이 일반적이었는데, 'ㄷ'자 모양으로 바뀌거나 고패집이 'ㄱ'자와 'ㄴ'자 형태로 결합된 맞고패집으로 바뀌었고, 나중에는 공중에서 지붕을 보면 완전히 폐쇄된 'ㅁ'자 형태의 집으로 바뀌었다. 이런 집을 경기도에서는 똬리집,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에서는 뙤새집, 경상북도에서는 뜰집이라고 불렀다. 그런 집들은 중문 안쪽의 안채공간을 폐쇄적인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사랑방은 주인남자의 기거공간이면서 한편으로는 손님을 맞이하는 공간이었다. 대문을 들어선 외부손님이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다시 중문을 들어가야 했다. 안채를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중문을 열어도 바로 안채쪽이 보이지 않게 통로를 일부러 꺾어놓는다든지, 중문을 들어서자마자 바로 내외벽을 두어 안채를 가리기도 했다. 또 안채 뜰 한가운데는 사철 푸른 상록수를 심어 안채 쪽이 들여다보이지 않도록 하기도 했다. 이렇게 안채를 가리는 풍속은 꽤나 철저해서 19세기 말에 조선을 방문한 영국의 여류 지리학자 비숍(I.B Bishop)은 마을에서 어떤 집이 지붕을 고칠 경우에는 온 동네에 지붕을 고친다고 미리 알려야 했다고 전한다.


추사고택 평면도/ⓒ네이버


주인부부의 공간이 분리되면서 아들딸의 공간도 분리되었다. "남녀가 일곱살이 되면 자리를 같이하지 않고 밥을 같이 먹지 않는다"는 '예기(禮記)'의 가르침에 따라아이들도 딸은 안채에서 키우고 아들은 사랑채에서 키웠다.

 

엄밀한 내외법과 여성의 유폐는 부부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양반집에는 부부가 기거하는 방이 안채, 사랑채로 분리되었다. 이러한 경향은 이미 조선 초기부터 있어서 태종 때 한성부(漢城府, 조선왕조 수도(首都)의 행정구역 또는 조선왕조 수도를 관할하는 관청의 명칭)에서는 부부가 같은 방에서 자지 말고 각각 다른 방에서 자도록 나라에서 강제해야 한다는 말이 나왔을 정도였다. 그러나 17세기까지만 해도 실제 부부는 같은 방에서 생활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다가 18세기부터는 규모가 큰 양반집에서는 부부가 각각 다른 방에서 자는 것이 일반화되었다. 이 때문에 며느리가 기거하는 건넌방과 젊은 아들이 기거하는 작은사랑방을 연결하는 통로를 눈에 잘 뜨이지 않는 곳에 두어 몰래 성생활을 하게 되면서도 잠은 따로 자게 하는 특이한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유별난 내외법은 차츰 일반백성들에게도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세 칸짜리 집에서도 부엌에 달린 방은 여성의 기거공간이 되고, 또 하나의 방은 남성의 작업공간이 되었다. 때로는 툇마루로 이어진 두 방 사이에 벽을 쳐서 부부의 방을 상징적으로 분리시키기도 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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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농촌의 초가지붕은 중국, 일본은 물론이고 유럽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지붕형태였다. 그리고 산간지방에는 나무를 기왓조각 모양으로 잘라 지붕에 얹은 너와집이 있었는데, 그것은 유럽 산간지방에도 있었고 지붕 위의 너와가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돌을 얹어 놓는 방식도 똑같았다. 그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학기술과 산업의 성장이 미약했던 전근대사회에서는 집을 짓는 재료를 채취하고 가공하여 운송하는 데 여러 가지 제약이 있었으므로 집짓는 재료는 언제나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어야 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집짓는 주재료가 흙, 나무, 짚이었던 것은 그 때문이다. 흙은 어느 곳에나 있었고, 산이 많은 지형으로 인해 나무가 풍부했으며, 벼농사를 지어 먹고 살기 때문에 가을걷이 후에 부산물로 나오는 볏짚은 지붕으로 이는 데 쓰였다. 그 밖에 돌, 벽돌이나 기와가 쓰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돌은 운반과 가공에 상당한 노동력이 들어가고, 벽돌이나 기와는 제조에 여러 공정이 필요한값비싼 건축자재였으므로 제한적으로 쓰일 수밖에 없었다.


초가지붕/경주 양동마을


기와지붕은 장식성이 높고 내구성이 좋아 위엄을 갖출 필요가 있는 관아나 절, 부자들이 집을 화려하게 지을 때 쓰였다. 게다가 기와지붕은 불이 나도 곧바로 큰불로 번지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당시의 기와는 불에 구운 기와도 있었지만 진흙을 기포가 생기지 않게 단단하게 반죽하여 그늘에 말린 것이 많았다. 그러나 어떻게 하더라도 기와를 만드는 데는 적지 않은 비용과 노동력이 들었다. 더구나 보온성이 좋지 않고, 여름에 비가 내리면 습기를 머금었다가 해가 비치면 습기를 내뿜어 방 안을 덥게 하므로 온습도 조절 기능은 오히려 초가집보다 떨어졌다.


조선시대 집의 지붕은 도시에서도 초가지붕이 거의 대부분이었다. 볏짚은 벼농사를 짓고 나면 손쉽게 얻을 수 있어 가장 값싼 재료였기 때문이다. 고려 때의 개경은 물론이고, 조선 전기의 한양에도 기와집보다 초가집이 훨씬 많았다. 세종 때 도성 안 가호의 1/6에 해당하는 2,400호가 불타 버린 대화재가 일어나 이를 계기로 지금의 소방서와 같은 금화도감(禁火都監)이 창설되었는데, 이때 화재가 쉽게 번졌던 것도 도성 안에 있는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느넫다가 대부분이 짚으로 지붕을 얹었기 때문이다.


초가집은 화재에 약하기는 하짐난 장점이 많았다.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훌륭한 보온성을 가지고 있었다. 또 볏짚은 겉이 왁스 성분의 큐티쿨라(cuticula) 층으로 이루어져 있어 빗물이 떨어져도 미끄러져 흘러내리게 하여 두께 한 자 정도만 덮어도 지붕 안으로 빗물이 스며들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짚은 속이 빈 대롱 구조로 되어 있어 뛰어난 보온성을 가지고 있는 훌륭한 지붕재료였다. 때로는 호박이나 박의 덩굴을 지붕에 올려 재배하기도 하여 마치 텃밭처럼 쓰이기도 하였으며, 두툼하고 둥굴게 덮인 초가지붕은 따스하고 푸근한 느낌을 주었다.


집의 골격을 이루는 기둥, 창방, 보, 서까래, 도리에는 물론 나무를 썼다. 나무 가운데서도 가장 좋은 재료는 소나무였다. 소나무는 대개 일정한 높이까지 곧게 자라고 대패가 잘 먹어 가공이 쉬우므로 최고의 건축재료였다. 그래서 모든 나무를 소나무와 잡목(雜木) 두 가지로 구분하기도 했다. 나라에서는 소나무가 배를 만들고 관청 건물을 짓는 데 요긴하게 쓰였으므로 함부로 베지 못하게 금송(禁松)정책을 펴서 특별히 관리했다. 안면도 등 몇 군데에는 나라에서 관리하는 소나무숲을 특별히 두어 재목을 조달하기도 했다.


초가집/경주 양동마을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나무가 쓰엿다. 벽은 대개 죄우의 기둥과 위아래 인방 사이에 나무막대로 세로로 중깃을 세우고 중깃 사이에 가로로 가시새를 가로질렀다. 그리고 중깃과 가시새 사이에는 쪼갠 대나무나 수수깡, 또는 가느다란 나뭇가지를 가로세로로 얽어 골조를 만들었다. 여기에 륵에 물을 붓고 짚을 썰어 넣어 이긴 진흙반죽을 붙여서 만들었다.

흙벽은 초가지붕처럼 보온성이 좋아 훌륭한 건축재료였다. 그러나 통풍이 중요한 창고 따위의 특별한 시설물에는 흙이 아니라 나무널을 이용하여 벽체를 만들었다.


흙은 이처럼 건물의 벽체를 이루는 중요한 재료였다. 그뿐 아니라 구들 위의 바닥을 바르는 데도 쓰이고, 기와지붕을 일 때에 지붕을 이루는 널과 기와 사이를 메우는 재료로도 썼다.


담장은 싸리, 수수깡, 대 따위를 세운 바자울이 대부분이었는데, 어느 정도 규모가 갖추어진 집에서는 담을 쌓는 데 흙을 이용하여 토담을 만들었다. 중요한 건축물이나 부잣집의 경우에는 바닥에 장판을 하고 벽에 벽지를 발랐으나, 서민들의 집은 대개 바닥을 흙바닥 그대로 마감하고 자리를 깔고 살았다. 물론 벽은 벽지를 바르지 않은 흙벽 그대로였다.


집을 짓는 데 특징적인 것은 부재에 인위적인 가공을 많이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까래는 물론이고 가둥도 반드시 곧은 것만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기둥을 세우 ㄹ대에도 주춧돌을 매끈하게 다듬지 않고 그대로 사용하여 그 위에 세울 기둥을 주춧돌의 울룩불룩한 면에 따라 깎아서 세우는 그렝이기법이라는 독특한 방법을 사용했다.


정원을 꾸미는 데도 인위적인 가공을 거의 하지 않았으며, 굳이 있다면 연못을 파고 나무를 심는 정도였다. 담장도 자연경관과 충돌하지 않게 나지막하게 쌓는 것이 원칙이었다. 동양 삼국의 미의식은 각자 개성이 있어서, 중국은 정교하고 화려하며 장대한 것을 즐기고, 일본은 작은 규모로 절제되고 적막한 긴장감의 미학을 즐기는 데 비해, 우리나라는 인위적인 것이 지나치게 가미되지 않은 자연스럽고 개방적이며 투박하고 활달한 것을 좋아했다. 그것이 집의 건축양식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찹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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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한편으로는 자연환경과 어울리게 지어야 하고, 좋은 자연환경을 찾아 지어야 하며, 또 한편으로는 자연환경의 악조건을 이겨 낼 수 있게 지어야 했다.


좋은 자연환경을 얻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집터를 찾아야 했다. 그때 활용된 것이 풍수지리였다. 정약용(丁若鏞)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비판했듯이 풍수지리에 비합리적인 면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좋은 자연환경을 찾기 위한 것이었다. 풍수에 좋은 자리가 되기 위해서는 집 주변 산세의 모양을 가리키는 형국(形局), 집의 방향을 가리키는 좌향(坐向), 집 자리를 가리키는 혈(穴) 등 꽤 복잡한 조건이 갖추어져야 했다. 그런데 풍수(風水)라는 것은 본래 '장풍득수(藏風得水)'를 가리키는 것으로, 장풍은 찬바람이 휘몰아치지 않아 추운 겨울을 나기에 족한 조건을 가리키며, 득수는 농사와 일상생활에 필요한 물을 가까운 곳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조건을 가리킨다. 풍수에 맞는 조건이란 결국은 살기 편한 자리였다.



흔히 배산임수(背山臨水)라 하여 뒤쪽에 산이 있고 앞쪽이 낮아 물이 있는, 전망이 좋은 곳을 길지로 여겼다. 이 역시 생활의 편리성과 관계가 깊다. 주변은 거센 바람이 몰아치지 않도록 산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앞은 시원스럽게 탁 트였으며, 볕이 잘 드는 곳이 바로 풍수에 맞는, 살기 좋은 곳이었다. 그리고 배산임수는 생활필수품을 쉽게 조달하기 위한 조건이었다. 식수를 비롯한 생활용수는 매일 길어 와야 했고, 때로는 냇가에 나가 빨래를 해야 했다. 또 아궁이에 불을 때서 밥을 짓고 구들을 데우기 위해서는 나무를 해야 했다. 물과 나무를 가까운 데서 쉽게 구하기 위해서는 배산임수의 조건이 필요했던 것이다.


집은 자연환경을 극복하여 살기 편한 곳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집의 구조는 기후와 매우 깊은 관련이 있다. 강우량, 강설량, 일조량, 바람, 습도, 지형 등 모든 것이 집의 모양과 구조에 영향을 미친다. 눈이 많이 내리는 지역에서는 지붕의 물매가 가파르며, 햇볕이 강한 곳에서는 창살이 촘촘하다. 바람이 강한 곳에서는 지붕을 묶어 놓기도 한다. 심지어는 기왓골의 깊이까지도 비가 많은 곳에서는 깊다. 길게 앞으로 뻗은 처마도 비가 안으로 들이치지 않게 하고 뜨거운 햇볕을 막아 방 안을 서늘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의 가옥구조 중에 기후와 관련하여 특징을 이루고 있는 것은 바로 마루와 온돌이다. 대청, 안청, 마래라고도 부르는 마루는 바닥에서 올라오는 습기와 벌레를 차단하고 통풍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시설이다. 남쪽 지방에서 발달한 마루는 덥고 습한 기후를 이겨 내려는 노력과 지혜의 소산이었다.


그러나 더위와 습기보다는 추위를 막는 것이 더 중요했던 평안도, 함경도 지역의 민가에는 마루를 두지 않았다. 오히려 함경도의 집은 양통집이라 하여 한 용마루 아래에 간격을 두지 않고 앞뒤로 방을 배치했다. 이는 추운 지방에서 겨울을 나기 위해 방 안의 열을 최대한 빼앗기지 않게 하기 위한 것이었다.


고구려 부뚜막/ⓒ국립중앙박물관


한편 우리 주거생활의 특색을 이루는 구들 또는 온돌(溫突)이라는 난방법은 일찍이 고구려의 서민가옥에서 유래되었다. 온돌이 언제부터 일반화되었는지는 아직도 분명치 않지만, 처음에는 서민들의 난방법이었던 온돌이 전국적으로 전 계층에 일반화된 것은 조선 후기로 보인다.

처음 온돌은 방 전체를 데우는 것이 아니라 방바닥 일부를 데우는 '쪽구들' 형태였다. 그러던 것이 조선 후기에는 대개의 경우 부엌의 부뚜막에 불을 때어 밥을 짓고 물을 끌이면서 동시에 온기가 방바닥 밑을 지나게 하여 방 전체를 따뜻하게 하는 방법을 채용했다. 이는 적은 연료로 장시간 실내를 따뜻하게 할 수 있는 매우 효율적인 난방법이었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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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혈연과 혼인관계로 묶인 한 가족이 사는 곳이다.

일반적으로 오해되고 있는 사실 가운데 하나는 예전에는 대가족제도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는데 현대사회에 접어들어 전통사회가 무너져가고 핵가족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예전의 대가족이 지금 핵가족으로 바뀌었다는 관념은 단순한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시대에도 대가족은 매우 희귀했다. 그리고 서구의 핵가족은 부부 중심의 가족을 가리키는데, 지금도 핵가족이라고 해도 부부 중심의 핵가족은 사실상 그다지 흔치 않다.



가족 구성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우선 부부가족(conjugal family)은 부부와 그 자녀로 구성된 가족으로, 자녀는 없을 수도 있다. 원시사회와 현대사회에 많은 이 부부가족은 가장 기본적인 요소만 갖추고 있어 핵가족이라는 이름이 붙기도 했다. 직계가족(stem family)은 결혼한 자녀 가운데 한 사람이 부모와 함께 가족을 꾸려 사는 형태이다. 이 가족에서 가족을 결합시키는 중요한 힘은 부모와 자녀 사이의 유대이다. 그리고 확대가족(extended family)은 결혼한 자녀들이 모두 부모와 함께 가족을 구성하여 사는 형태이다.


그런데 현재 남아 있는 조선시대의 호적을 살펴보면 부부가족이 압도적으로 많고, 직계가족이 소수를 차지하며, 확대가족은 생각보다 아주 드물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현대 서구사회는 그렇지 않다. 직계가족이나 확대 가족이 거의 없고, 부부가족도 우리의 부부가족과는 다르다. 우리는 자녀들이 결혼하기 전까지는 부모와 함께 살지만, 서구에서는 결혼하기 전이라도 성년이 되면 따로 독립해 나간다. 그리고 서구의 부부가족에서 가족의 가장 강력한 유대는 부부 사이의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의 부부가족에서는 직계가족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부모와 자녀의 유대가, 부부가족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는 부부 사이의 유대 못지않게 강하다.


그런 탓에 부부가족은 언제든지 직계가족으로 바뀔 수 있다. 자녀 가운데 하나가 결혼하면 부모를 모시고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나머지 자식들은 독립하여 부부가족을 이룬다. 또 그 직계가족은 부모가 돌아가시면 다시 부부가족으로 돌아온다. 결국 부부가족과 직계가족이 상황의 변화에 따라 서로 넘나드는 형태를 이루고 있다. 널리 알려져 있듯이 우리나라는 17세기까지만 해도 상속형태가 자녀균분상속이었다. 그런 경우에도 집은 맏아들에게 상속되었다. 맏아들이 부모를 모시고 살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족 구성은 가옥형태에도 남아 있다. 예전의 집들은 규모로 보나 공간 구성으로 보나 대개 한 부부가족이 살아가기에 적합한 구조와 규모를 갖추고 있었다. 초가삼간이란 부부가족을 상정한 집이다. 실제로 한 집에 사는 사람의 숫자도 많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호적에 기록되어 있는 1회의 가족 숫자는 호적에 오르지 않은 인구를 감안하더라도 다섯 명을 크게 넘지 않는다. 대가족이라는 개념을 가족 구성적 측면에서 확대가족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식구가 많은 가족으로 상정한다면, 부무가 미성년의 많은 자녀를 거느리고 있는 집도 대가족이라 할 수 있지만 그런 경우도 많지는 않은 것이다.


그런데 부부가족은 때로는 직계가족으로 전환되고 직계가족이 다시 부부가족으로 전환되듯이, 직계가족의 흔적도 가옥구조에 그대로 남아 있다. 동춘당 송준딜(宋浚吉), 명재 윤증(尹拯), 완당 김정희(金正喜)가 살았던 유명한 옛집들은 모두 직계가족이 살 수 있는 형태를 하고 있다. 안채에는 시어머니가 거처하는 안방과 며느리가 거처하는 건넛방 또는 머릿방이 있고,, 사랑채에는 아버지가 거처하는 큰사랑방과 결혼한 아들이 거처하는 작은 사랑방이 있다. 그러나 이런 집도 사실은 그다지 많지 않아서 방 두세 칸으로 이루어진 집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은 부부와 자녀로 이루어진 부부가족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입증하고 있다.

확대가족은 효를 중시하는 유교적인 이념에 부합되는 가족형태이다. 본래 부모가 살아 계신데 집을 따로 가지고 재산을 따로하는 분호별산(分戶別産)은 유교적인 효의 관념에 위배되는 것으로 여겨 고려시대에는 이를 금지하는 법까지 제정되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그럴 수가 없었고 관습도 그렇지 않았다.


결혼한 자녀가 모두 부모와 함께 사는 확대가족은 조선 말기에 극히 일부 부유한 양반집에서 나타났을 뿐이다. 또 그렇다 하더라도 부모가 사망하면 형제가 서로 살림을 나누는 것이 원칙이었다. 형제 사이에 불화가 일어날 경우 중재자 역할을 할 부모가 없는 상태에서는 그것이 가족 간의 큰 싸움으로 번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판소리 '박타령'에서 놀부 부부가 흥부 부부를 내보낸 것은 논리적으로 타당한 일이었다. 전통적 유교관념에서 강조했던 부모와 자녀, 그리고 형제 사이에 함께 살며 재산을 함께 소유한다는 동거공재(同居共財)는 단지 이상적인 이념일 뿐이었다. 현실적으로 집에 공간이 없으면 함께 살고 싶어도 살 수가 없다. 퇴계 이황(李滉)도 자신의 아들이 처가살이를 하고 있는데 아름다운 일이 아닌 줄은 알지만 집이 좁아 함께 살 수 없다고 토로하고 있다.



한편 17세기까지만 해도 결혼하면 남자가 여자 집에 들어가 사는 입장(入丈) 풍습이 있었다. 이런 풍습은 이미 늦어도 고구려 때부터 있었던 풍습으로서 꽤 오랫동안 유지되어 온 것이 많은 기록으로 확인된다. 실제로 조선시대 중기까지도 김숙자(金叔滋), 이언적(李彦迪), 김성일(金誠一) 등 여러 이름 있는 양반집안에도 처가살이 풍습이 존재했음을 기록으로 확인할 수 있다. 그 결과 자녀들은 친가 못지않게 외가를 매우 중시했고, 친밀도는 오히려 외가가 더했으며, 사위와 딸이 처가의 제사를 지내는 일도 사대부들의 일기에서 자주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장인이 여러 사위와 함께 살 수는 없었으며, 처가살이하는 남자들도 몇 해가 지나면 대개는 분가하여 따로 살림을 차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우리나라의 가장 보편적인 가족형태는, 직계가족의 속성을 지녔고 직계가족으로 전환할 수 있는 부부가족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집도 그러한 구조에 맞게 지어졌다.

-'전통사회와 생활문화(이해준 정승모 정연식 전경목 송찬섭 공저)'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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